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토가 529년경 세운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몬테카시노수도원은 무려 다섯 차례 파괴되고, 다섯 차례 다시 지어졌다. 여전히 건물 곳곳에 남은 탄흔과 그을린 자국에선 수도원이 같은 자리에서 보고 듣고, 겪은 지난 시간이 느껴진다. 깊은 주름이 길을 낸, 산전수전 다 겪은 누군가의 얼굴처럼 말이다. 건물은 말이 없다 하지만, 한 자리에 서 ‘살아남은’ 이 생명 없는 존재는 무수한 시간을 품고 있으며 그 시간의 무게란 몇 마디의 말과 몇 줄의 글로 감히 표현할 수 없다.
신간 ‘건축은 어떻게 전쟁을 기억하는가’는 전쟁의 생존자이자 증언자인 건축물에 대한 책이다.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에 있는 28개 건축물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전쟁의 역사를 살펴본다. 저자는 건축물만큼 인간 삶과 밀접한 대상도 없다고 말한다. 인류사에서 국가나 힘 있는 세력 사이에 벌어지는 거대하고 극단적인 충돌(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성의 민낯과 인간이 겪는 희로애락이 건축물에 자연스레 투영됐다는 것이다. 예컨대 독일 베를린 한복판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 종탑은 전쟁 중 훼손됐지만 보수 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2차 세계대전 전범국인 독일 정부가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고, 과거사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그대로 뒀기 때문이다. 전쟁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인 노이에 바헤(Neue Wache)에는 전쟁터에서 아들과 손자를 모두 잃은 독일의 예술가 케테콜비츠가 만든 조각 ‘피에타’가 있는데, 깨진 지붕과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때론 한 줄기 빛이 때론 눈이나 비가 조각 위에 내려앉는다. 한 자리에 서서 시간의 흐름을 시대의 변화를 온몸으로 맞이하는 피에타는 전쟁이 남긴 뼈아픈 상흔 그 자체요, 거대한 증언자라 할 수 있다.
책은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과 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 등 오늘날 관광 명소로 유명한 곳들에 얽힌 참화와 이들의 수난사도 소개한다. 이 외에도 런던의 명물 런던탑이 왜 매년 빨간 양귀비로 장식되는지, 독일 건축의 걸작 드레스덴 성모교회가 처참하게 파괴된 뒤 어떻게 옛 모습을 찾게 됐는지 등을 흥미롭게 풀어냈다. 저자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견뎌낸 건축물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가 부딪혀야 할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는 나침반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강조한다. 1만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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