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정릉IC 교차로에서 정릉동 성당 쪽으로 한두 골목만 들어가면 붉은 벽돌집들이 다닥다닥한 정릉의 속살이 드러난다. 북한산을 등지고 정릉(사적 제208호,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 무덤)을 앞에 둔 이 동네는 한때 솔샘마을로 불렸고 ‘솔샘로’라는 고운 길 이름을 남겼다. 내년 4월 정식으로 개관할 예정인 성북구립 최만린미술관은 이곳 솔샘로7길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원로 조각가인 최만린(84)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지난 1988년에 손보고 들어와 살며 작업해온 2층 집이다. 지난해 성북구가 부지면적 100평(330㎡) 규모의 이 집을 성북구립미술관 분관 형식의 미술관으로 조성하기로 했다. 미술관이 된 작가의 집은 개관 사전행사로 오는 30일까지 한시적으로 문을 열었다. 극구 인터뷰를 사양하던 작가는 이곳 최만린미술관의 2층 아카이브 전시실, 그러니까 자신의 서재였던 옛 방에 햇살을 맞으며 앉아 있었다. 지난 30년간 늘 그랬던 것처럼.
‘미술관이 된 집’이 처음 지어진 것은 1970년이라고 했다. 현관부터 내부까지 아치형 구조가 유난히 많은 집이다. 50년이 다 된 동그란 문 손잡이가 닳고 닳아 거칠거칠한 것이 꼭 늙은 어머니의 손을 잡은 듯하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으로 보이는 여인상은 1958년작 ‘이브58-1’이다. 전쟁을 몸소 겪은 작가가 전후 세대의 상처와 고통을 ‘태초의 인간’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가느다란 다리로 폐허를 딛고 선 인물은 아이를 품어야 할 배 앞쪽으로 날카로운 가시덤불을 들고 있다. 좌절과 분노와 상실감이 실낱같은 희망과 뒤엉켜 있다.
“처음 만든 ‘이브’ 연작의 첫 번째 석고상이에요. 저건 작품이라기보다 그 당시 말 못할 내 마음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내 삶의 상황 그 자체죠. 내가 본 것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핍박받던 모습, 죽음과 생명에 관해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어요. 인간의 대명사로 이름 붙인 ‘이브’는 거칠고 볼품없는 모양새입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인생’을 깨우친 최 전 관장이 작품을 보며 말했다.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은 그는 “그저 살아남아야지”라는 생각뿐이었다. ‘생명 의지’라는 거창한 단어를 떠올릴 여력도 없었건만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폐허에서 찾아낸 생명에의 본능’이라며 ‘실존주의’가 응축된 대표작으로 평한다. 정작 작가는 “힘들어 ‘죽고 싶다’가 아니라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허물어지고 파괴된 곳에서 부스러기를 모아 복원하듯 흙을 붙이며 내 마음의 조각들을 쌓아올린 것”이라며 “고급 재료도 아닌, 내가 살았던 시대의 흔적일 뿐”이라고 말한다. 조각가의 손자국이 역력한 이브 석고상 옆
에는 제작 당시 에스키스(초벌그림)로 그린 먹 그림을 걸어 공명을 이룬다.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난 최만린은 경기중 3학년이던 1949년 신설된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국전)에서 입선한 것이 계기가 돼 서울대 미대 조소과에 입학했다. 흙을 만지는 일에서 위안을 얻었기에 조각이 좋았다. 당대 최고 대학을 졸업했지만 작가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또렷한 목소리와 흙 빚는 두 손뿐”이라 덜컥 붙은 라디오방송사 아나운서로 3년을 일했고, 방송국 복도에서 우연히 만난 여배우 김소원씨를 인생의 동반자로 얻었다. 그래서 배우 최불암과는 동서지간이다.
“1961년이던가, 성북동 삼선교 근처에 방 한 칸을 얻어 신접을 차렸고 방에 딸린 두세 평 남짓한 마루에서 작업하곤 했어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막막하던 시절이에요. 하나둘씩 애들이 태어나 방에서는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리던 어느 날이었죠. 마루 처마에 엄지손가락만 한 새가 둥지를 짓기 시작하더니 좁쌀만 한 알을 낳아 새끼를 키우는 겁니다. 저 작은 생명도 제 둥지 지어 새끼를 건사하는데 멀쩡한 내가 셋방에서 애들 키우는 게 부끄럽고 반성이 되더라고요. 작든 크든 내 손으로 집 지어 아이들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건축하는 친구의 아버지가 정릉 청수장 건물터 위쪽에 허허벌판의 땅 200평 정도를 갖고 있다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친구에게 집을 짓자 청했고 전 재산이다시피 한 십만여원으로 땅 80평을 샀다.
“가난하던 60년대의 정릉천은 복개되지 않아 물이 흘렀고, 강가의 모래를 손으로 거둬 시멘트로 벽돌을 만들고 있었어요. 그 벽돌을 한 장 한 장 사서 짊어지고 옮기며 ‘내 손으로’ 집을 지었어요. 친구가 13평짜리 작업장 설계를 해줬고요. 겨울에는 눈 때문에 잠시 공사를 멈췄고 이듬해 봄에 지붕을 얹어 집을 완성했습니다.”
처마에 둥지 치던 작은 새처럼 오롯한 자신의 힘으로 집을 지었다. 작가는 “벽돌을 다 못 사 벽을 짓다 만 부분도 있었다”면서 “정릉천에 나뒹구는 동그란 돌을 주워 대문기둥을 세우고 내 이름 적힌 나무 문패도 붙이던 순간이 가장 자랑스러웠다”며 그 시절을 회고했다. 1964년의 일이다.
대학에 출강하기 시작해 1967년 서울대 교수가 됐고,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지내면서도 그는 정릉 그 동네를 떠나지 않았다. 최 전 관장은 “아파트 광풍이 대단하던 시절이라 이사하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고 하면서도 “요즘 집은 죄다 유리와 금속이지만 내 집은 모두 흙이라오. 난 흙에서 떨어지면 불안하기에 흙이 느껴지는 이 집이 정말 좋다”고 말했다. 그런 마음은 작가의 작품세계와도 일치한다. 최만린의 초기작은 인간에 주목한 ‘이브’ 연작에 이어 생명의 근원을 더듬은 ‘뿌리’, 탄생의 시원인 ‘태(胎)’와 ‘맥(脈)’ 시리즈로 이어졌고 1987년 이후로는 ‘O’ 연작을 통해 비움의 깨달음을 설파하고 있다.
최근 작품들이 보여주는 비움의 철학을 실천하고자 그는 살던 집을 내놓았다. “이 동네에는 미술뿐 아니라 음악·문학 등 각 방면의 선배들이 일가를 이뤄 예술 공간을 형성했는데 국립·시립도 하기 어려운 일을 자치구인 성북구의 성북문화재단이 확고한 의지로 이루며 선진문화행정을 이끌어주니 무척 고맙게 여긴다”고 운을 뗀 최 전 관장은 “과정이 어땠건 정릉골은 내 일생이 담긴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인데 비록 내 몸은 세상을 떠나야 하지만 마음이 머무를 곳을 마련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큰 위안인지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성북구가 예산을 확보해 집을 매입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작가는 조각 66점과 관련 자료 60점까지 총 126점을 무상으로 최만린미술관에 기증했다. 유난히 감나무가 잘 자라는 동네라 앞뜰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를 보며 “저 감 못 따먹는 것 하나 빼고는 아쉬울 것 하나 없이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집은 작가가 살던 모습을 최대한 유지한 채 미술관으로 변모했다. 1층을 탁 틔워 전시장으로 조성하면서 2층을 오르내리는 계단은 원형을 남겼다. 집 주변을 에워싼 단풍나무는 50년 전부터 있던 것들이니 원래 자리 잡고 있던 자연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작은 인공연못과 운치 있게 놓인 돌들에서 작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제대로 감상하려면 미술관 내부만 볼 것이 아니라 건물 뒤쪽으로도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 좋다. 삼성동 코엑스 앞에 공공조형물로 조성된 ‘맥’의 좀 작은 버전인 작품을 비롯해 꿈틀거리는 장기를 닮은 ‘태’ 등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 꼭 작가와 함께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30년 살면서 집을 가꾸기보다는 돌 틈 비집고 나온 풀 포기 하나, 야생화 하나까지도 소중한 생명으로 여겨 제 삶을 지키게 해 준 것을 보람으로 여깁니다. 나도 하나의 작은 씨앗에 불과하니 더불어 사는 게 우리 생명에 대한 찬미니까요. 그게 곧 나의 예술철학이기도 합니다.”
남겨서 내어준 집과 작품을 통해 무엇을 얘기하고 보여주고 싶느냐는 질문에 작가는 한참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내 평생 생명과 근본을 얘기했습니다. 집 역시 우리가 나왔고 다시 돌아갈 ‘근원’의 그곳입니다. 근원과 근본의 시작은 마음인데,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머리에서 시작하고 마음이 따르게 합니다. 가슴은 두고 머리로만 일합니다. 머리는 도구일 뿐인지라 아무리 용써봐야 진리에 도달하는 절대적인 머리는 없습니다. 서구 문명의 영향 같은데 안타까워요. 흙과 마음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이곳에서, 작품 속에서 얻으시기 바랍니다. 바닷가 조약돌, 흙 부스러기 하나가 만들어져 이곳에 다다르기까지 수억년이 걸렸습니다. 자연과 마음의 진리를 두드려보세요.”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사진 오승현기자
He is…
△1935년 서울 △1954년 경기고 졸업 △1958년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1963년 동 대학원 졸업 △1967~2001년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 △1972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초대작가 △1974~1975년 미국 프랫인스티튜트 수학 △1997~1999년 국립현대미술관장 △2006~2008년 헤이리예술마을위원회 이사 △2001년~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