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0월 19일. 박계동 민주당 의원의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폭로가 정국을 강타했다. 박 의원은 고(故) 노 전 대통령이 차명 계좌로 수백억, 수천억 원을 비자금으로 조성해 사용했다고 주장하며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우일양행 명의로 된 노 전 대통령의 300억 원 잔액 조회표였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첫해인 19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되면서 증권가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조성 ‘지라시’가 돌았다. 이로부터 2년 뒤 박 의원의 ‘물증’이 세상에 처음 공개됐고 1997년 노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파문으로 확산됐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정사 처음으로 구속된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박 의원이 의혹을 제기한 당시만 해도 노 전 대통령은 “전혀 무관한 얘기”라며 부인했다. 하지만 당시 잔액 조회표를 발급한 신한은행 지점장이 “노 전 대통령의 돈이 맞다”고 시인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검찰이 수사에 착수할 수밖에 없는 여론이 형성됐다.
검찰 수사는 노 전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던 이현우 씨가 검찰에 자진 출석해 ‘재임 중 만들어 사용하다 남은 통치 자금’이라고 자백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수사 착수 보름 만에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을 소환했다. 이 역시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후 비자금을 건넨 혐의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재벌 총수 36명이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같은 해 11월 16일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총 4,100억 원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노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대한 전국적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전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군부 독재 시절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과거 검찰이 전 전 대통령에게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12·12 사태에 대해서는 기소유예 처분, 5·18 광주민주화운동 시민 학살에 대해서는 ‘공소권 없음’으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비판 여론에 결국 김영삼 대통령은 12·12특별법, 5·18특별법을 만들어 전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 등을 처벌할 근거를 마련했다. 두 전직 대통령은 살인 등 혐의로 기소돼 1996년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97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두 전직 대통령을 국민 화합 차원에서 특별사면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13년이 돼서야 추징금 2,628억 원을 완납했다. 대법원 판결 이후 16년 만이었다. 노 전 대통령 동생 재우 씨가 미납 추징금 150억 원을 대신 납부했고, 노 전 대통령의 전 사돈인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이 80억 원을 대신 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의 핵심 의혹이었던 1992년 대선 자금 지원 관련 부분은 여전히 정확한 실체가 규명되지 않았다. 대선 자금의 존재 유무가 간접적으로나마 확인된 것은 2011년 노 전 대통령의 회고록을 통해서다. 노 전 대통령은 “김영삼 후보가 1992년 민자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뒤 ‘적어도 4,000억~5,000억 원이 들지 않겠느냐’고 말했고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총 3,000억 원을 전달했다”고 폭로했다. 노 전 대통령은 “김 후보가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이제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김기수 씨는 “김 전 대통령은 회고록 내용을 보고 받고서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노 전 대통령 건강 상태를 물어봤다”고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비자금 20억 원을 건넸다는 의혹도 여전히 남아 있다. 비자금 사건으로 유죄를 받고 실형을 살다 풀려난 노 전 대통령은 1999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총재에게 20억 원을 준 것은 특별히 무슨 뜻을 갖고 한 것이 아니라 야당이 어려울 때 경우에 따라 얼마간 지원해주는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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