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경제가 미증유의 위기상황에 빠지고 기업들의 연쇄도산이 우려되면서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역할 확대에 시장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회사채나 기업어음(CP) 등 자금시장이 패닉 현상을 보이면서 한은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나 일본은행(BOJ)처럼 기업들에 직접 자금을 공급하는 수준의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은의 발권력 동원에 정부와 정치권이 여건 마련과 법 개정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주열 한은 총재도 “모든 수단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만큼 행동에 나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일시적 신용경색으로 자금난을 겪고 있는 피해 대기업을 지원하는 것으로, 부실 좀비기업을 지원하는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한은은 정부가 24일 대통령 주재 2차 비상경제회의를 통해 발표할 10조원 이상의 채권시장안정펀드 조성에 절반가량의 유동성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참여할 계획이다. 정부는 채안펀드를 통해 회사채뿐 아니라 CP 매입 등도 지원할 방침이다. 한은의 유동성 지원은 환매조건부채권(RP)을 매입해 채안펀드에 출자한 금융회사들에 자금을 공급하는 간접 방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은은 또 증권사 등 비은행기관을 대상으로 24일 추가 RP 매입을 실시하고 RP 대상 증권도 확대하기로 했다. 한은이 은행에 대출할 때 담보로 인정해주는 증권도 기존 국채 및 정부보증채에서 은행채와 공기업 특수채 등으로 넓힐 계획이다.
하지만 이들 대책은 한은이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취한 전통적이고 간접적인 지원들로 요동치는 신용시장을 안정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더욱이 코로나19 사태가 본격적으로 기업 수익성이나 실물경제에 타격을 주기 시작하면 연쇄적인 기업도산과 대량실직 사태가 예상되는 만큼 한은이 발권력을 동원해 연준이나 BOJ 같은 직접적 자금공급으로 시장을 안정시킬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연준은 코로나19 사태로 뉴욕 금융시장이 흔들리자 1조달러의 CP 매입 프로그램을 가동한 데 이어 4조달러 규모의 기업 유동성 대출까지 검토하고 있다. BOJ 역시 지난 16일 CP와 회사채 매입 한도를 각각 1조엔씩 늘린 3조2,000억엔과 4조2,000억엔으로 책정해 코로나19 사태로 직격탄을 맞은 기업들에 직접 자금을 수혈하고 있으며 심지어 증시 하락을 방어하기 위해 상장지수펀드(ETF) 매입 목표액까지 연간 6조엔에서 12조엔으로 늘렸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코로나19 사태로 경제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위기국면에 접어들었다”면서 “미국과 일본·유럽 중앙은행들이 이미 했거나 하고 있는 정책들을 한은이 못할 이유가 없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조 연구위원은 “한국의 경제상황이 일본·유럽 선진국들과 같이 장기 저성장이나 고령화에 직면한 만큼 통화정책도 더욱 적극적이고 선제적이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은이 사실상 기업에 직접 자금을 공급하는 등의 역할 확대가 현행법상 쉽지 않거나 막혀 있는 부분은 정부와 정치권이 적극 해소해야 할 부분이다. 한은의 직접 매입 가능 채권은 현 규정상 국채나 정부 보증채 등 신용등급이 높아야 하는 만큼 정부나 금융 공기업들이 일반 회사채의 보증에 나서 한은이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해주고, 정치권은 최대한 이른 시일 내 한은의 역할을 확대하는 법 개정에 나서는 것이다. 여권에서는 경제통인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비상경제상황 때 한은의 직접 자금 공급에 길을 터주는 방안들을 다각도로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책은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며 “기업을 살리고 금융시장을 안정시키는 데 정부는 물론 정치권도 속도감 있게 새로운 정책을 과감히 채택해나가야 국민의 신뢰를 살 수 있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한은 수장인 이 총재가 정부와 정치권의 지원을 견인하는 차원에서 ‘위기 시 모든 대응책을 강구하겠다’는 구두선이 아니라 과감한 행동으로 기업과 시장의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김윤경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업이 고용을 유지하고 투자가 지속될 수 있도록 우선 우량 기업을 살리고 보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손철·백주연기자 runiro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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