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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컬렉션' 국민 품으로…모두의 미술관 되는 리움(종합)

'시가 최대 3조' 이건희 미술품 기증

삼성家,26일께 입장 발표

국현·전남도립·대구미술관 등 지역안배

공익재단 통해 리움 등 출연 전망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위치한 미술관 리움(Leeum) 전경. /사진제공=삼성문화재단




이건희(1942~2020) 삼성 회장의 타계 이후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이하 리움) 관장과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겸 리움 운영위원장 등 유족의 상속세 자진신고 기한이 이달 말 일로 다가왔다. 19일 재계와 문화계에 따르면 삼성 일가는 상속 내용과 절차를 투명하게 밝힐 것으로 입장을 정하고 이 전 회장 작고 6개월 후인 오는 26일을 전후해 공식 입장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국보 30점과 보물 82점을 포함한 고미술과 국내외 근현대미술품 1만 3,000여점으로 민간 감정기관 3곳의 시가 감정 총액이 2조5,000억~3조원으로 파악되는 ‘이건희 컬렉션’의 향방도 이 때 확정될 전망이다. 삼성가 유족 및 관계자들은 철저히 함구하고 있지만 핵심은 고(故) 이 회장이 수집해 온 문화유산에 대한 공익적 사회환원이다.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 이건희 컬렉션에는 이 작품을 포함한 80여 점의 박수근 주요작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출처=리움 홈페이지


왜 박수근·이중섭인가?


최근 미술계를 중심으로 “이건희 컬렉션의 한국 근현대미술품 2,200여점 중 절반 이상인 1,500점 가량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이건희 컬렉션’에는 국민화가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 등 주요작 80점 이상이 포함돼 있다. 소의 얼굴을 클로즈업 한 이중섭의 ‘황소’도 있다. 반면 국립현대미술관에는 박수근·이중섭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유화가 없다. 김환기 추상미술의 완성형이라 할 수 있는 1970년대 전면점화도 국현 소장품 목록에는 없지만, 이건희 컬렉션은 일찌감치 1970년대에 그려진 푸른색 점화 등 수작을 확보했다. 미술사적 의미가 큰 이들 작품을 기증할 경우 국립미술관 소장품 목록의 ‘이빨 빠진 자리’를 메워준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김환기의 '하늘과 땅 24-IX-73 #320'. 이건희 컬렉션에는 "환기미술관 소장품을 압도한다"고 할 정도로 탁월한 김환기의 작품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출처=리움 홈페이지


삼성가 측은 국립미술관 뿐만 아니라 전남도립미술관에 이 지역 출신의 오지호,김환기,천경자부터 의재 허백련 등의 작품을 기증하기 위해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근대미술의 성지(聖地)이자 호암 이병철 회장의 ‘삼성상회’ 창업지이기도 한 대구미술관에는 현지 출신의 이인성, 이쾌대 등의 대표작을 기증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기증에 있어 지역 안배, 역사성까지 고려해 국민의 문화 향유 기회를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국보 제 140호 나전화문동경은 통일신라 시대의 청동거울로 가장 오래된 나전 장식이 특징이다. /사진제공=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쪽은 이건희 회장 수집품 기증과 관련해 “공식적으로 접촉한 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철통 보안이다. 삼성 일가가 국립박물관에 상속 유물을 기증할 경우 국보와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가 그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국가지정문화재는 상속세 대상에서 제외되는, 순수한 기증인 만큼 정부 측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칫 ‘재벌의 팔 비틀기’를 통해 기증 받는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희 컬렉션은 20만건(40만여점)의 소장품을 확보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역사적 빈 칸’을 채워주기 충분하다. 통일신라시대의 청동거울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나전 공예품인 국보 제140호 나전화문동경이 대표적이다. 보물 제926호 ‘수월관음보살도’를 비롯한 고려불화는 국립박물관이 기증받기 원할 만한 유물 중 하나다. 이건희 회장은 일찍이 고려불화의 가치를 알아봤고 1980년대부터 일본 등지에서 사 모았다. 대학교수인 한 문화재 전문가는 “고려불화는 세계적으로도 희소하고 대부분이 박물관 소장품이라 지금은 100억원을 준다해도 없어서 못 구한다”고 말했다.

3대째 예술후원


유족이 사회 환원을 목표로 이건희 컬렉션의 활용방안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역할은 삼남매 중 막내인 이서현 이사장이 도맡았다. 고령의 모친, 경영자인 오빠와 언니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이 이사장이 가족을 대표해 리움의 운영과 함께 예술후원을 통한 사회공헌을 이끌기 때문이다.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이던 그는 남편이자 제일기획 스포츠사업총괄 사장이던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장과 함께 2018년을 전후로 나란히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곧이어 2019년 1월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겸 리움 운영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이 이사장의 임무는 “사회공헌 사업을 더욱 발전시키는” 일이었다.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을 졸업한 이 이사장은 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출신인 홍 전 관장에 이어 형제들 중 유일하게 미술을 전공했다.

이서현 리움 운영위원장. /서울경제DB




이 이사장은 3대에 걸친 삼성가 이(李)씨 중 국립미술관·박물관 후원회원으로 이름을 올린 첫 인물이 됐다. 선대 회장들이 호암미술관과 리움 등 자체 뮤지엄을 통해 국부가 될 문화재와 미술품 확보에 주력했기에 그간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 등을 위한 후원 활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 홍라희 전 관장이 국립현대미술관 후원 단체인 40년 전통의 현대미술관회의 명예회원일 뿐이다.

이 이사장은 이건희 회장 작고 후인 지난해 말부터 국립현대미술관 후원회(MDC) 가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오빠 이재용 부회장과 동갑내기이자 올해 후원회장이 된 허용수 GS에너지 사장이 가입을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이사장은 지난 2월 후원회에 가입했고 지난달 초 20명 안팎 후원회원의 공식행사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전시투어에도 참여했다. 당시 인사를 나눈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과는 지난달 중순께 서울관에서 독대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과정에서 이 이사장은 가족을 대표한 미술관 후원인으로서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면밀히 검토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20년 10월 28일 경기도 수원시 선산에 마련된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 장지에서 이서현(왼쪽부터)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이 장지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술사학자인 한 사립대 교수는 “서양의 경우 이미 100~200년 전 근대기에 예술 후원의 패트론, 개인의 미술관 설립과 사회적 기여가 자리 잡았지만 우리는 경제성장에 비해 기부문화의 정착이 뒤쳐졌다”면서 “서양의 경우 유명 컬렉터의 사망 후 그 컬렉션이 ‘세기의 경매’로 이어지고 실제로 지난 2018년 록펠러 3세의 경매에서는 1,550점이 약 9,210억원의 낙찰 총액을 거둬들이는 상황이 자연스러운 반면 우리나라는 이제야 대를 이은 후원 문화, 사적 후원이 공적 기여로 선순환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평했다.

리움은 국민 누구나의 미술관


사회환원으로 가닥을 잡은 유족은 이건희 컬렉션의 상당수를 국가기관 뿐만 아니라 삼성문화재단을 통해 리움과 호암미술관 등으로도 출연할 전망이다. 공익법인에 출연하는 재산의 가액은 상속세 대상이 되지 않는다. 언뜻 미술품으로 ‘절세’하는 듯할 테지만 실제로는 유족이 1조원 가까이 손해 보는 셈이다. 기증을 통한 세금 경감보다 포기하는 현금이 더 크다. 3조원으로 평가된 미술품을 해외 경매를 통해 매각할 경우 상속세 최대치인 50% 세율이 적용된 1조 5,000억원만 납세하면, 매각제반비용을 빼고서도 1조원을 현금화 할 수 있다. 유족은 상속세 6년 분할납부 제도인 연부연납을 택해도 연간 2조원을 세금으로 내야하는 상황이다. 이 부회장은 이를 위해 신용대출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호암미술관 전경. /사진제공=삼성문화재단


공익재단으로의 출연(기증)은 사유 미술품 공익화를 의미한다. 리움을 삼성의 또 다른 ‘자기주머니’로 본다면 오해다. 공익재단으로 귀속된 미술품은 매매가 불가능하고, 작품을 팔아 현금화 할 수 없다. 국내법에서는 공익 법인이 해산할 경우에도 모든 자산을 국고로 귀속한다. 흔히 리움을 삼성 소유로 생각하지만 이미 리움은 ‘개인의 손’을 떠난 공익 기관이라는 의미다.

이건희 컬렉션을 품을 경우 리움은 단숨에 세계 10대 사립미술관으로 부상할 수 있다. 뉴욕의 모마(MoMA)나 휘트니미술관, 미국·스페인·이탈리아 등지에 자리잡은 구겐하임미술관, LA의 명소 게티미술관 등은 공통적으로 개인의 수집품에 기반해 설립된 사립미술관이며 지금은 관광 필수코스가 된 곳들이다.

국립미술관 이상의 설비와 인력을 확보한 삼성미술관 리움은 이건희 컬렉션을 기증받을 경우 세계 10대 사립미술관으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사진제공=삼성문화재단


정준모 국립현대미술관 전 학예실장은 “이건희 회장의 삼성이 ‘기업보국’의 산업화를 이끌고 컬렉션을 통해 이번에는 ‘문화보국’을 준비하는 계기를 만든 셈”이라며 “기증받게 될 작품들을 잘 연구·전시해서 국민 모두의 것으로 환원해 내는 정부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가의 재벌 길들이기로 왜곡되거나 ‘사면론’ 등 정치적으로 연결되면 되레 본래 의도가 훼손될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면서 “국내 컬렉터층의 대바뀜과 세대교체의 시기인 지금 ‘이건희 컬렉션’이 어떻게 되는지가 향후 다른 컬렉터들의 기증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공익적 자본주의 실천, 착한 부자를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할 향후 물납제와 문화기증제도(CGS) 도입 등의 환경 조성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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