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지난해 9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확정 받고 광주 교도소에 복역 중인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모친 빈소에 문재인 대통령과 박병석 국회의장,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여야 유력 정치인들의 조화·조문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성범죄자의 빈소와 정치인들의 조문 행렬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고, 안 전 지사의 인터뷰까지 보도되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대통령이 성범죄자에게 ‘대통령’이라는 공식 직함을 넣어 조화를 보내는 것은 적절한 대응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6일 안 전 지사의 모친 빈소에는 대통령 직함이 새겨진 문재인 대통령의 조화가 놓였다. 이해찬 대표와 이낙연 민주당 의원, 김태년 원내대표,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추미애 법무부 장관 등 여권 인사들도 빈소를 찾아 안 전 지사를 위로했다. 이낙연 의원은 조문 뒤 “많이 애통하시겠다 위로의 말씀을 드렸다”고 전했다.
안 전 지사는 빈소인 서울대병원에 도착했을 당시 취재진 앞에 서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 길에 자식 된 도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했고, 지지자들이 “못 나오시는 줄 알고 걱정했다”고 하자 “걱정해주신 덕분에 나왔다”고 답했다.
이러한 여권 인사들의 조문 행렬과 안 전 지사의 인터뷰 등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세간에 관심을 받으면서 일각에서는 아무리 안 전 지사가 모친상을 당했다 하더라도 여권의 지금과 같은 대응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 여성 근로자 페미니스트 모임 ‘국회페미’는 6일 성명을 통해 “위력으로 수행비서를 상습 성폭행해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안희정씨가 지난 4일 모친상을 당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박병석 국회의장, 이해찬 민주당 당대표,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 등이 조화를 보냈고 많은 정치인들이 조기를 보내 빈소를 가득 메웠다”며 “오랫동안 함께 일한 동료의 모친상을 개인적으로 찾아 슬픔을 나누는 것은 당연한 도리지만 안희정씨는 더 이상 충남도지사가 아니다. 정치권은 안씨가 휘두른 위력을 형성하는 데 결코 책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정부의 이름으로, 정당의 이름으로, 부처의 이름으로 조의를 표해선 안 된다”며 “조화와 조기 설치 비용은 국민의 혈세나 후원금으로 치러졌을 것이니, 안 씨 모친상에 국민의 세금으로 조화나 조기를 보낸 정치인들은 이를 개인비용으로 전환 처리하라”고 촉구했다. 아울러 “정치권에서는 이번 일이 마치 안씨의 정치적 복권과 연결되는 것으로 국민이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발언과 행동을 주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의당도 안 전 지사 빈소에 조화를 보낸 문 대통령의 처신이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조혜민 정의당 대변인은 6일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로 대법원에서 3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은 안 전 지사 빈소에 여권 정치인부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조화와 조기를 보내고 있다”며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끊이지 않는 2차 가해 앞에 피해자는 여전히 힘겨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이어 “오늘과 같은 행태가 피해자에게, 한국 사회에 ‘성폭력에도 지지 않는 정치권의 연대’로 비치진 않을지 우려스럽다”고 날을 세웠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역시 여권과 문 대통령을 비난했다. 그는 “정치권에서 성범죄자에게 공식적으로 “힘내라”고 굳건한 남성연대를 표한 격”이라며 “코로나로 경제가 어렵다 보니 대통령 이하 여당 정치인들이 단체로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수출했나 보다”고 비꼬았다.
그러면서 “지금 이 분위기, 매우 위험하다. 국회페미에서 성명을 냈다. 여성단체에서도 이들을 따라 줄줄이 성명을 내야 할 상황인데 과연 성명이 나올까? 그런 당연한 확신조차 갖기 힘든 시대”라며 “자칭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성폭행범에게 직함 박아 조화를 보내는 나라. 과연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라고 맹폭했다.
진 전 교수는 다른 글에서도 “대통령이라면 공과 사는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냥 사적으로 조의를 전하는 것이야 뭐라 할 수 없겠지만, 어떻게 성추행범에게 ‘대통령’이라는 공식직함을 적힌 조화를 보낼 수 있느냐”며 “굳이 보내야겠다면 적어도 ‘대통령’이라는 직함은 빼고 보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어 “대통령은 제 식구가 아니라 국민을 챙겨야 한다”며 “대통령이 위로할 사람은 안희정이 아니라, 그에게 성추행을 당한 김지은씨다. 지켜야 할 사람도 도지사가 아니라, 그의 권력에 희생당한 여비서다. 그게 국민의 대표로서 대통령이 할 일”이라고 했다. 또 “김지은씨가 ‘대통령 문재인’이라 적힌 그 조화를 보면, 그 마음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한편 안 전 지사의 형집행정지기간은 오는 9일 오후5시까지다. /조예리기자 sharp@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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