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동안 서울의 노들섬은 욕망의 대상이었다. 1960년대 물놀이를 즐기던 모래밭을 콘크리트 둑에 모아 담은 게 노들섬의 시작이다. 이후 서울 강남·강북에서 한강대교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노들섬을 바라보며 유원지·오페라하우스·한강예술섬 등으로 밑그림을 그렸다. 누구 하나 이 섬에 별다른 애착은 없다만 한강의 상징이 설 만한 새로운 상상은 해봄 직했다.
지난 2019년 가을. 전혀 화려하지 않은 노들섬이 다시 문을 열었다. 그간 들끓던 욕망은 잦아들었다. 건축물은 옆으로 치운 대신 큰 마당을 열었다. 탁 트인 시야에 한강과 한강 변 빌딩들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랜드마크 욕망이 비켜선 노들섬 위에서 한강의 서울, 서울의 한강이라는 랜드마크를 누리게 됐다. 발견하지 못했던 장소의 잠재성이 깨어난 순간이다. 노들섬 프로젝트를 설계한 엠엠케이플러스(MMK+) 건축사사무소의 김지훈 소장은 “사람들이 건물이 아닌 여전히 섬으로 느끼고 들어오기를 바랐다”면서 “노들섬이 한강의 경관을 가리지 않고 비켜주며 한강과 하늘, 노을, 빌딩 숲 야경을 거스르는 게 없도록 설계했다”고 말했다.
<최초의 先운영·기획 사업모델>
유닛이 모여 커뮤니티 만드는 콘셉트
다양한 프로그램 수용·확장성도 고려
노들섬 프로젝트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운영방식부터 정했다. 약 12만㎡ 섬을 어떤 용도로 활용할지를 우선 공모했다. 기존에 지방자치단체나 공공기관 주체로 공공시설물을 지어두고 이에 맞는 운영자를 뽑는 방식과 순서를 바꾼 것이다. 앞서 다 지어 놓고서야 용도가 바뀐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나 완공 후 방치 3년여 만에 운영을 시작한 ‘세빛둥둥섬’의 전례를 방지하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 최초의 모델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2015년 ‘밴드오브노들’이 운영자로 선정되고 이 운영방식에 맞춰 뒤따라 엠엠케이플러스가 설계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공유재산법 시행령이 개정돼 민간위탁 방식을 쓸 수 없게 됐다. 사업 백지화는 피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입찰방식으로 운영자를 재선정하기로 했다. 이미 당선된 팀도 2년여간 해온 일을 뒤로하고 다시 경쟁했다. 오히려 더 까다로운 심사 끝에 밴드오브노들이 주축이 돼 다시 꾸린 ‘어반트랜스포머’가 다행히 다시 운영자로 선정됐다. 이때가 2018년 6월로 이미 현장은 골조 공사까지 마무리된 상태였다. 다소 프로그램 규모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다른 운영팀이 선정돼 이 사업모델이 무의미로 전락하는 최악은 피했다. 당초 음악을 중심으로 한 70여개의 소규모 단체들이 모인 운영 기획은 20개 안팎으로 줄고 각각의 사이즈도 커졌다. 방문객을 조금 더 늘리고 사업성도 높이기 위한 방책이었다.
진행되던 설계안이 변경된 프로그램을 안정적으로 흡수했다. 가로 5m, 깊이 10m 구조의 모듈로 이뤄지는 유닛을 기본 틀로 활용한 덕분이었다. 각 유닛에 들어선 작은 조직들이 격자(grid) 틀 안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콘셉트여서 작은 유닛 여러 개를 합해 해결할 수 있었다. 서측 1층에 ‘차츰’ ‘레코드’ ‘식물도’가 모여 있는 공간에는 초기의 콘셉트가 구현되고 있다. 맹필수 엠엠케이플러스 소장은 “작은 단체들이 부스별로 제작·판매·워크숍 등을 벌이며 스스로 채워나갈 수 있는 틀이 콘셉트”라면서 “특별히 튀지 않고 중성적으로 뼈대를 만들어둬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변적으로 수용하면서도 확장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고 설명했다.
<외딴 섬, 흘러드는 장소로>
한강·하늘·빌딩숲 거스르지 않게 설계
표류하듯 들어와 잠시 머물다 가는 섬
운영 총감독을 맡은 김정빈 서울시립대 교수는 “단 하루의 자발적 표류. 일상을 벗어나 문득 표류하듯이 찾아와 예기치 않은 즐거움을 발견하는 곳, 그곳이 노들섬”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노들섬은 일반적인 문화시설의 접근성과 큰 차이가 있다. 섬이라는 특수성으로 보통 버스정류장에 내려 접근해왔다. 따라서 목적성 있는 방문보다는 어쩌다 잠시 들르고 잠시 머물다 가는 그런 공간을 지향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류장이 있는 다리와 만나는 동선이 매우 중요했다. 설계자도 노들섬의 잠재성을 확대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보고 가장 신경 쓴 부분이기도 하다. 도로에서 1.5m가량 오른 레벨을 상부 데크 광장, 즉 2층으로 펼치고 그 아래인 1층은 기존 노들섬의 지표면에 맞췄다. 도로에서 보면 서쪽 시야로는 건물이 가려지지 않고 완만하게 올라선 땅으로 보이는 높이다. 땅이 연장돼 전망 데크, 뒤편 스탠드와 노들마당으로 이어진다. 여의도 전경이 보이는 좌측으로는 프로그램 유닛이, 우측으로는 라이브하우스가 위치한다. 1층과 2층의 유닛은 복도, 외부 공간이 교차한다.
조명을 넣은 유글라스로 빛나는 라이브하우스는 섬 동측 다목적시설과 함께 유일하게 색채가 밝은 시설이다. 빛나는 두 개 큰 박스 덩어리는 기존 콘셉트가 유지된 대형 공간이다. 라이브하우스는 400석 이상을 수용하는 중대규모의 대중음악시설이다. 너른 데크를 따라서 한층 더 오르면 육교를 넘어 동편으로 이동할 수 있다. 동측에는 다목적시설과 함께 맹꽁이가 사는 노들숲이 있다. 둑 아래까지 동선은 이어진다. 둑 안은 모래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콘크리트를 깨서 조성한 ‘크랙가든’이 노들섬 시설을 둘러싸고 있다. 호안에서 침수에도 살 수 있는 식생과 비슷한 나무들로 조경했다. 산책로이자 전망대 공원 틈틈이 프로그램을 만나면서 노들섬을 체험할 수 있다.
< 봄을 기다리는 노들>
섬에서 바라보는 한강도 매력있지만
‘공공의 마당’ 채워질 프로그램 기대
겨울을 나고 있는 노들섬은 짐짓 쓸쓸해 보이기도 하다. 버스만으로 접근이 다소 불편해 여타 공원처럼 유동인구가 많기는 어렵다. 일부러 중성적인 색감을 준 탓에 실제 과거 휘황찬란한 오페라하우스 조감도를 본 사람들은 삭막하다는 실망을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운영자를 미리 선정해 준비된 프로그램으로 운영되고 있어 어느 문화시설보다 계획이 탄탄하다. 지자체에서 개관 초 제공하는 박람회나 전시가 끝나고는 자생의 길을 찾지 못한 타 시설과는 다르다. ‘노들서가’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벌써 명소로 이름이 났다.
더불어 노들역 방면에서 육로로 연결되는 ‘백년다리’도 계획돼 있다. 차량 교통량을 늘리지 않고 도보 접근성을 더 높이는 데 집중했다. 짧은 기능성과 화제성보다는 장기적인 작동 가능성을 신경 쓴 모습이다. 그럼에도 아직 풍경이 완전히 푸르지는 않다. 랜드마크를 포기해 어쩌면 밋밋해진 프로그램에 과연 대중들이 얼마나 반응할지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이에 대해 맹 소장은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도 밖에서 풍경과 함께 사진 찍는 게 랜드마크이듯 서울 한강의 풍경은 노들섬에서 바라보는 그 자체로 매력 있다고 봤다”며 “프로그램의 틀은 충분히 확장 가능하도록 디자인했으니 이제 운영을 통해서 노들섬을 채워나가는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노들섬의 억새와 나뭇잎은 스스로 오르겠지만 전망 좋은 공공의 마당을 채우는 건 앞으로 남은 과제다. 노들섬의 봄을 지켜보자.
/이재명기자 nowlight@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