가상의 원주민 ‘빠야족’이 직원으로 채용돼 ‘인간 카트’로 일한다. 손님이 왕이 아니라 ‘직원이 왕’인 이 마트에서는 고객센터 바닥에 손님이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리면서 물건을 환불해달라고 애원한다. 마트 대표는 해바라기 탈을 쓰고 손님을 맞이한다.
지난달 20일부터 방영 중인 tvN 드라마 ‘쌉니다 천리마마트’에 나오는 장면들이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황당한 설정의 연속에 “저게 무슨 드라마냐”고 혀를 끌끌 차는 시청자들도 있겠지만 ‘병맛(맥락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없음을 뜻하는 신조어)’의 B급 코드에 익숙한 젊은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겁다. 금요일 심야 시간대 방송임에도 시청률이 선전하고 있고 온라인 게시판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화제성도 높다. ‘천리마마트’에 쏟아지는 관심은 조회 수 11억뷰를 기록한 동명의 네이버 웹툰 원작의 인기 덕분이기도 하지만 맥락도 근본도 없어 보이는 B급 코드가 우리 사회에서 당당한 하나의 문화적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B급 코드 콘텐츠, 세련되지는 않지만 빠져든다=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B급 코드’ 콘텐츠들은 ‘병맛’ 유머와 언어유희로 가득하다. 퀄리티가 높지 않고 유치하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하지만 바로 그 특유의 감성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B급 콘텐츠는 얼핏 보면 ‘저게 뭐냐’고 할 수 있지만 은은한 중독 현상을 일으킨다”며 “어처구니없는 상황 설정들이 마니아층을 불러 모은다”고 설명했다.
젊은 층이 즐기는 웹콘텐츠에서는 B급 코드를 자극하는 콘텐츠의 인기가 더욱 거세다. JTBC 디지털 스튜디오 룰루랄라의 독립채널 ‘워크맨’은 방송인 장성규의 몸을 사리지 않는 아르바이트 도전기가 큰 웃음을 선사한다. 지난 5월 개설 후 현재 구독자 300만명을 넘어섰다. ‘선을 넘는’ 막말과 애드리브가 이어지지만 댓글에는 ‘아이돌 뮤비를 능가한다’ ‘2030에 특화된 드립’이라는 긍정적인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병맛 더빙’으로 유명한 유튜브 크리에이터 ‘장삐쭈’도 구독자 수 198만명을 자랑한다. 고전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소리를 지우고 목소리와 효과음을 더빙한 영상으로 시작해 큰 인기를 얻어 이제는 신한생명·박문각 등 기업 광고를 제작하기도 한다.
B급 코드는 진지한 이미지가 강했던 교육방송 EBS까지 침투했다. B급 코드를 자극하는 캐릭터 ‘펭수’가 대표적 예다. 펭수는 4월부터 EBS1채널과 유튜브 ‘자이언트 펭TV’에서 선보인 키 210㎝의 펭귄 캐릭터로 김명중 EBS 사장의 이름을 수시로 부르는 등 위계질서에 구애받지 않는 당돌함과 솔직함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게임 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항의하거나 “EBS 퇴사하고 KBS 가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권위 타파·자유로움…젊은 세대의 공감이 인기 바탕=B급 코드의 확산을 뒷받침하는 것은 젊은 층의 공감과 호응이다. tvN ‘쌉니다 천리마마트’에서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회의 권력관계를 헤쳐나가는 마트의 젊은 점장 문석구(이동휘 분)의 모습이 이 시대 청춘들을 연상케 한다. 김 평론가는 “젊은 시청자들이 잘나고 멋진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기보다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현실적인 캐릭터에 호응을 보내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기승전결이라는 상투적인 틀과 정해진 현실을 통쾌하게 깨버리는 것도 인기 비결이다. 치열한 경쟁과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해하는 청춘들에게는 권위나 기존 질서에 얽매이지 않는 B급 코드가 하나의 새로운 스트레스 해소법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 A급으로 불리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면 소외된 서민들에게 B급 병맛 코드는 일종의 판타지”라며 “열심히 노력해도 안 되는 서민들은 기승전결로 흘러가는 A급 판타지가 아닌 그들만의 B급 판타지를 꿈꾸기 시작했다”고 평했다. A급 문화를 쫓아가며 현실과의 괴리감을 느끼는 것보다 A급 문화를 폄하하고 돌직구를 날리는 B급 캐릭터에서 대리만족을 얻는다는 얘기다.
B급 코드 콘텐츠의 주도적 소비층이 1995년대 이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출생한 Z세대라는 점도 이러한 점과 무관치 않다. 한국소비자학회장인 김상훈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세대를 가리키는 밀레니얼 세대의 경우 대세를 쫓아가는 경향이 있어 인증샷이나 득템 문화가 인기였다면 Z세대는 ‘난 그것 몰라도 돼’ ‘난 내가 좋아하는 걸 좋아하면 돼’라는 식으로 개인의 취향을 강조한다”고 설명했다. /김현진기자 star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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