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초, 세계적 오페라 극단인 영국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재정 압박이 심해지자 소장하던 그림을 경매에 내놓았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그린 ‘데이비드 웹스터 경의 초상’이었다. 1945~1970년 로열 오페라 하우스 관장을 지낸 웹스터의 은퇴에 맞춰 제작돼 50년 가까이 오페라하우스를 지켜온 상징적 작품이다. 그림은 지난 10월 22일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146억 원에 낙찰됐다. 베일에 가려졌던 그림 구매자가 최근 밝혀졌다. 영국의 휴대폰 소매업체 카폰 웨어하우스의 공동 창업자인 억만장자 데이비드 로스였다. 그는 최근에 로열 오페라 하우스 이사회 의장으로도 선출됐다. 로스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나는 영국의 역사가 대중을 위해 보존되기를 바란다”면서 작품을 원래 자리에 계속 전시할 것임을 시사했다. 영국 대중은 환영하고 반기는 분위기다.
훈훈한 소식을 접하며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일이 생겼다면? 가령 예술의전당이 수십 년 소장해온 김환기 작품을 팔았는데 알고 보니 구매자가 예술의전당 이사회 의장이라면? “짜고 치는 뒷거래 아니냐”는 따가운 눈초리와 더불어 낙찰 가격을 입맛에 맞게 조작했다는 의혹까지 뒤따를지 모른다. 한발 더 나아가 그림 구매자에게 특정 정당에 대한 후원 내역이 있으니 정치적 거래일 가능성을 조사하라는 주장까지 나오면 어쩌나. (로스는 영국 보수당의 오랜 후원자이며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런던시장으로 재임할 당시 보좌관이기도 했다.)
삐딱한 상상일까. 컬렉터와 컬렉션 문화가 왜곡된 우리 현실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림’이 관련되면 백안시하는 독특한 국내 정서가 이런 우려를 낳게 한다.
수십 년간 미술품을 수집해온 ‘큰손’ 컬렉터들이 지난해 ‘세금 폭탄’을 맞았다. 미술품 양도세가 기타소득으로 분류돼 있건만 작품 거래가 지속적·반복적이라는 이유에서 ‘사업소득’으로 과세했기 때문이다. 미술계 전문가 A 씨는 “미술품 애호와 수집이 문화 활동이지 왜 사업인가”라며 혀를 찬다. 또 다른 전문가 B 씨는 “컬렉터가 가능성 있는 작가를 발견하면 한 사람 작품을 몇십 점씩 사기도 하고, 수십 년 소장해도 값이 오르지 않는 작품이 허다하지만 작가 지원 역할이나 금전적 손실에 대해 존중하고 평가해 주는 이는 없다”고 토로한다. 미술 시장에 종사하는 C 씨는 “비상장 주식을 오래 보유하고 손해 보면 기업 육성 차원의 기여를 인정해 이익분에서 상계해주기도 한다. 주식 투자가 업인 사람에게도 사업소득으로 과세하지는 않더라”고 안타까워했다.
미술품 수집은 투기가 아니라 혜안과 안목으로 역사를, 문화사를 함께 써가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간송 전형필 등의 문화재 수집에는 존경을 표하면서도 100년 뒤 문화재가 될 현대미술에 관해서는 인색하기 그지없다. 그러다 보니 ‘핫’하고 작품값이 오르는 일부 작가에게만 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작품 거래가 거의 없는 99%의 작가에 대해서는 무심한 게 현실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미술 시장 규모가 평균 국내총생산(GDP)의 0.1%를 차지하는 와중에 한국은 0.02% 수준인 4,000억 원 안팎에 불과하다. 세계 GDP에서 대한민국이 2%를 차지하고 있으니 지난해 미술 시장 거래액 70조 원 중에 우리가 1조 4,000억 원은 움직였어야 하지만 갈 길이 멀다. 미술품에 대한 인식 개선과 함께 작품 구입과 기증·기부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지원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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