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한편에 그림이 걸려 있다. 엄마·아빠와 아이들이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다정하게 서 있는 작품. 어딘가 이상하다. 부모의 얼굴은 인자하게 그려진 데 반해 아이들에게는 눈·코·입이 없다. 이뿐 아니다. 집 안에는 아빠 대신 악마가 앉아 있고 눈사람들이 울고 있는 작품도 있다.
3일 서울대미술관에 전시된 그림들은 대부분 아름답고 밝은색으로 채색돼 있지만 가까이 보면 우울해 보이는 것들로 가득하다. 오는 13일까지 열리는 전시회 제목은 ‘밤을 걷는 아이들’. 어두운 밤과 밝은 아이들이 교차한다.
서울대미술관 사무실에서 심상용 미술관장에게 전시회 개최 이유를 물었다. 심 관장은 “가정에서 이뤄지는 아동 폭력은 보호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것이기에 아이들이 심리적으로 저항하지 못한다”며 “아이들은 정신적으로 학대당하고 이겨야만 보상받는 약육강식의 도덕률을 배우게 된다. 아주 교활한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고통을 주고 있다는 의미다.
이번 전시회의 직접적 계기는 지난해 벌어졌던 아동 학대 사망 사건들이다. 우리 사회는 겉으로 가족 중심적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억압과 폭력이 알게 모르게 지배하는 위선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는 “폭력은 강자가 약자를 대상으로 취하는 방식”이라며 “아이들은 저항도, 표현도 못하니 폭력이 은폐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시회의 출발점은 ‘과연 이런 가정에서 아이들이 인격을 배울 수 있겠는가’에 있다. 인격은 아주 긴밀한 인간관계를 통해 생기는데 지금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이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평가다. “밤새 공부하고 집에 들어오는데 과연 가족끼리 얘기할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현대사회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꿈과 기대를 대리 만족시키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이런 전시회를 마련하게 된 것은 대학 미술관은 다른 미술관과는 달라야 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는 스위스 서양화가 파울 클레의 말처럼, ‘지식인의 임무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는 프랑스 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의 명언처럼 심 관장에게 대학 미술관은 우리 사회가 겪는 문제를 끊임없이 추적하고 해석하며 반추하는 어젠다를 가져야 하는 존재다.
그는 전시회를 통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내 주장을 강하게 하는 것은 예술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나 선동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예술이란 그냥 문제를 있는 그대로 멈춰 서서 마주 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지적했다. 심 관장은 “강하게 얘기하지 않고 약하게 얘기하는 것이 예술의 힘이고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라며 “옳고 그름을 다투지 않고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의 삶과 세상을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예술”이라고 설명했다. 예술은 다양성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의미다.
다음 전시회에서는 인공지능(AI)을 다루려고 한다. 제목도 정해졌다. ‘튜링 테스트: AI의 사랑 고백.’ 기술 발전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류는 선택의 여지없는 격변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지만 과연 이러한 기술 발전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지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별로 없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다. 심 관장은 “2040년 AI가 인간을 초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만큼 인류는 격변의 시기를 경험할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미래가 장밋빛으로만 그려질지 다시 한번 고민하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