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금속노조가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결합심사의 발목을 잡았다. 양사 합병의 분수령인 유럽연합(EU) 경쟁당국의 심사에 정식 ‘이해관계자’로 금속노조가 합류해 적극적인 반대의견을 낼 예정이기 때문이다. 조선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가적 과제인 조선산업 회생의 마지막 기회를 노조가 걷어차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4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17일 금속노조 측에 메일을 보내 “담당 심사위원들과 협의한 결과 금속노조를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결합심사에 이해관계가 있는 제3자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제3자의 지위를 얻으면 EU의 판단에 따라 심사 관련 자료를 열람할 수 있으며 관련 청문회 개최 시 이해 당사자로 참여해 의견을 전달할 수 있다. 금속노조가 EU 심사에 적극 개입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금속노조는 즉각 EU의 기업결합 중간심사보고서를 요청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전문가들은 노동계가 ‘어깃장’을 놓으면서 한국 조선업을 살리기 위한 구조조정이 좌초될까 우려하고 있다. 경쟁국 정부와 업계가 한국 조선업에 대한 강력한 견제에 나선 가운데 국내에서 노조가 발목을 잡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유럽과 일본 등 결합심사 대상국 6곳 중 한 국가라도 결합을 불허하면 대우조선 매각은 무산된다. 경제단체의 한 관계자는 “합병이 불발되면 또다시 출혈경쟁과 중복투자가 이어질 것”이라며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결합이 우리 조선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자구적이고 불가피한 조치라는 점을 노조가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EU, 韓조선 부활 견제하는데...핑계 만들어준 노조 |
노동계가 EU 경쟁당국을 찾아간 것은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결합의 가장 불안하고 아픈 곳을 공략한 것이다. 기업결합을 성사하려면 EU를 비롯해 일본·중국 등 5개국 공정거래당국의 심사를 넘어서야 한다. 결합이 해당 국가 소비자 및 관련 산업에 독과점에 따른 피해를 줄지에 대한 심사를 통과해야 승인을 받게 된다. 이 중 한 곳이라도 반대하면 그 시장은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결합이 어렵게 된다. 유럽은 국내 조선업계의 고객사인 선주사 대부분이 밀집돼 있는 곳이다. 선주들은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등 국내 3개 업체가 치열하게 가격 경쟁을 벌이면 싼값에 품질 좋은 배를 사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세계 1·2위 업체인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이 합병하면 선주사의 가격 협상력이 약해져 선박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 선주가 두 회사의 결합을 반기지 않는 이유다. 조선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한국 조선업 재편으로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곳은 선주들이 몰려 있는 유럽 국가”라며 “기득권을 놓지 않기 위해 결합심사에 한국에 불리한 자료를 제공하는 등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 경쟁당국은 이미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 결합에 대한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있다. EU 경쟁당국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한국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가 중점적으로 보는 것은 인수합병(M&A)이 소비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라고 했다.
금속노조는 EU가 현대중공업에 통보한 중간심사보고서를 확보해 결합 반대의 근거를 찾아 EU 경쟁당국을 설득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노조 관계자는 “단일 기업 노조가 아닌 금속노조로 제3자 지위로 등록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노동계의 이 같은 ‘원정 투쟁’이 “도를 넘은 자해행위”라고 지적한다. 산업 경쟁력 회복을 위해 힘을 합쳐도 부족할 판에 생존 카드로 꺼내 든 기업결합을 앞장서 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카타르발(發) 대규모 수주 소식이 전해졌지만, 한국 조선업계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1~4월까지 한국 대형 조선 3사는 올해 수주 목표액의 10%를 간신히 넘기거나 못 미치는 성적을 내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클락슨에 따르면 올해 5월까지 세계 누적 선박 발주량은 469만CGT(표준화물선 환산톤수)로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61%나 급감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세계 물동량 감소, 유가 상승, 미중 무역분쟁으로 발주 심리가 위축된 탓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노조의 행보가) 국익이 훼손되든 아랑곳하지 않고 밥그릇만 지키겠다는 이기주의로 치닫고 있다”며 “자국 국민, 자사 직원들이 스스로 ‘독과점’이라며 반대 의견을 내면 경쟁국이 이를 무기로 활용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노조의 견제가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노조는 제3자 지위를 인정받기 전부터 이해관계자로 심사에 참여해왔는데 중간 심사에서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며 “오히려 EU에서는 가스선 독과점 여부에 더 집중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한동희기자 dwis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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