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사는 컬렉터에게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그림을 무조건 사기만 하는 사람, 또 다른 하나는 그림을 샀다가 다시 파는 실속 투자형 컬렉터이다.
30년 넘는 컬렉터, 패션 디자이너, 홍익대 교수로 유명한 이상봉은 무조건 사기만 하는 컬렉터군에 속한다.
패션쇼를 위해 해외 출장을 가면 제일 먼저 미술관·갤러리에 들르고 마지막 코스가 벼룩시장이다. 그는 거기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으면 앤티크든 오브제든 무조건 쇼핑한다. 이 소도구들이 얼마 뒤 모두 그의 패션에 오브제와 액세서리로 등장한다.
그의 컬렉션은 완벽하고 철저하게 본전을 뽑는 실속형이다. 오로지 패션에 영감을 주거나 물건이 되겠다 싶은 ‘촉’이 올 때만 컬렉터로서 ‘지름신’이 강림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엉뚱하게 디자이너가 된 운명적 선택과도 무관하지 않다. 어린 시절 그는 너무나 많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절밥이 맛있어 스님이 되고 싶었고 중학교 때는 노래가 좋아 음악을, 고등학교 때는 미술을 하고 싶어 방황했다. 고3이 돼서는 극작가가 되려 했고 대학교 때는 연극배우가 꿈이었다. 그러나 배우로서 공연을 앞두기 일주일 전 감당을 못하겠다 싶어 도망쳤다.
그러다 우연히 ‘미싱’을 돌리던 친구에게 수입이 어떠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먹고 살 만하다’고 했다. 정말 먹고 살 수 있을까 싶어 작은 수선집이나 할 생각으로 이 바닥에 인생을 묻었다. 그것이 패션에 몸담게 된 디자이너 이상봉의 운명이었다.
2년 동안 명동에서 패션을 공부하고 그는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됐다. 여기서 그는 미술이 패션과 단짝이며 패션에 절대적으로 영감을 주는 원천이라는 사실을 체험했다. 많은 작가들의 전시를 보러 다니고, 특히 젊은 작가들을 가까이 했다. 그들과 붙어 지내다 보니 평면 회화와 입체·조각들을 구입하게 됐고 그것들은 모두 시간이 지나면 패션 속으로 다 들어와 있었다. 그는 이제 컬렉터가 됐다.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이 피터르 몬드리안의 작품에 빠져 몬드리안 문양의 원피스를 만든 것처럼.
그의 컬렉션에는 분명한 철학이 있다. 그는 유명하거나 돈이 되는 것보다 자신의 패션 디자인에 영감을 주는 작품들에 훨씬 탐닉했고 열정적이었다.
물론 독일의 랄프 플렉 같은 유명 작가의 작품도 있지만 그의 창고는 대부분 젊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주는 작품들로 넘쳐난다. 컬렉션 숫자도 알지 못한다. 부티크 직원들은 그의 오브제 수장고를 주저하지 않고 ‘이상봉 박물관’이라 부른다.
컬렉션의 진가는 지난 2010년 파리 컬렉션을 비롯한 작가들의 작업에서 아이디어를 주고 받으며 빛을 발했고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와 함께한 젊은 조각가 박승모가 그랬으며 평면화가 박준석도, 설치작가 한성구도 그랬다. 임옥상 작가와의 컬래버도 있다.
박승모와의 작업은 석고를 마네킹 삼아 철사를 소재로 한 독특한 의상을 선보이며 ‘조각’이라는 강한 물성의 매체에 어떻게 ‘인간’의 부드러운 리듬을 줄까를 고민한 잊지 못할 일로 회상할 정도였다. 한때는 이름 있는 작품들을 샀지만 지금 최고의 즐거움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는 것이다.
방황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과 함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사는 것이 그들에게 큰 용기를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종종 ‘인연’이라고 했다. 영혼이 통한다는 느낌을 갖고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작가나 가격·투자 같은 요소는 생각하지 않고 작품을 사는 ‘신내림형’ 컬렉터다. 파리 갤러리에 갔을 때의 일이다. 매우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사지 못했다. 서울로 돌아왔는데도 구스타프 클림트를 닮은 이 스페인 작가의 작품이 꿈에 자꾸 나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복잡한 운송 과정을 거쳐 작품을 구입했다.
가구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다. 청주 공예비엔날레 홍보 대사를 할 정도로 그는 공간이나 사이즈를 생각하지 않고 가구에 대한 애정과 욕심으로 엄청 많이 샀다고 했다.
이상봉 컬렉션의 기준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벼룩시장에서 그 나라의 문화가 담긴 소품들을 죄다 모으는 것이다. 벽 한편에 있는 수집품들과 테이블, 진열된 담뱃갑, 지갑, 핸드폰 케이스 등이 다 그가 산 오브제 그리고 작가와 진행한 컬래버의 결과물이다. 그의 부티크 내외부에는 박승모 작가가 패션모델의 인체를 뜬 뒤 철사를 감고 옷을 만든 원형들이, 1층에는 박준석 작가의 작품들과 옷들이 전시돼 있다.
프랑스 속담 중에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는 말이 있다. 이 디자이너는 딸에게 디자인 공부를 시키기 위해 유명 학교를 보내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그림에 흥미를 보이더니 뉴욕 첼시에서 갤러리스트가 됐다. 그러고 보면 컬렉터도 유전임이 틀림없다.
/여론독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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