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년 전만 해도 두메산골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쓰였다. 그중에서도 경상북도 청송(C)은 봉화(B)·영양(Y)과 함께 오지 중의 오지로 꼽히며 소위 ‘BYC’로 불린 곳이다.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인구가 적은데다 이름마저 생소한 청송의 이름을 그나마 외부에 알린 것은 지역 특산물과 산·교도소였던 시절이 있었다. 청송사과·주왕산·청송교도소(현 경북북부교도소)는 알아도 정작 청송이라는 지역에 대한 정보는 그만큼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방에 고속도로가 깔리고 섬과 육지를 잇는 연륙교가 놓였지만 우리 머릿속에 청송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기억돼 있다.
몇 년 전 당진~영덕을 잇는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접근성이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청송은 아직도 서울에서 차로 4시간은 달려야 갈 수 있는 곳이다. 접근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사람의 손길이 덜 탄 청정지역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언택트 시대’를 맞아 마침 청송군이 ‘산소카페 청송’이라는 브랜드를 내걸고 관광객 유치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표지판에서만 보고 지나쳤던 곳, 교통의 오지로 오랜 시간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던 곳, 태백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그곳, 경북 청송을 찾았다.
봉우리마다 깎아지른 기암절벽 품은 주왕산
세갈래 트레킹 코스엔 ‘초록 청량감’ 한가득
푸른 소나무의 고장 청송(靑松)은 주왕산으로 대표된다. 전체 면적의 84%가 산간지역인데 그 중심에 우뚝 선 것이 주왕산이다. 매년 단풍철이면 인구 2만5,000명 남짓한 이 작은 도시에 수백만 관광객이 몰려드는 것도 주왕산 때문이다. 하지만 가을이 아니고도 주왕산을 찾을 이유는 차고 넘칠 만큼 충분하다. 주왕산은 ‘돌병풍이 가린 산’으로 표현할 만큼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주봉이 해발 721m로 그리 높지 않지만 산세가 빼어나 소금강(小金剛)으로도 불린다. 봉우리마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을 품고 있고 그 옆으로 흐르는 협곡이 조화를 이루며 장관을 연출한다. 그 절경을 인정받아 지난 2017년 주왕산국립공원 일대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다.
하식동굴 배경 용연폭포선 신비로움이 콸콸
30㎞ 발걸음 끝 ‘톡 쏘는 약숫물’로 갈증 확
주왕산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가장 좋은 코스는 산을 우에서 좌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이 코스를 추천하는 것은 월외코스1·절골코스·주봉코스까지 3일이나 걸릴법한 주왕산의 핵심 명소를 반나절이면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왕산국립공원사무소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사찰 대전사(大典寺)로 향하다 보면 저 멀리 거대한 기암과 마주한다. 사찰의 배경이 된 이 바위는 당나라 주왕과 마장군의 치열한 전투 끝에 주왕의 군사가 이 봉우리에 대장 깃발을 꽂았다고 해 기암(奇巖)이 아닌 기암(旗巖)이라고 불린다. 기암의 웅장함에 홀린 듯 주왕산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전사를 지나면 월외코스1·절골코스·주봉코스 세 갈래로 길이 나뉜다. 그중 절골코스를 따라 용연폭포 쪽으로 향했다. 용연폭포로 가는 용추협곡길은 무장애 트레킹코스로 남녀노소 누구나 걷기에 부담이 없지만 완만한 길이라고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거대한 암벽 사이로 지나가는 용추협곡과 용추폭포, 최종 목적지인 용연폭포까지 주왕산을 대표하는 명소를 품고 있다. 절골코스는 원래 용연폭포에서 절구폭포를 지나 절골계곡을 들러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오는 코스이지만 여기서 금은광이삼거리로 이어지는 길로 빠지면 월외코스1의 3분의2지점까지 단숨에 넘어갈 수 있다. 금은광이삼거리를 지나 너구마을을 넘어가면 이때부터는 내리막이다. 코스의 막바지 달기폭포 전망대에서 시원한 물줄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갈증이 씻겨 내려간다.
목마름은 산책로를 따라 주왕산을 빠져나와 약수터에서 해결하면 된다. 도로 중간에 상탕·중탕·하탕 등 10여개의 약수터가 자리하고 있다. 눈으로만 보던 달기폭포수를 직접 마셔 볼 수 있는 기회다. 달기약수는 탄산성분이 많아 톡 쏘는 맛이 있고 위장병에 좋다고 한다. 기포가 올라오는 것을 봤을 때 위쪽 약수터일수록 탄산이 더 강한 느낌이다. 산 밑 마을에서는 약수닭백숙과, 닭불고기 등 주왕산 약숫물을 테마로 한 음식점이 즐비하다. 대전사부터 약수터까지는 12㎞ 정도의 코스로 총 30㎞가 넘는 3개 코스의 주요 명소를 단시간에 돌아본 셈이다.
주왕산 약숫물은 청송 읍내를 거쳐 멀리 안동 임하댐까지 흘러간다. 물길을 따라가다 보면 청송 읍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용전천과 만난다. 굽이치는 용전천 절경을 바라보기 좋은 곳에는 영락없이 누각이나 정자가 들어서기 마련이다. 망미정(望美亭·청송군 향토유형문화유산 제15호)은 1899년 청송 부사 장승원이 지었고 찬경루(讚慶樓·보물 제2049호)는 1428년 부속 관영 누각으로 건립됐다. 찬경루는 당시 왕비인 소헌왕후와 그 가문 청송 심씨의 관향임을 들어 관찰사 홍여방이 그 은덕을 찬미해 ‘찬경루’라 이름 지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물길따라 찬경루·송소고택 등 역사의 숨결
인적 드문 산골오지마을 ‘여름향기’에 흠뻑
다시 물길을 따라 청송 읍내를 빠져나오면 청송 심씨 집성촌인 덕천마을이다. 경주 최부자와 함께 영남 양대 부호였다던 그 유명한 청송 심 부잣집인 송소고택(국가 민속문화재 제250호)이 있는 곳이다. 조선 영조 때 만석꾼인 심처대의 7세손 송소 심호택이 1880년 지은 송소고택은 전국에 남아 있는 99칸짜리 사대부 반가 세 곳 중 한 곳이다. 99칸이라고 하면 흔히 방이 99개로 착각하기 쉬운데 기둥과 기둥 사이를 1칸으로 쳐서 99칸이다. 서양의 대저택만큼은 아니더라도 조선 양반 가옥으로는 최대 규모다. 본채 외에도 별채만 6개에 달하는 송소고택의 위용에서 소헌왕후 심씨 등 조선의 왕비 4명을 낳은 세도가의 위세를 엿볼 수 있다.
논밭이 별로 없는 산간지역에서 얼마나 큰 부자가 나왔겠나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한양으로 가려면 심씨 땅을 밟지 않고는 갈 수 없었을 정도라고 한다. 해방 직전 심처대의 9대손까지 2만석을 유지했다고 하니 그 가세가 짐작되고도 남는다. 송소고택 주변으로는 그의 자손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10여채의 가옥과 함께 마을이 형성돼 있다. 그중에서도 송소고택과 그 바로 옆 차남 심상광의 가옥인 송정고택, 심호택의 동생 심시택의 창실고택을 둘러볼 만하다. 마을로 들어서면 전신주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100여년 전 그대로다.
사실 덕천마을은 주왕산을 보러 왔다 잠시 들렀다 가는 곳이 아니라 따라 시간을 내어 하루 이틀 머물러야 진가를 알 수 있는 곳이다. 한옥체험을 운영 중이라고 하니 가장 좋은 방법은 여기서 숙박을 하며 주왕산 등 청송 주요 관광지를 여유롭게 둘러보는 것이다. 마을에는 와이파이가 깔려 있고 고택을 개조한 카페도 들어서 있다. 인적도 드물고 바이러스도 없는 곳에서 마음껏 자연을 만끽해보기를 추천한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따라 ‘외씨버선길’이 조성돼 있다. 총 13개 코스로 이어진 길의 모양이 조지훈 시인의 승무에 나오는 외씨버선과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이 길의 시작점이 청송이다. 내친김에 외씨버선길을 따라 영양·봉화까지 경북 3대 청정지역을 모두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글·사진(청송)=최성욱기자 secre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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