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치(邑治)는 조선시대에 고을 수령이 업무를 보던 관아가 있던 곳이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지역 정치·행정의 중심지다.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성을 쌓아 외부 침략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도 했는데 그 중심이 됐던 것이 읍성(邑城) 문화다. 왕이 살던 도성, 전란 시 주민들이 대피하도록 한 산성, 군사시설인 병영과 달리 읍성은 선조들의 생활 터전 그 자체였다. 각종 관청과 부속건물·향교·민가·시장까지 주민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수원 화성을 비롯해 전국에 190개의 읍성이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면천읍성도 그중 하나다. 시간이 흘러 읍성의 온전한 모습을 보기는 어렵게 됐지만 성곽을 따라 그 안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주민들의 일상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1,000년 넘은 노거수가 마을을 수호신처럼 지키고 섰고 선비들이 노닐던 정자와 100년 넘은 우체국 건물 등 시간이 멈춘 듯한 낡은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조만간 있을 일상으로의 복귀를 기대하며 면천읍성으로 시간 여행을 다녀왔다.
다시 역사문화의 중심지로…복원 중인 성곽과 관아시설
면천읍성을 소개하려면 면천의 역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면천은 일제강점기인 지난 1914년 당진군과 행정구역이 통폐합되기 전까지 500년 동안 현재 당진 지역 대부분을 아우르는 정치·행정·경제의 중심지였다. 그 중심이 군청 소재지인 면천현이다. 세월이 흘러 면천군 당진현은 당진군으로, 면천군은 당진군 면천면으로 무게중심이 뒤바뀌고 면천이 자연스레 당진에 비해 낙후되기 시작하면서 면천읍성의 위상도 크게 추락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에는 읍성철거령이 내려지면서 면천읍성 대부분이 헐렸다.
구도심의 쇠락은 피할 수 없었지만 지금 면천읍성은 당진의 대표 문화유적으로 복원이 한창이다. 당진은 지역의 역사성을 되살리기 위해 면천읍성을 ‘내포 문화의 중심지’로 내세우고 있다. 고종 9년에 제작된 면천군 지도에 의하면 면천읍성의 규모는 둘레 1,514m, 높이 4.5m로 동서남북 사대문을 갖추고 있었다.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던 서편의 성곽과 남문(원기루), 옹성 복원이 마무리됐고 현재 외부에서 찾아온 관리나 사신이 머물던 객사(客舍) 등 관아 시설 복원이 진행 중이다. 복원이 끝난 남문 위로 올라가면 서쪽 성곽을 따라 걸을 수 있다.
100년 역사를 간직한 우체국 미술관, 카페로 변신하다
성곽 위로 올라서면 눈길이 가는 곳은 침략을 위해 감시하던 바깥이 아니라 안쪽이다.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일대는 면천읍성 안에 있다고 해 ‘성안마을’로 불린다. 신축 건물로 채워진 성 밖과 달리 안쪽은 대부분 오래된 단층 건물로 채워져 있다. 읍성이 수백 년된 문화재라면 안쪽 마을은 훨씬 이전부터 대를 이어 살아가는 주민들의 생활 터전이다. 세월이 흘러 대부분의 시설들이 성 밖으로 빠져나간 덕분에 성 안쪽은 읍성과 함께 오랜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대표적인 건물이 우체국이다. 일제강점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우체국 건물 3곳이 남아 있는데 첫 번째는 1905년 설치된 임시 우체소다. 1971년 신청사로 개축해 이전할 때까지 쓰던 건물로 마지막 우체국장이 인수해 집으로 사용하다 얼마 전 카페 ‘미인상회’로 문을 열었다. 바로 옆 건물은 우체국 관사다. 입구에 세워진 우체통부터 건물 내·외관 모두 적산가옥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카페를 찾는 손님들도 외지인들이 아니라 오랜 동네 주민들이다.
두 번째 우체국은 미인상회에서 300m쯤 떨어진 마을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1971년부터 2004년 성 밖으로 우체국이 옮겨갈 때까지 사용되던 곳이다. 시내에 살던 김회영 관장은 10년 넘게 비어 있던 이 건물을 인수해 2017년 예술공간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으로 개관했다. 건물 골격은 그대로 둔 채 1층은 갤러리로, 2층은 직접 원두를 갈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휴식 공간으로 꾸몄다. 창 밖으로는 시골 마을 풍경이 펼쳐지고 테라스로 나가면 영랑효공원이 내려다보인다. 오랜 우체통부터 면천국민학교에서 옮겨온 동상과 책걸상 등 곳곳에서 면천의 오랜 추억을 더듬을 수 있다. 세 번째 우체국은 성 밖으로 옮겨간 현재의 우체국이다.
화려하던 성안마을 역사문화거리로 재연
마을의 중심은 초등학교가 있던 자리다. 학교가 성 밖으로 옮겨가면서 객사 등 관아 시설을 복원하고 있는데 교내에 남은 은행나무는 그 역사가 면천읍성보다 더 오래됐다고 전해진다. 옛 면천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지기 훨씬 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무로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 장군의 딸 영랑이 심었다고 한다. 영랑이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려고 나무를 심고 샘물과 찹쌀·진달래꽃으로 술을 빚었다는 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때 빚은 술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전통주 면천두견주로 이어지고 있고 샘터인 안샘 주변은 영랑효공원으로 조성됐다.
한때 문방구와 서점이 즐비했을 학교 앞도 옛 모습 그대로다. 찾는 사람이 없던 자전거포는 현대식 책방 ‘오래된 미래’로 변신했고 ‘희망집’이라는 이름의 대폿집은 잡화점 ‘진달래 상회’로 간판만 바꿔 단 채 낡은 건물에서 영업하고 있다. 또 저잣거리는 주차장이자 관광안내소로, 마을 한구석 쓸모없이 버려진 곡물 창고는 카페로 새로 태어났다. 이외에도 주민들이 운영하는 오래된 식료품점과 이발소, 콩국수 식당 같은 곳들이 면천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마을 동쪽은 성곽이 다 허물어지면서 외부와 경계가 불분명해졌다. 골정지는 그런 마을의 입구 역할을 한다. 성 안팎을 구분 짓는 경계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이 1797년 면천군수로 부임하면서 기존의 연못을 넓히고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라는 이름의 정자도 세웠다. 이곳은 당시 인근 향교의 유생들이 찾아와 시를 읊고 학문을 익히는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지금은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연꽃 명소가 됐다. 골정지 주변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산책로를 따라 향교까지 시골 풍경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
성안마을은 작은 시골 마을이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 5분도 안 되는 거리지만 구석구석을 다 보려면 반나절도 모자랄 정도로 볼거리로 가득하다. 여유를 두고 자세히 들여다봐야 진가를 알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전 구간 포장길로 걷기에 부담이 없고 곳곳에 쉬어갈 수 있는 정자와 카페가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