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옥션(063170)이 오는 23일 개최하는 윈터세일에 일본의 현대미술가 쿠사마 야요이(92)의 1981년작 ‘호박’을 출품한다. 시작가는 54억원. 올 들어 지금까지 국내 경매에서 거래된 최고가 작품이 42억 원에 팔린 마르크 샤갈의 ‘생 폴의 정원’이니, 낙찰된다면 최고가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쿠사마는 올해 한국 미술경매 시장을 이끄는 ‘대장주’ 중 하나다. 지난달 서울옥션 경매에서는 2015년작 ‘골드 스카이 네츠(Gold Sky Nets)’가 36억5,000만 원에 팔렸다. 앞서 7월 경매에서는 2016년작 ‘인피니티-네트(WFTO)’가 31억 원, 6월에는 ‘실버 네트(BTRUX)’가 29억 원에 낙찰되는 등 10월 말 현재까지 국내 경매에서만 약 266억원 어치가 거래됐다. 작가별 낙찰 총액은 이우환(약 350억 원)에 이어 2위다.
‘호박’이라는 아이콘과 ‘물방울’ ‘그물’ 등 반복적 문양으로 유명한 쿠사마의 작품은 왜 이토록 높은 인기를 누리며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것일까.
단일한 색조로 화면 전체를 뒤덮는 모노크롬(Monochrome)은 한때 서구 화단의 주류를 이룬 경향인데, 쿠사마는 이를 자신만의 반복적인 패턴을 이용해 일종의 추상표현주의로 펼쳐내 동서양 전체의 고른 공감을 얻었다. 프랑스 ‘아트 프라이스’지의 분석에 따르면 쿠사마 작품은 홍콩에서 50%, 그 외 아시아 지역에서 30%, 런던·뉴욕 등 서구 시장에서 20%가 판매되는 등 세계적으로 고른 수요를 보인다. 환금성과 투자 가치에 있어 안정적이라는 의미다. 최근 글로벌 아트마켓이 여성과 흑인, 제3세계 예술가로 눈 돌리는 것도 가격 상승 요인 중 하나다.
1929년 일본 태생의 쿠사마는 폭압적인 부모 밑에서 행복하지 못한 유년기를 보냈다. 10살 무렵부터 강박신경증과 환각·환청에 시달린 그녀의 유일한 위안이 미술이었다. 그에게 ‘무한 반복’은 자아의 제거와 소멸을 뜻하는 동시에 영원성으로 이어진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붉은 꽃무늬 식탁보에서 환각이 시작됐다는 쿠사마는 개인사의 고통을 예술적으로 승화한 드라마틱한 스토리로 대중적 인기를 얻은 작가이기도 하다. 특히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에서 선보인 거울 방 속 호박들이 무한히 자기복제를 하는 작품은 그의 국제적 명성에 날개를 달았다. 1994년 일본 나오시마에 설치된 대형 ‘노란 호박’과 2012년 루이뷔통과의 협업, 지난 4월 뉴욕 보태니컬가든에서 열린 야외 조각전 등으로 인지도는 날로 치솟았다.
이번 서울옥션 경매에 출품된 쿠사마의 ‘호박’은 작가가 본격적으로 호박 연작을 시작하던 초기작이라 희소성이 높다. 쿠사마 작품은 구작(舊作)일수록 가격이 높은 편이다. 그간 가장 비싸게 낙찰된 작품은 2019년 4월 소더비 홍콩경매에서 팔린 1959년작 ‘끝없는 그물(INTERMINABLE NET) #4’로 가격은 795만 달러, 당시 환율로 약 90억3,000만원이었다. 판화가격도 상승세다. 24일 열리는 케이옥션 경매에는 50개 에디션의 ‘호박’이 추정가 1억5,000만~2억원, 120개 에디션의 ‘붉은 호박’이 1억2,000만~1억5,000만원에 출품됐다.
국내에서는 ‘슈퍼 컬렉터’의 견인에 따른 ‘낙수효과’도 작품값을 끌어올렸다.‘수학 1타강사’ 현우진 씨 등 큰 손 컬렉터의 관심이 쿠사마에게 쏠리면서 시장 전반의 ‘자극제’가 된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미술시장 전문가는 “한두 명의 슈퍼 컬렉터가 쏟는 집중적인 관심이 작품값을 끌어올린 사례로 앤디 워홀, 장 미셀 바스키아 등이 있다”면서 “좋은 컬렉터 한 사람의 영향력이 다른 컬렉터는 물론 대중 저변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긍정적 연쇄반응을 일으킨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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