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茸茸艸覆沙(용용초복사) 湜湜江分渚(식식강분저) 瞻望人已遐(첨망인이하) 歸舟背平楚(귀주배평초)’
(가득 풀이 모래를 덮고/ 강가에는 맑은 물 출렁이네/ 바라보니 사람은 이미 멀리 가 있고/ 돌아가는 배 너른 들을 등지고 있네)
20개의 한자가 저마다 다른 옷 걸치고 종이 위에 늘어섰다. ‘분(分)’의 획은 마치 대나무 잎처럼 곧게 뻗었고, ‘멀다’는 뜻의 ‘하(遐)’에선 굽이굽이 이어진 길이 보인다. 한국 서예의 대가 일중(一中) 김충현(1921~2006)이 삼연(三淵) 김창흡(1653~1722)의 시 ‘인보가 홀로 배 타고 돌아가는 것을 보내며’를 옮겨 적은 ‘삼연시’(1987)는 각종 서체를 가로 80cm 세로 35cm 한 화면에 담았다. 다양한 서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이 서예가 추구할 방향이라 생각했던 일중. 이 작품은 1980년대 김충현 서예의 정수로 손꼽힌다.
사단법인 일중선생기념사업회가 김충현 탄생 100주년을 맞아 특별전 ‘一中, 시대의 중심에서’를 오는 7월 6일까지 백악미술관에서 개최한다. 일중의 대표작 150여점을 만나볼 수 있는 자리다. 손재형(1903~1981), 현중화(1907~1997) 등과 함께 해방 후 한국 서예를 이끈 김충현은 한글과 한문서예에 두루 정통했다. 고전을 따르면서도 개성적인 ‘일중체’로 독자성을 인정받았고 ‘해서’를 기본으로 한 반듯한 글씨체는 대중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 경복궁의 ‘건춘문’ 현판과 삼성그룹의 옛 로고인 삼성(三星), 아모레퍼시픽의 상표 ‘설록차’ 등 대중에 친숙한 비문과 현판, 상표 글씨도 그의 작품이다.
이번 전시는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산업화, 세계화로 이어지는 격변기를 관통한 일중의 예술혼을 집중 조명했다. 1부 ‘서예에 눈뜨다’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그가 서예를 공부하며 접한 자료들과 그의 해방 이전 작품을, 2부 ‘일중의 한글서예, 변화의 중심에 서다’에서는 해방 후 그의 한글 서예를 들여다본다. 3부 ‘서체의 혼융, 일중체를 이루다’는 그의 한문 서예를 서체와 구조적인 측면에서 조명하는데, 삼연시와 함께 김충현이 파킨스병이 깊어져 절필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명통공부(明通公溥)’(1997)를 만나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북송 시대 주돈이의 ‘통서’ 성학편에 나오는 글귀로 ‘마음이 비면 명(明)하게 되고 명하면 통(通)하게 되는 법이며, 행동이 정직하면 공(公)하게 되고 공하면 부(溥)하게 되는 법’이라는 뜻이다. 김현일 백악미술관장은 “작품 왼편 발문의 글씨에선 병세가 느껴지지만, 본문에서는 서예에 평생 헌신한 작가답게 투박하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조형미를 보여준다”며 “명통공부의 내용처럼 김충현의 호(一中)와 욕심 없는 천진한 글씨가 어우러진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 4부에서는 그가 남긴 제호와 비문을, 5부에서는 평생에 걸쳐 출판한 서예 교재들과 그가 동시대 예술가와 교류하며 주고받은 작품, 편지들을 소개한다. 운보 김기창(1913~2001)이 그린 김충현의 캐리커처와 산정 서세옥(1929~2020)이 김충현의 회갑을 축하하며 그린 그림 등도 전시돼 있다.
/송주희 기자 ss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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