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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묘수·왕비의 베개…1,500년전 '무령왕릉 판도라'가 열린다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특별전

유물 발견했지만 훼손우려 봉인

반세기만에 5,283점 전체 공개

저반사유리로 생생한 감상 가능

왕·왕비 목관 실제크기 전시도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무령왕의 '관꾸미개'는 국보로 지정됐다. 왕을 위해 제작된 금관이라 더 화려하고 정교하게 제작됐다.




때는 1971년 7월 5일, 백제 왕성이던 웅진의 유적을 품은 충남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현재 명칭은 무령왕릉과 왕릉원)에서 5·6호분 배수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분주한 인부의 삽 끝에 벽돌이 걸렸다. 천 년도 더 된 고분지역에서 느닷없는 벽돌이 발견되자 현장은 술렁였다.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 등 정부에 긴급 보고가 타전됐고, 7일 오전에는 고고학자 김원룡(1922~1993) 서울대 교수의 발굴단이 현장을 찾았다. 벽돌무덤이었다. 도굴 한 번 당하지 않고 1,500년 가까이 원래 모습을 간직한 백제 무덤이라니, 기적이었다.

1971년7월8일 발굴조사단이 무령왕릉 입구의 가림벽돌을 들어내고 있다. 백제 무령왕의 무덤이 1,442년 만에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다. /사진제공=국립공주박물관


무덤 입구의 지석에 새겨진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무덤 주인이 백제 제 25대 무령왕이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백제를 강국으로 부흥시킨 무령왕은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옮긴 성왕의 아버지다. 무덤 주인이 확인된 왕의 고분이 발견되기는 처음이다. 계묘년(523년) 5월 7일 승하해 을사년(525년) 8월 12일에 안장했다는 내용까지 적혀 있었고 이는 ‘삼국사기’ 기록과 일치했다. 하지만 발견의 감격은 짧았다. 새로운 백제왕릉 발견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취재진과 인근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인파에 유물이 밟혀 부서지고 유적이 흐트러질 지경의 통제 불능 상태가 되자, 발굴단은 피난 가는 심정으로 유물을 쓸어 담았다. 8일 오전에 작업을 시작해 벽돌을 차곡차곡 아치형으로 쌓은 무덤 입구가 드러났다. 1,442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 발굴은 밤을 새워 약 12시간 만에 끝났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 등 정부 관계자들의 “빨리 보고하라”는 재촉이 있었다는 뒷얘기는 한참 후에야 알려졌다.

무령왕릉의 내부를 재현한 국립공주박물관의 백제웅진실 전경. 무령왕에 대해 적은 묘지명과 진묘수 뒤로 왕과 왕비를 위한 제사상이 차려져 있고 그 뒤에 목관이 나란히 놓인 발견 상태 그대로 전시 중이다.


무령왕릉의 출토 유물 5,232점 전체가 처음으로 한 자리에 전시됐다. 국립공주박물관이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특별전 ‘무령왕릉 발굴 50년,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며’를 통해서다. 왕과 왕비의 장신구 등 출토품 전체에 관련 유물을 더해 총 136건 5,283점이 관람객을 맞는다.

무령왕릉이 열리자 맨 먼저 사람들을 맞은 것은 무덤 앞을 지키고 섰던 신성한 동물 ‘진묘수’였다. 돼지를 닮았으나 머리에 뿔 하나가 달린 ‘진묘수’는 악령이나 도굴꾼을 막고자 한 본래 목적에 충실하게 무덤을 지켜냈고 국보로 지정됐다. 상설전시실 성격의 웅진백제실은 무령왕릉의 내부를 재현한 곳이라 묘지석과 진묘수 뒤쪽으로 무령왕과 왕비의 제대와 제기, 그 뒤로 두 개의 관이 나란히 놓여있다. 제사상의 커다란 청동 수저는 50년 전 발굴 공개 당시 취재진에게 밟혀 부러졌었다고 전한다. 옻칠로 마감된 왕과 왕비의 목관은 3D스캔으로 원형이 재현돼 별도로 전시됐다.

국보로 지정된 무령왕 왕비의 관꾸미개.


신라금관의 화려함에 결코 뒤지지 않는 무령왕과 왕비의 관(冠)꾸미개도 나란히 진열장에 놓였다. 실처럼 가는 금사(金絲)를 이용해 정교한 누금기법으로 만든 금귀걸이는 백제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모두 국보로 지정됐다. 왕비의 머리맡에서 발견된 ‘은잔’에는 신선·용·봉황·연꽃·사슴·나무를 비롯해 사람 얼굴에 새의 몸을 한 인면조신(人面鳥身)이 섬세하게 새겨있다. 백제인이 꿈꿨던 이상향을 의미한다.

무령왕릉의 왕비 머리맡에서 발견된 뚜껑있는 은잔은 백제인이 추구한 이상향을 보여준다.


왕비가 생전에 착용하다 무덤에까지 갖고 간 용무늬 은팔찌는 2개가 한 쌍을 이루는데 ‘다리’라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뜻의 ‘다리작(多利作)’이라는 글씨가 새겨있다. 장인의 이름이 확인된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무령왕과 왕비의 목과 발을 받치던 베개와 발받침은 나무로 제작됐기에 손상 우려가 있어 장기 전시가 어렵다. 그간 박물관 상설전시실에서는 복제품을 선보여왔는데 이번 전시에서만 14일부터 26일까지 ‘진품’을 모두 공개한다. 이후에는 왕의 유물과 왕비의 유물이 번갈아 전시될 예정이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무령왕과 왕비의 목관. 1,500년 전에 제작된 진품이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무령왕의 베개와 발받침.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무령왕의 베개와 발받침.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왕비의 베개와 발받침.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왕비의 베개와 발받침. 왕비의 치아도 발견돼 함께 전시중이다.


중국 남조의 영향이 강한 무령왕릉의 발굴 이후 백제의 기술 수준과 대외 교류 등에 대한 연구가 폭넓게 전개됐다. 김원룡 교수가 생전에 가장 큰 실수였다며 수차례 후회한 무령왕릉 발굴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이후 시행된 고고학적 발굴 과정이 더욱 신중해진 것 또한 성과다. 전시는 내년 3월 6일까지.

무령왕릉 내 목관을 장식한 꽃모양의 화려한 장식못.


각종 장식 용도의 금꾸미게는 순도 93% 이상의 금을 사용해 둥근 가장자리에 7~8개의 꽃잎이 달린 형태로 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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