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방문한 첫 번째 한국인 화가 강진희(1851~1919)가 그린 최초의 현지 풍경화인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 원본이 처음으로 공개 전시됐다. 강남구 신사동 예화랑이 한미수교 140주년에 맞춰 기획해 오는 26일 개막하는 특별전 ‘연(緣):이어지다’를 통해서다. 국권 자주를 지키고자 한 조선의 노력과 한미동맹, 실리외교 등 그림에 담긴 역사적 의미가 지금의 외교정세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청나라도 막지 못한 한미동맹
1882년 5월 22일. 조선은 서양국가 중 처음으로 미국과 국교를 맺었다. 하지만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심해져 교류는 어려웠다. 고심하던 고종은 1887년 11월 전권대신(외교관) 박정양에게 미국에 조선공사관을 설치하라는 임무를 맡겨 미국으로 보낸다. 제물포에서 출발한 10명의 초대 공사관원 일행은 1888년 1월 1일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했고, 일주일 후 워싱턴DC에 닿았다. 역관 출신 강진희는 박정양이 신임하는 핵심 수행원이자, 유일한 화가였다. 박정양이 당시 활동을 기록한 ‘미행일기’(美行日記)의 내용에 따르면 당시 주미 공사관원의 역할 중 하나는 조선이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미국식 제도와 문물을 익히는 것이었다.
“바람쐬러 볼티모어에 갔다가 당일로 돌아왔다. (중략) 12시에 출발하는 기차가 제때 출발하지 못하고 대기하다가 4시에 볼티모어에 도착했다. 120리 연로의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단 기차가 너무 빨리 달려서 한쪽 눈을 돌리면 이미 지나가 버리고 잘 볼 수가 없었다.”(박정양의 ‘미행일기’ 중에서)
워싱턴을 중심으로 미술관과 식물원, 복지관 등지로 답사 다니던 이들이 볼티모어까지 다녀온 모양이다.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복원을 실무주도한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지원활용부장은 23일 예화랑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당시 주미 공사관원의 일행인 이상재의 ‘미국공사왕복수록’(등록문화재) 등을 조사하다가 철도 계약서 초안이 발견됐다”면서 “미국에 간 첫 번째 화가 강진희가 기차와 철도를 그린 것은 단순한 풍경화의 의미를 넘어 장차 근대국가 조선이 갖춰야 할 인프라로 여긴 것 같다는 추론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공사관원들의 대미외교활동은 순탄치않았다. 청나라는 조선이 미국과 직접 외교하는 것을 경계했다. 청은 ‘영약삼단’을 내걸어, 조선이 반드시 청나라 관계자와 협의·동석해 미국과 외교할 것을 강요했다. 박정양은 자주 국권을 중시했다. 그는 청나라와 상의 없이 백악관을 방문해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고종의 서신을 전달했다. 청나라는 이를 트집잡아 미국에 도착한 지 11개월 째인 박정양을 강제 소환한다. 전시장에 걸린 강진희의 ‘잔교송별도’(이화여대 박물관 소장)는 영약삼단을 깼다는 이유로 미국을 떠나는 배 위의 박정양을 향해 부둣가에서 손 흔드는 이하영·강진희를 보여준다.
한미외교의 증인 강진희
1888년에 그려진 ‘화차분별도’가 포함된 화첩은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다. 이구열(1932~2020) 등 연구자를 중심으로 그 존재가 알려져 있다가 1983년 5월의 한 일간지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간송미술관은 일 년에 두 번씩 소장품 전시를 열었음에도 이 작품을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다. 지난 2019년 대한제국공사관 개관 1주년 특별전 때도 원본이 아닌 영인본이 전시됐다. 전시장에 원본으로 나온 ‘화차분별도’는 화면 중앙부를 가르는 두 대의 기차를 비롯해 다리와 전신주·가로등이 늘어선 19세기 미국 모습을 보여준다. 그 옆에는 미국에 도착하자 촬영한 강진희의 초상사진 원본도 처음 발굴, 공개됐다. 갓 쓴 도포 차림의 어색한 자세지만 조선인의 당당함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당시 공사관원들은 단체사진과 다양한 개인 사진을 찍었지만 원본이 전하는 것은 유일해 사료적 가치가 높다.
강진희는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한 1910년 이후로 관직을 접고 화가의 일에 전념했고, 근대적 예술인 모임이자 교육기관인 서화협회(1918~1937)의 탄생에 기여했다. 한미동맹의 끈끈함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더듬어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6월18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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