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뿐인 국가 대표 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의 관장 공모가 시작됐다. 인사혁신처는 지난 1~16일 나라일터를 통해 관장 공모 접수를 진행했다. 이번 공모는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르다. 기존에는 3년 임기 관장의 유임이 결정되면 2년을 연장해 최장 5년까지 재직할 수 있었지만 현 정부는 (별도의 공론화 과정없이) 공모로 임명하는 임기제 공직자의 경우 현직도 재공모 절차를 밟아야 연임에 도전할 수 있다는 원칙을 정했다. 그러니 2019년 2월 임명돼 내년 1월 말 임기를 마치는 현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도 연임을 원한다면 공모에 응해야 한다.
윤 관장의 도전 여부를 두고 미술계가 촉각을 세우는 듯했지만 답은 금세 공개됐다. 공모 시기에 즈음해 그의 3년 업적을 추켜세우는 듯한 인터뷰가 다수의 언론 매체를 통해 나왔으니 말이다. 시기를 의도한 인터뷰가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너무도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 고쳐 맨’ 형국이다. 아니나 다를까 윤 관장은 공모 원서를 낸 것으로 확인됐다.
‘내정설’에 ‘코드 인사’ 논란까지 있었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자리를 놓고 또다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달리기가 시작됐다. 그 누구보다도 현안을 두루 파악하고 있는 현직 기관장과 외부 민간인의 경쟁은 결코 공정한 게임이 될 수 없다. 발상부터 ‘눈 감고 아웅’ 식의 공모다. 현직 관장은 공모 기간에도 언론을 통해 자신의 치적을 자랑할 수 있다. 윤 관장의 지난 3년은 큰 사고도 없었지만 뚜렷한 성과를 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해외 주요 미술 기관과의 협력 전시를 통해 ‘K아트’를 알리겠다는 포부를 강조했지만 내년으로 예정된 구겐하임미술관, LA카운티미술관, 카를스루에 미디어아트센터(ZKM) 등 해외 미술 기관과의 공동 기획 교류전은 전임 바르토메우 마리 리바스 관장 때부터 준비하기 시작해 수년 만에 이뤄낸 결실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미술관의 홍보 부서가 개인전이 한창인 스타 작가나 굵직한 기획전을 준비한 큐레이터와 같은 ‘기관 콘텐츠 홍보’보다 ‘관장 홍보’에 공들이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임기 동안은 윤 관장이 인사권자다.
연임에 도전하는 윤 관장은 ‘고위공무원단 역량 평가’도 면제된다. 2018년 이 평가에서 낙방했던 그는 우수하게 통과한 다른 지원자가 있었음에도 절묘하게 재평가의 기회를 얻어 최종 통과했다. 윤 관장에게 불공정한 권력 개입을 뜻하는 ‘코드 인사’의 꼬리표가 붙은 이유다.
존경받던 원로의 뒷모습을 얼룩지게 만든 것은 개운치 않은 제도와 시스템이다. 명색이 국립미술관 관장인데 임기는 고작 3년뿐이고 그나마 첫 2년을 전임 관장의 뒤치다꺼리로 보내다 보면 1년 정도 준비한 ‘옥동자’는 낳아 안아보지도 못한 채 미술관을 떠나야 하는 무력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글렌 라우리 관장은 1995년에 임명돼 25년 이상 미술관을 이끌었다. 그러한 까닭인지 이번 관장 공모에 도전한 이들 중에 미술계 전문가들이 염원했던 ‘진짜 고수’는 적었다. 무림의 고수는 스스로 과시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고수라 치켜세울 뿐이다. 하물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땀 흘려 뛰는 들러리짓을 무림의 고수가 왜 하겠는가. ‘내정자’를 염두에 둔 형식뿐인 공모제라면 차라리 5년 정부의 러닝메이트로 미술관장을 ‘임명’하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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