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이 이사회 경영 강화에 나선 것은 최태원 회장의 지배구조 혁신 의지가 강하게 반영됐다. 지금까지 국내 기업들은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가운데 환경과 사회 분야에서는 앞장서 왔지만 지배구조(G)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최 회장의 이사회 중심 경영은 관계자들의 지배구조 투명성을 실질적으로 높여 ESG 경영을 퍼즐을 완성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SK그룹 내에서 이사회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곳은 SK이노베이션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수석대표를 지낸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이사회 의장을 맡으면서 힘이 실렸다. 김 의장은 SK이노베이션 창사 이후 사외이사로서는 처음으로 이사회 의장직을 맡았다. 김 의장은 “사내이사들은 CEO와의 관계 등으로 경영권 감독에 한계가 있는 만큼 사외이사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왔고, 최 회장은 이를 전적으로 수용했다.
실제로 김 의장은 지난 8월 블랙록, JP모건 등 대형 투자기관을 회원사로 두고 있는 아시아기업지배구조연합(ACGA)과의 회의에서 회사의 사업 구조를 ‘그린 비즈니스’로 전환하는 등 기업가치를 제고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지난 3월에는 미국을 직접 찾아 현지 배터리 사업을 점검하기도 했다.
주요 안건이 이사회에서 부결되는 것도 이사회 권한이 실질적으로 격상됐음을 보여준다. 지난달 열린 SKC 이사회에선 영국 실리콘 음극재 기업인 넥시온과의 합작법인 투자 안건이 일부 이사들의 반대로 부결됐다. SKC는 글로벌 주요 배터리 소재 업체로 도약하기 위해 여러 해외 기업과의 합작 투자를 추진해왔다. 하지만 사외이사들은 배터리 소재 강화라는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리스크를 추가 검토해야 한다며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관계자는 “중요한 안건은 사측과 사외이사가 회의 전에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한다”며 “안건 부결은 이사회의 힘이 강력하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지주사인 SK(주)도 일찍이 지배구조 강화를 위해 이사회 권한을 확대해왔다. 지난해 이사회 투자 승인 기준 금액을 자기자본 1.5% 이상에서 1% 이상으로 확대한 것이 대표적이다. SK에 따르면 2017년 이후 진행한 투자 기준으로 이사회 의결을 받아야 하는 안건은 약 25% 증가했다. 모빌리티, 친환경에너지 등 다양한 해외 기업에 대한 투자를 진행 중인 SK(주)가 이사회 문턱을 넘기 위해선 신중한 검토가 이뤄져야 하는 셈이다. SK텔레콤도 지난 3월 정관에 기업지배구조헌장을 신설해 투명하고 건전한 지배구조 확립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재계에서는 SK(주)에서 선제적으로 펼친 지배구조 개편이 다른 관계사로도 빠르게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례로 SK(주) 이사회 산하 감사위원회와 거버넌스위원회는 모두 사외이사로만 구성돼 있다. 사외이사들은 매달 정기 이사회와 위원회 활동은 물론 사업 분야별 전문 교육까지 매달 최소 4~5차례의 공식활동을 소화해야 한다. 또 수시로 회사 측 보고자료를 숙지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는 등 업무 부담도 적지 않다. 이에 따라 향후 그룹 내 각 관계사의 이사들도 최고경영자(CEO)를 직접 평가하기 위해 위원회 참여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칠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 관계자는 “‘ESG 전도사’로 불리는 최 회장이 이사회 경영을 그룹 전반으로 확대했다"면서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해 지배구조 수준을 선진국 스탠다드에 맞출 것으로 전망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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