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초상화의 상당수는 ‘좌안칠분상(左顔七分像)’이다. 왼쪽 얼굴의 70% 정도가 보이게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때로는 ‘팔분상’으로 그려지기도 했고, 신하들을 바라보는 왕의 얼굴은 100% 정면상으로 그려지는 게 이상적이었다. 서양 초상화에서도 ‘쓰리 쿼터(Three Quaters)’라 하여 옆 얼굴이 4분의 3정도 보이게 그리는 게 인기였는데, 오늘날의 ‘얼짱 각도’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칠분’이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초상화를 뜻하기도 한다. 옛 중국의 학자 장역이 송나라 유학자 정이의 제문에서 그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칠분(七分)의 용모가 있다’고 적은 구절에서 유래했다. 아무리 정확하고 아름답게 그린 초상화여도 그림 한 점에 그 사람의 모든 면모를 다 담기는 불가능하니, ‘열에 일곱’이어도 충분히 탁월한 초상화라는 의미다.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박물관이 기획한 초상화 특별전 ‘열에 일곱(七分之儀)’에는 이 같은 깊은 뜻이 숨어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4점과 경기도 유형문화재 8점 등 3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 이 전시는 특히 같은 인물을 그린 여러 초상화를 한 자리에 보여줌으로써 조선 시대 초상화가 인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다양한 방식을 조명했다.
보물로 지정된 ‘조영복 초상’ 두 점도 나란히 전시장에 나왔다. 조선 숙종 때 관직에 오른 조영복(1672~1728)은 경종 즉위 후에 충청감사를 지내고 승지가 됐으나 소론이 노론을 숙청한 신임사화(1721) 때 관직을 잃고 유배됐다. 그의 동생이자 명망 높은 선비 화가인 관아재 조영석은 귀양 중인 형을 찾아가 그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가슴에 두른 가늘고 붉은 끈 말고는 장식 하나 없는 흰 도포 차림에서 검소한 사대부 정신이 엿보인다. 조선의 초상화로는 이례적으로 양손이 모두 소매 밖으로 나와 있다. 손가락은 긴 편이고 손톱이 제법 자라 있다. 군살 없는 손가락의 불거진 마디가 눈에 띈다. 해야 할 일은 많으나 손 놓고 있어야 하는 선비의 답답한 마음이려나.
시간이 흘러 노론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조영복도 풀려났다. 다시 관직에 오른 그의 모습을 화원 진재해가 그렸다. 진재해는 숙종의 어진(御眞·왕의 초상) 그리는 일을 두 번이나 맡은 당대 최고 화가였다. 조영복은 연분홍 공복을 입고 호랑이 가죽을 두른 의자에 앉은 모습이다. 세심한 묘사와 유려한 색을 사용해 공직자의 당당한 풍모를 돋보이게 했다.
전시를 기획한 정윤회 학예연구사는 “두 점의 그림이 모두 같은 해에 완성됐음에도 담고자 하는 인물의 모습이 서로 다르다”면서 “조영석이 문인 화가로서 관직에서 벗어난 형의 학자적 면모를 생생하게 담아냈다면, 진재해는 다시 관직에 오른 사대부 관료의 풍모를 정형화된 양식에 맞추어 그려냈다”고 설명했다.
경기도박물관은 1996년 개관 이후 경기 지역의 종중에서 보관하고 있던 초상화를 기증·기탁받았고, 그렇게 모인 수백 점의 초상화가 이번 전시의 근간이 됐다. 조선의 초상화는 대상의 외모는 물론 그 정신까지도 담아내려 노력했다. 사람은 ‘복잡한 존재’이기에 같은 인물이지만 여러 모습으로 그림에 담겼다. 나란히, 혹은 서로 마주 보며 전시된 같은 사람의 다른 초상화에 대해 정 학예사는 “17세기를 지나며 초상화의 의미가 사대부들 사이에서 새롭게 인식됐고 조선 후기에는 관복 입은 초상화 외에 일상복을 입은 초상화가 여럿 그려지면서 개인의 다양한 정체성이 시각적으로 구현됐다”고 설명했다.
사진이 없던 시절이라 모사한 여러 점의 초상화를 나눠가지기도 했다. ‘홍경주 초상’은 모사를 위한 초본이 함께 남아 있는 드문 사례다. ‘임우 초상’에는 내관의 정체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송시열 초상’에서는 존경받는 성현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다. ‘기계 유씨 초상’과 채용신의 초상들에서는 20세기에 접어들며 변화한 초상화의 경향을 감지하게 된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1인 1카메라’ 시대가 되어 매일같이 얼굴 사진을 남기지만 한 장의 얼굴이 사람의 전모를 말해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열에 일곱’이다. 전시는 2월27일까지.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