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공상을 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It’s crucial to have an active fantasy life).”
현실에서의 교류가 단절되고 대부분의 활동이 온라인과 가상현실(VR) 등으로 대체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팬데믹 시대의 현대인을 겨냥한 듯한 이 문장이 통째로 제니 홀저(70)의 개인전 제목이 됐다. 언어를 여러 형태의 예술로 만들어내는 미국의 개념미술가 홀저의 신작 개인전이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 K2와 K3에서 내년 1월 말까지 열린다. 다양한 색으로 변화하는 LED 사각기둥에서는 ’자기 혼란은 정직함을 유지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권력 남용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돈이 취향을 만든다’ 등의 문장이 물처럼 흐르고, 대리석 벤치에는 ‘고독은 사람을 풍요롭게 한다’ 등의 문구가 새겨 있다. 구구절절 옳은 말들이다. 작가는 1990년 베니스비엔날레에 미국관 최초의 여성 대표작가로 참가했고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고 월드 트레이드센터와 뉴욕·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 휘트니미술관 등 주요 기관에서 전시한 거장이다. 지난해 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작품을 선보이며 탁월한 통찰력을 국내 대중에게도 알렸다. 올 초 방한해 전시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연기됐고, 연말에 전시가 개막해 혼란기에 터득한 희망과 위로를 함께 전한다.
코로나19의 타격으로 위축됐던 화랑가에 해외 거장들의 전시가 잇따라 열리며 활력을 더하고 있다. 올 초부터 해외여행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라 국제 미술계 ‘블루칩’ 작가들의 신작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문화적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다.
지난 7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2010년작 ‘역장(Force Field)’이 5,315만 홍콩달러(약 75억원)에 낙찰돼 작가 최고가를 기록하는 등 전성기를 누리는 조지 콘도(63)의 개인전이 성동구 갤러리아포레 지하의 더페이지갤러리에서 내년 1월23일까지 열린다. 이 시대에 가장 주목받는 화가 중 하나인 콘도는 큐비즘 같은 유럽 모더니즘에 미국식 팝아트를 접목해 독창적 스타일을 이룬 작가다. 뒤틀리고 분해된 인간 , 익숙하지만 빛 바랜 캐릭터 등으로 유명하다. 힙합 뮤지션 카니예 웨스트의 앨범 커버, 빅뱅의 탑과 지드래곤 등 연예인이 선망하는 작가로서 대중적 인지도도 높다. 이번 전시에는 콘도 특유의 초상화와 ‘만화 추상’ 시리즈를 비롯해 고대 그리스·로마적 형식으로 찡그린 현대인을 빚은 검은색 청동 두상, 미국 남부 멤피스의 간판 연작 등이 선보였다.
용산구 독서당로의 갤러리바톤은 일본 출신의 미디어아티스트 미야지마 타츠오(63)의 최신작을 엄선해 개인전을 열었다. 국내에서는 삼성미술관 리움의 정문 데크에 디지털 숫자들이 각기 다른 속도로 변화하는 설치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지난 1988년 베니스비엔날레 연계전시를 통해 처음 선보인 ‘점멸하는 LED 숫자’는 시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보편적 언어로 표현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기존 작업이 벽·바닥에 고정됐던 것에서 벗어나 이번 전시를 통해 부드러운 천, 불규칙한 배열의 나무판에 숫자를 자리잡게 한 작품을 처음 공개했다. 지독한 감염병의 시대에 ‘당신의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흘러갔는가’를 물으며 고통받은 정서를 어루만지는 듯하다.
코로나로 피폐한 마음을 위로하는 데는 독일의 현대미술가 팀 아이텔(49)도 탁월하다. 이태원로의 페이스갤러리 서울이 그의 개인전을 내년 1월 16일까지 연다. 독일 통일 후 라이프치히 미술대학에서 결성된 구상화 그룹인 ‘신(新) 라이프치히 화파’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아이텔은 회화의 본질을 치밀하게 파고들었고, 동시대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이 됐다. 국내에서는 책 표지로 자주 사용될 만큼 대중적 인기가 높고, 지난 여름부터 가을까지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로 또 한번 전국적 화제를 일으켰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홀로 그림을 보는 관객을 담은 그림들이 이번 전시의 주인공이다. 그림의 일정 부분을 색면추상 같은 벽으로 처리해버림으로써 고립되고 단절된 현대인의 내면을 보여준다. 이로써 추상과 구상, 현실과 가상의 공존을 이뤄내기도 했다. 현실의 한 장면 같기에 오히려 위로가 된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다.
미학적 가치가 높은 작품들이지만 ‘투자가치’도 무시할 수 없다. 미술 시장에서는 경기가 불안정할수록 미술사적으로 검증된 동시에 국제적 수요가 견고해 환금성 높은 해외 작가들의 작품이 안정적 대체자산으로 선호된다. 서진수 강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코로나로 온라인 전시와 거래가 활발해지면서는 인지도 높은 작가로의 쏠림현상이 양극화를 부추기고 있다”면서 “이 같은 격차는 수 년간 더 커질 듯하다”고 우려를 드러냈다. 이학준 크리스티 코리아 대표는 “국내 컬렉터들의 수요가 10억원 미만 5억원 안팎 가격대의 작품들에 집중돼 있는 상황이라 이에 부합하는 해외 거장의 전시 수요가 높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미술평론가인 유진상 계원예대 교수는 “해외작가 전시에 갈증 난 관객들로서는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이라며 “전 세계적으로 안전하게 전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라는 점에서 한국은 작가들에게 매력적인 곳이며, 관객은 거리두기를 유지하면서 좀 더 사색적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숙고할 수 있다”고 긍정적인 측면을 짚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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