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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인문학] 새벽잠 깨서 '달항아리'에 절한 미술중독자

■한국의 컬렉터- 이우복

감종근 미술평론가

범접 못할 빛발하는 18세기 도자기

황홀감 빠져 마음속 신령으로 대해

김홍도·정선서 이중섭·김환기까지

돈만 생기면 땅 대신 그림 사들여

"미술품 수집에 째째해선 안된다"

초보자들에 '소장가의 철학' 충고

이우복 전 ㈜대우 회장이 서울 서교동 자택에 걸어놓은 자신의 소장품들 앞에서 김종근 평론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화단의 주인공은 작가라고 하지만 사실 미술의 진정한 꽃은 그림을 사는 컬렉터이다. 한국의 컬렉터는 몇 명이나 될까. 500명? 1,000명? 1,500명? 박명자 갤러리 현대 대표는 500명 정도라고 잘라 말했다. 그림을 좋아 제대로 사서 모으는 수집가가 한국에는 겨우 그 정도라는 것이다.

중국 폴리옥션 대표 자오슈는 중국 컬렉터가 1.500만 명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미술 시장이 얼마나 작은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런 미술판에 있으면서 나는 참으로 많은 국내외 컬렉터의 집을 방문할 수 있었다. 대기업 회장을 비롯해 수백 점을 가진 컬렉터, 수십억 원대의 작품을 소장한 그림 애호가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 인상 깊었던 컬렉터들이 떠오르지만 그 중 한 분을 꼽으라면 단연 이우복(84) 전 ㈜대우 회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우복 전 회장이 소장한 조선 시대 백자들.


서울 서교동 자택의 컬렉션을 둘러본 후 ‘진정한 애호가란 이런 분이구나. 나도 빚을 내서라도 그림을 사야지’ 하고 마음을 다시 고쳐먹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충남 서천의 시골에서 자란 이 전 회장은 경기고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63년 금성방직에 입사해 근무하다 1967년 친구 김우중과 함께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1968년 대우실업 상무를 시작으로 1977년 부사장을 거쳐 1987년 대우그룹 부회장, 1995년 ㈜대우 회장을 지냈다.

그에게 그림과의 첫 번째 인연은 일곱 살 때 이발소 그림 같은 정물화 한 점이었다. 그 그림이 잊히지 않아 마침내 그림을 짝사랑하게 됐다고 했다. 대학 졸업 후 취직해 받은 첫 월급으로 처음 산 그림이 조그마한 자수 풍경화. 어디에서 그림을 살 수 있는지 몰라 그냥 백화점에 가서 샀다고 한다.

일곱 살 때 배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결코 틀리지 않는다.

이 전 회장은 스스로 모은 그림들을 가지고 컬렉터의 이야기를 담은 ‘옛 그림의 마음씨’라는 책을 냈고 그 책 머리말에 “콘크리트 숲의 백천간두 위에서도 나는 1퍼센트의 짬을 빌려 예술을 꿈꾸고 자연을 명상하며 살아왔다. 나는 그 1퍼센트에서 인생을 건져야 했다. 나는 1퍼센트의 자유로 나를 먹이고 재우고 살려온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이 회장의 컬렉션은 규모도 그렇거니와 하나하나 작품의 수준이 예사롭지 않다. 작품을 보는 눈썰미나 말솜씨가 미술 전문가를 넘어선데다 미술에 대한 넘치는 사랑 외에 많은 화가나 학자들과의 폭넓은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술계가 이 회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림에 대한 ‘타고난 안목’도 있지만 지금까지 구입한 미술품 중 모조품이 단 한 점도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거침없이 화가들의 아픈 곳을 찌르는가 하면, 현존 작가들의 비평에도 막힘이 없다.



이 모든 원천은 그의 미술 사랑이다. 그의 미술 사랑 영역은 조선 시대 회화와 도자기 그리고 근현대 미술까지 아우른다.

이우복 전 회장이 소장한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


그렇게 수집한 작품 중 빛나는 것은 단원 김홍도의 ‘포의풍류도’. 이외에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 수백 점의 도자기와 목기, 이중섭·김환기의 피란 시절 그림 등도 그의 비장품이다. 그의 집에는 이중섭·박수근 작품만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이 있을 정도다.

그의 달항아리 사랑도 빼놓을 수 없다. 언젠가 문갑 위의 달항아리가 눈길을 끄는데 무엇보다 그 자태가 몹시 장엄하고 황홀해 새벽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 항아리를 향해 큰절을 올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첫인상과는 다른 무엇으로 18세기의 달항아리가 범접하기 힘든 빛을 발하고 있었고 이후 신비감과 황홀감에 빠져 달항아리를 마음속의 신령으로 대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초보자들에게 충고한다. 그림을 사는 데 절대 쩨쩨해서는 안 된다고. 현금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지불하는 것이 좋으며, 일단 사고 나면 뒷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소장가로서의 철학을 피력했다. 그림 사는 데 인색하게 굴면 좋은 작품을 만나지 못하고 화상들이 다른 애호가에게 그림을 판다는 것이다.

1970년대 인사동을 다니면서 짜장면으로 끼니를 때워가며 이렇게 그가 산 그림들은 당시 호당 4만~5만 원 하던 박수근 작품들이었다. 그런 그림들이 이제는 한점에 5억~6억 원을 넘나들고 김환기의 그림도 10억 원대를 웃돈다.

이 회장은 당시 돈만 생기면 땅은 한 평도 사지 않고 몽땅 그림 사는 데 다 썼다고 했다. 아마도 이것이 지독한 그림 중독과 사랑이 남긴 컬렉터의 최상의 행복과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김종근 미술 평론가


<필자 소개>

김종근 미술 평론가가 ‘오색인문학’ 필진으로 합류합니다. 김 평론가는 경남대 미술과를 졸업하고 파리 1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홍익대 겸임 교수, 현대아트갤러리 관장, 석주미술상 운영위원장, 한국작가상 심사 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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