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독을 그만둔다면 만화가가 되고 싶어요. 어린 시절부터 만화가가 꿈이었습니다.”
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제77회 골든글로브상 시상식에서 한국 영화 최초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수상 소감을 전하며 이같이 말했다. 봉 감독의 만화 사랑은 유명하다. 어린 시절부터 여러 장르의 만화를 섭렵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성당을 다니며 교회 회지에 자신의 만화를 연재했고, 대학생이 돼서는 일정 급여까지 받으며 연세대학교 신문인 ‘연세춘추’에 만평을 그렸다. 초등학교 시절 직접 그린 만화는 지금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영화를 만들게 된 이후에도 항상 그의 곁에는 만화책이 있었다. 봉 감독이 만들어내는 영화는 줄거리부터 세세한 연출 방법에 이르기까지 만화의 영향이 곳곳에 미쳐 있다. 스스로를 ‘만화 수집가’ ‘만화광’이라고 소개하는 그에게 만화란 무엇일까.
◇‘몬스터’ ‘20세기 소년’…봉 감독이 밝힌 시나리오에 영향을 준 만화들=시나리오를 구상할 때 혹은 시나리오가 막혔을 때 봉 감독의 손에는 항상 만화책이 들려있었다. 2013년 개봉한 영화 ‘설국열차’의 원전이 동명의 프랑스 만화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봉 감독은 서울 홍대에 있던 서점 한양툰크의 단골이었다. 영화 ‘살인의 추억’(2003)을 마치고 차기작 ‘괴물’(2006)을 준비하던 중 답답한 마음에 서점을 찾은 그는 그날 우연히 집어든 그래픽노블 ‘설국열차’를 선 채로 끝까지 읽고 영화화를 결심했다고 한다.
만화가 그의 영화에 영감을 준 것은 ‘설국열차’가 처음은 아니다. 봉 감독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그의 첫 장편영화인 ‘플란다스의 개’(2000)의 시나리오를 작성할 때도 우라사와 나오키의 ‘해피!’를 틈틈이 읽으며 시나리오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해피!’는 가난한 여고생이 프로 테니스선수를 준비하며 겪는 부조리한 일들을 그린 성장 만화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은 이후에도 봉 감독의 영화와 함께했다. 그가 대중에게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영화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집필할 때는 만화책 ‘몬스터’가, ‘괴물’을 집필할 때는 우리사와 나오키의 대표작 ‘20세기 소년’이 함께 했다. 봉 감독은 지난 2006년 우라사와 나오키와의 대담에서 “‘20세기 소년’에는 등장인물이 먹는 장면이 정말 많이 나온다. 먹는다는 행위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가로 이어져 ‘괴물’에도 먹는 장면을 많이 넣었다”고 말했다. 봉 감독은 ‘20세기 소년’의 영화 연출을 제안받은 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지난 11일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을 축하하며 봉 감독 캐리커처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며 둘의 오랜 우정을 표했다.
봉 감독이 어린 시절 사랑했던 만화 중 하나로 꼽은 ‘미래소년 코난’의 주인공 코난은 그의 첫 넷플릭스 장편영화 ‘옥자’(2017)에서 주인공 ‘미자’를 탄생시켰다. 봉 감독은 지난 2017년 칸 영화제에서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주인공 코난의 여자 버전, 짐승 같은 매력을 지닌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며 영화의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미자는 시골 산골짜기에서 자란 소녀로 대기업에 맞서 동물 옥자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이다.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 작업이 막혔을 때는 영국의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 그래픽노블 ‘프롬 헬’에서 살인사건을 통해 시대상을 그려내는 법을 참고했다고 한다.
◇만화 같은 구성·상상력 녹여 낸 ‘봉준호표’ 영화 =봉준호 감독은 탄탄한 스토리와 치밀한 연출로 ‘봉테일’(봉준호+디테일)이란 별명이 따라다닌다. 그의 디테일이 응집된 곳이 영화 콘티다. 봉 감독은 영화 스토리보드를 전문작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그리는 습관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컷마다 앵글, 세트, 효과 등을 세밀하게 그린 콘티는 아트북으로 출간되기도 하는데 마치 한 권의 만화책을 연상시킨다. ‘기생충’도 1,000여 컷으로 촘촘하게 구성된 콘티 덕에 촬영을 수월하게 마칠 수 있었다. 오랜 전 만화 작품을 그렸던 것처럼 봉 감독은 지금도 사실상 콘티라는 형태로 만화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봉 감독 스스로도 과거 “인쇄된 콘티북을 보면 내가 만화가가 돼서 만화 신간이 출간됐구나 하는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고 말했다. 그가 ‘괴물’에서는 그렸던 콘티는 스페셜 DVD 부록에 포함돼 공개됐었으며, 콘티가 포함된 옥자 아트북이 국내외에 출판됐다. 지난해 8월 출간된 ‘기생충 각본집앤스토리보드북’은 아카데미 4관왕 소식이 알려지며 순식간에 완판된 상태다. 그는 “실제로 콘티를 직접 그리다 보면 머릿속에 구체적인 장면이 잘 그려진다”며 “영화와 가장 가까운 매체가 만화인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해외에 이어 오는 26일 국내개봉을 앞둔 흑백판 ‘기생충’ 역시 그의 만화 취향과 일맥상통한다. 봉 감독은 지난 2013년 ‘EBS 독서 캠페인’에 출연해 앙꼬의 만화 ‘나쁜 친구’와 찰스 번즈의 ‘블랙홀’을 추천했다. 두 작품 모두 흑백으로만 이뤄진 그래픽 노블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10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봉 감독은 이 책들을 추천하며 “빛과 어둠으로만 표현된 그림체를 사랑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봉준호 감독이 이토록 만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민아 영화평론가는 “봉 감독은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봉 감독이 유년시절을 보낸 70~80년대만 하더라도 만화는 일탈로 여겨졌는데 집안에서 자유롭게 만화를 즐길 수 있게 해준 환경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 같다”면서 “다만 환경이 주어진다고 다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봉 감독은 시각적인 예민함이 발달한 감독으로 남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미지로 전달하는 데 특출난 능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봉 감독은 단순히 이야기 줄거리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감독이라 생각한다”며 “이미지를 동반하지 않고는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충분히 전할 수 없다는 마음이 그 배경이 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어 “영화 스토리보드는 컷으로 진행되기에 만화와 유사한 점이 많다”며 “봉 감독은 만화적인 연출에 익숙하다 보니 그 속에 특유의 유머를 넣을 수 있는 여유도 탄생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한민구기자 1min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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