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피폐한 인간을 뼈대만 남은 앙상한 형태로 빚은 실존주의 조각을 시작했다. 옷도, 살도, 표정도 알아볼 수 없는 그의 ‘여인상’은 인간의 본질이 육체가 아닌 정신에 있음을 보여준다. 235㎝ 큰 키에, 부동자세로 정면을 응시한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 Ⅲ’이다. 리움미술관 소장품인 이 대표 조각이 전남 광양으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 지난해 10월 리움미술관 재개관전으로 선보인 ‘인간, 일곱 개의 질문’이 지난 연말 전시를 끝난 후 순회전 성격으로 전남도립미술관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지난 24일 시작된 이번 전시의 개막행사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생략됐으나 입소문 난 전시를 보기 위해 광양 뿐만 아니라 여수·광주 등지에서도 방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관람객들은 수백 억 원을 호가하는 자코메티 조각 앞에서 ‘관람 인증’ 사진을 찍는가 하면, 등신상으로 제작된 조지 시걸의 ‘러시아워’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전라의 모델이 몸으로 그린 이브 클랭의 ‘대격전’, 앤디 워홀의 대표작인 ‘마흔다섯 개의 금빛 마릴린’ 등 해외 미술관이나 서울의 리움미술관에 가야만 볼 수 있는 명작부터 이불·이형구·정금형·김아영·김희천 등 한국 현대미술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대면한 관객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리움 18년, 호암 40년 만에 첫 지방 순회전
삼성문화재단의 리움미술관과 호암미술관이 문화 향유를 통해 국민들과 ‘동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본격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오는 5월 29일까지 열리는 리움 순회전 ‘인간…’은 첫걸음에 불과하다. 호암미술관이 기획해 지난해 10월부터 연말까지 전시한 ‘야금:위대한 지혜’는 오는 5월 국립청주박물관에서 다시 선보일 예정이며, 이어 9월에는 국립김해박물관으로 이어진다. 리움미술관이 자체 기획전을 지방 공립미술관에서 개최한 것도 2004년 개괸 이래 처음이고, 올해 40주년을 맞는 호암미술관이 소장 유물로 기획한 전시를 지방 국립박물관에서 보여주는 것 또한 획기적 시도다.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린 리움 순회전 개막에 참석한 유문형 삼성문화재단 대표이사(부사장)는 “리움미술관은 이건희 회장님과 유족들께서 더 많은 국민들과 문화를 향유하고자 소중한 소장품을 기증하신 취지를 계승하고자 리움과 호암의 순회전 개최를 결정했다”면서 “보다 많은 국민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간 삼성의 미술관들은 외부 기관의 요청이 있을 경우 전시 환경과 취지 등을 고려해 한 두 점 정도의 소장품과 유물을 대여해줬을 뿐 기획전을 ‘통째로’ 보여준 적은 없었다.
■삼성, 더 많은 국민과 함께 향유하고자
순회전은 전시를 더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려는 삼성문화재단 측의 의지와 각 공립미술관·박물관의 노력이 맞아떨어져 성사됐다. 전남도립미술관의 경우 이지호 관장이 리움 전시를 관람한 직후 직접 순회전을 제안했다. 호암미술관의 ‘야금’ 전시도 고려 시대 금속공예품을 상당수 소장한 국립청주박물관과 가야의 철기문화를 중점적으로 보여주는 국립김해박물관 관장들이 적극적으로 순회전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야금’ 전시를 담당한 이광배 호암미술관 학예연구사는 “5월로 예정된 국립청주박물관 전시에는 기존 ‘야금’ 전 출품작의 90%를 다시 선보이면서도 이에 걸맞은 청주박물관 소장품을 맞춤 형식으로 추가해 좀 더 풍성한 볼거리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대구 비산동에서 출토돼 국보로 지정된 현존 최대 크기의 ‘세형동검’을 비롯해 금동 용두보당, 청동 은입사 향완 등이 전시될 예정이다. 다만 국보인 ‘가야 금관’은 얇은 순금제 유물의 특성상 장기 전시가 어려워 지방에서는 만날 수 없을 전망이다. 대신 ‘야금’전을 위해 호암미술관이 특수제작한 사각기둥 형태의 투명 전시장 안에 강철 재잘의 좌대를 중간에 뜬 듯 설치하는 ‘쇼케이스’도 모두 대여해 원래 전시의 연출기법을 고스란히 보여주게 된다. 한편 오는 5월에는 국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 주요작 전시가 국립광주박물관과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동시 개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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