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홍은사거리를 지나다 보면 내부순환로를 따라 긴 직사각형 형태로 서 있는 ‘유진상가’를 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 3월 이 건물의 지하에 산책로를 조성하던 서대문구청은 지하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공간을 발견했습니다. 두꺼운 풀숲에 가려져 입구가 보이지 않고, 사람이 접근하기도 어려웠다는데요. 그 풀숲을 헤치고 들어간 관계자가 발견한 것은 홍제천 위로 100여 개의 기둥을 세워 지상의 유진상가 건물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빈 공간이었습니다. 누가 무슨 이유로 이 공간을 텅 비워놓았을까요? 유진상가의 이 독특한 설계에 얽힌 비밀을 이번 <부동산TMI>에서 알려드립니다.
◇ “유사시 무너뜨려 탱크 진입 막는다”…유진상가의 비밀 = 1970년에 지어진 유진상가는 민간 건물이지만 군사적인 목적도 갖고 있는 건물입니다. 지하에 숨겨져 있던 텅 빈 공간(사진)은 북한과의 전쟁시 폭약을 터뜨려 건물을 쉽게 무너뜨리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하네요. 거대한 건물을 방어벽 삼아 수도 서울을 지키려는 목적에서 이런 지하 공간을 만들어 둔 것이죠. 1층의 필로티 구조에도 군사적 목적이 숨어있습니다. 유진상가의 1층 필로티는 간격이 일반적인 건물보다 넓고, 높이도 상당한데요, 탱크를 세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이렇게 지은 것입니다. 다행히 유진상가를 무너뜨려야 할 일도, 1층에 탱크를 세울 일도 없었기에, 지금도 유진상가는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간 건물인 유진상가에 어떻게 이러한 군사적 설계가 반영될 수 있었을까요? 이는 시대적 상황 때문인데요. 유진상가 건설 직전인 1968년 김신조 등 남파공작원 31명이 청와대 인근까지 침입해 총격전을 벌인 1·21 사태가 벌어집니데. 이에 박정희 대통령이 1969년을 ‘싸우며 건설하는 해’로 명명했을 정도로 반공의 깃발이 드높았던 시대였죠. 그 표어가 반영된 결과물 중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유진상가였던 것입니다.
◇남산터널·소공동 지하도·세운상가에도 군사적 목적 = 유진상가 외에도 서울과 경기도 곳곳에는 군사적 목적을 품고 있는 건축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서울시 중구 남산 1, 2호 터널입니다. 북한과의 전쟁시 인근 주민들이 대피할 수 있는 방공호 역할로 설계됐습니다. 중구 소공동에 위치한 소공동 지하도 역시 북한과의 장기전이 벌어질 때 서울시청으로 사용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하네요. 지금은 여의도 공원이 된 여의도 광장의 애초 목적은 군사용 비행장이었습니다. 길이 1,350m, 넓이 40만㎡에 이르는 긴 모양을 갖게 된 것은 바로 그런 태생 배경 때문입니다. 세운상가의 경우 일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목조 건물이 대부분이었던 당시에는 폭격으로 인한 화재가 가장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일제는 미군이 폭격할 경우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심 곳곳을 텅 비워 놓는 일명 ‘소개도로’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훗날 이곳에는 무허가 판잣집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세운상가였습니다. 과천이 행정 중심지로 낙점된 이유도 북한과 관련이 있습니다. 입지적 편의성 외에도 장거리포를 관악산이 막아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전쟁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지만, 도시는 그 모든 기억을 품은 채로 남아있습니다. 지금 새로 지어지는 수많은 아파트와 건축물도 아마 수십 년 후엔 현 시대의 스토리를 꾹꾹 눌러 담은 역사의 산 증인이 될 것입니다.
◇50년 간 버려진 유진상가 하부 ‘빛의 예술길’로 재탄생 = 과거 공간이 지어질 당시에 누렸던 명성도, 군사적 목적도 이제는 모두 빛바랜 과거의 이야기가 됐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렇게 오래된 공간을 현재의 감각으로 재탄생시키려는 노력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사례가 바로 유진상가 입니다. 서울시는 시민 통행이 금지됐던 유진상가 하부를 공개하고 공공미술 전시를 진행한다고 지난 2일 밝혔습니다. 건물을 받치는 100여 개의 기둥 사이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설치미술과 조명예술, 미디어아트, 사운드아트 등 8개 작품을 설치해 환상적인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고 합니다.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매일 12시간 동안 운영한다고 하니 더운 여름 이곳을 찾아 산책하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박윤선기자 sepy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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