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나 미국의 주요 대형 미술관들은 주로 서양 미술품을 전시하지만, 아시아 전시실도 잘 갖춰 놓고 있다. 아시아 미술은 인도, 중국, 일본 중심인데 한국 미술도 약 70여 개의 해외 미술관에 독립된 전시실이 설치됐고 그 반 이상이 미국에 있다. 그런데 이곳을 방문하는 한국인 관람객들은 한국실이 중국이나 일본보다 크기도 작고 전시도 다양하지 못하다는 점에 실망한다. 전시가 풍부하지 않은 것은 한국 미술 소장품이 적기 때문이다. 해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미술품은 많은 곳이 500여 점 정도, 적은 곳은 수십 점에 불과하다.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정책적으로 해외의 주요 박물관에 장기 대여도 해 주고 있다. 한국 미술의 소장이 많지 않다는 것은 중국, 인도, 일본에 비해 해외에 반출된 수가 그래도 적었다는 증거다.
서양인들의 아시아 미술 수집은 19세기 중반에서부터 20세기 초에 가장 많이 진행됐다. 수집은 정식으로 구입한 경우와 약탈의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많은 미술품이 약탈된 곳은 지구상의 마지막 오지였던 중국령 중앙아시아였다. 이곳은 오래 전부터 동서교역의 간선도로로 번영했으나 방치된 후 서구 열강의 군사적, 경제적 이해와 얽혀 탐험의 장소가 되고 있었다. 자국 문화재의 중요성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이에 스웨덴의 스벤 헤딘, 영국의 오렐 스타인, 독일의 알베르트 구룬베델 등의 고고학자들은 탐험대를 이끌었고 이들에 의해 중앙아시아의 유적과 벽화들이 마구 잘리고 채집됐다. 프랑스 펠리오의 돈황 탐험과 자료 반출도 이 무렵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탐험은 1920년대까지 지속됐으나 1920년대 후반에 중국 정부가 중국 내에서 발굴하는 모든 물건이 중국 소유임을 선포하면서 발굴 문화재의 해외 반출은 일단 막을 내렸다. 서양으로 가져간 유물들은 현재 브리티시 뮤지엄, 베를린 민속박물관을 비롯해 30여 개의 박물관과 연구소 등에 흩어져 있다.
중앙아시아뿐 아니라 중국 내에서도 20세기 초, 청나라가 붕괴하면서 사원이나 관리의 집안에서, 또는 철도 개발과 무덤 발굴에서 나온 물건들이 미술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이후 몰락한 가문이나 사찰에서 가지고 있던 문화재 등이 해외에 많이 반출됐다. 초창기에 동양미술을 수집했던 사람들은 전문가라기보다는 외교관, 사업가, 선교사, 과학자, 의사들로 이들은 민속품이나 인류학적 물품, 또는 도자기 등의 공예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결국 1897년 일본은 미술품의 해외 유출을 막고자 ‘고대사찰보존법(古社寺保存法)’을 선포했고 비로소 외국으로 나가는 미술품의 수가 감소하게 됐다.
조선에도 밀매꾼은 많았다. 1894년 서울 소재 프랑스어 학교 교장이던 에밀 마르텔은 자신을 비롯한 외국인들의 미술품 수집의 시작은 ‘조선인들이 자꾸 팔러 왔기 때문’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상인들에는 두 그룹이 있었는데 하나는 양반의 부탁으로 대신 팔러 오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고분 도굴품을 밀매하는 경우였다고 기억했다. 당시 외국인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금속공예, 불교 회화 등이었고 특히 개성 근처에서 일본인들이 도굴한 고려자기가 상당히 인기 있었다. 도자기는 도굴에 의해 불법으로 반출된 것이 많았지만 왕실에서 외교사절이나 왕실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들에게 하사한 것들도 있다.
해외에서 소장된 아시아의 미술품들이 모두 약탈된 것은 아니었다. 그 과정이 불확실한 경우도 있었지만 정식 구입도 많았다. 19세기 후반 유럽이나 미국에는 아시아 미술품을 거래하는 골동상들이 있었다. 서구인의 중국미술에 대한 매혹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 왔지만 이 무렵에는 특히 ‘자포니즘’의 붐과 함께 일본미술에 대한 관심이 컸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일본 공예품은 대단히 인기였고 ‘봉 마르쉐’ 같은 파리의 백화점에서도 팔렸다. 파리에서는 1870년대부터 독일인 무역상 지그프리트 빙이 요코하마에 있는 동생의 상점을 통해 일본 등 아시아 미술품이나 물건들을 수입하고, 반대로 프랑스 물건을 일본에 팔았다. 1895년에 그는 ‘메종 드 라르 누보(Maison de l’Art Nouveau)’라는 상점을 열었는데 주 거래품은 이름처럼 아르 누보 장식품이었으나 일본 미술품도 많이 거래됐다.
빙과 달리 일본에 집중하면서 파리에서 일본미술품 판매의 권위자가 됐던 사람은 하야시 타다마사였다. 하야시는 원래 동경제국대학을 나와 나전칠기 등을 수출하던 기리유우(起立)공상회에 근무하다가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통역으로 프랑스로 갔다. 그 후 파리에 정착한 그는 자신의 상점을 열고 우키요에(浮世畵)뿐 아니라 나전칠기, 도자기 등을 팔았고 모네를 비롯한 화가·평론가 등 미술계 인사들과 깊은 교분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한때 그를 문화재 반출자로 낙인찍었으나 최근에는 새롭게 재평가되고 있다. 하야시는 일본인들이 마구 약탈하거나 헐값으로 사간 한국의 미술품들도 일본에서 가져가 유럽이나 미국에 팔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파리에 하야시가 있었다면 뉴욕에는 야마나카 세다지로가 있었다. 19세기 말 뉴욕에서 작은 골동상점을 운영한 그는 당시 인기였던 이국적인 공예품보다 동양미술의 주류인 불교 조각이나 고서화 등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그의 고객에는 록펠러 가문, 밴더빌트, 이사벨라 가드너(이사벨라 가드너 미술관의 설립자)를 비롯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같은 유수한 미술관들도 있었다. 야마나카는 미술품을 팔면서 상세한 설명문을 곁들여 아시아의 오래된 전통문화의 이해를 도왔다. 야마나카는 골동상이 번창하자 곧 보스턴, 시카고, 런던, 파리, 상하이, 그리고 베이징에 분점을 설립했고 아시아 미술의 최고 전문 딜러로 이름을 떨쳤다. 야마나카에게서 한국미술품을 가장 많이 구입한 사람은 하와이의 앤 라이스 쿡이었다. 그는 1922년 호놀룰루 미술관을 건립하고 한국 미술품 100점을 기증해 독립된 전시실에 전시하게 했는데 이것이 해외미술관의 첫 번째 한국실이었다.
미국에서 아시아 미술 수집에 집중했던 주요 미술관들은 뉴잉글랜드 지역에 많이 모여 있었다. 이 미술관들의 경우 몇몇 개인의 열정적인 기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찰스 호이트는 일본과 파리에서 구매한 한국미술품을 보스턴 미술관에 기증했다. 보스턴 근역의 세일럼에 있는 피바디 에섹스 미술관에는 에드워드 모스의 기증이 중요했다. 동물학자였던 그는 1877년 동경대학 교수로 초빙되면서 일본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처음에는 미술에 대해서 전혀 지식이 없었지만 점차 도자기를 모으기 시작하면서 모스는 당시로는 가장 훌륭한 일본 도자를 소장한 전문가가 되었다. 미국에 돌아온 후 그는 1880년부터 1924년까지 피바디 에섹스 미술관 관장을 지냈다. 그는 당시 미국에 유학하고 있던 유길준을 알게 되었고, 유길준의 의복·모자·부채 등 유품을 기증받았다. 피바디 에섹스 미술관은 1883년 조선에 와 있던 파울 G. 폰 뮐렌도르프를 통해 조선의 도자기·토기 등 225점을 구입했으며, 1893년에는 시카고 박람회에 보냈던 악기 등을 비롯한 민속품들, 그리고 1899년에는 구한말 조선을 방문했던 구스타브 고워드의 민속품들을 소장품에 추가했다.
보스턴 미술관에 맞먹는 유럽 미술관으로는 프랑스의 기메 박물관을 꼽을 수 있다. 기업인 에밀 기메는 1876~77년에 극동지역 종교를 연구하기 위해 아시아에 파견됐고, 이때 중국과 일본 도자를 비롯한 많은 민속품들을 프랑스로 가져갔다. 기메 박물관에는 1888년 프랑스 정부의 교육예술부를 대표해 조선을 방문했던 여행가이자 인류학자 샤를 바라가 수집한 조선의 민속품들도 소장돼 있다. 이 민속품들의 정리를 위해 미술관은 화가 펠릭스 레가메를 통해 일본에 있었던 홍종우를 1년간의 계약으로 채용했다. 후일 김옥균의 암살범으로 더 잘 알려진 유학자 홍종우는 바라의 소장품을 분류하고 한글과 불어 표기를 작성했다. 최근에는 재일 화가 이우환이 자신의 조선 민화 컬렉션을 기증하기도 했다.
최근 한국의 고미술품은 해외 옥션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중국, 일본에 비해 경매에 나올 만한 고미술품이 많지 않다고 한다. 대신 한국미술에 대한 관심은 현대미술 쪽으로 옮겨가 세계의 유수한 미술관에서 조금씩 수집되고 있다.
<미술사학자·前 국립중앙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