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개고 안개가 걷히면 먼 산마루 위에 담담하고 갓맑은 하늘빛”
고려청자의 ‘비색(翡色)’은 비밀스럽다는 뜻의 숨길 비(秘) 자를 쓴 송나라 청자의 비색과 달리 물총새 비(翡) 자를 쓴다. 은은하면서도 맑은 비취색인데, 파랑도 초록도 아닌 오묘한 빛깔을 고려인들 스스로 ‘비색’이라 불렀다 한다. 절정기의 고려청자를 본 중국 사신 서긍은 1123년 고려를 다녀가며 쓴 ‘고려도경’에서 사자모양 향로가 보여주는 비색을 극찬했고, 남송의 태평노인은 고려 비색이 천하제일이라고 ‘수중금(袖中錦)’에 적었다. ‘갓맑은 하늘빛’이라 한 이는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학자 최순우였고, 미술사학자 고유섭은 고려청자를 “화려한 듯하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따뜻하고 고요한 맛이 있다”고 평했다.
고려청자의 비색미감을 가장 온전하게 느낄 수 있는 전용 전시장이 개관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상설전시관 3층 청자실 안에 ‘고려비색’ 방을 마련해 22일 언론에 공개했다. ‘루브르의 모나리자’처럼 박물관 상징 유물을 정립하고자 한 국립박물관의 브랜딩 전략 일환으로 지난해 11월 삼국시대 불상인 반가사유상 2점을 모신 ‘사유의 방’을 개관한 데 이은 두 번째 공간이다. 약 1년에 걸쳐 새 단장한 상설전시관 청자실에는 국보 12점과 보물 12점 등 총 250여 점의 고려 청자 유물이 전시됐다.
‘고려비색’ 공간은 여러 면에서 신드롬에 가까운 호응을 얻은 ‘사유의 방’과 비교된다. 사유의 방은 널찍하고 어둑한 공간에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두 점만을 놓고 명상적 분위기에 빠져들게 했다. 비움 속에 여운을 넣은 촛불같은 공간이었다면 ‘고려비색’ 방은 고려 특유의 세밀하고 화려한 문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기에 불꽃에 비유할 만하다.
우선 비색 청자 중에서도, 형태를 본 뜬 정교함과 조형성이 특히 뛰어난 상형청자만을 모았다. 만개한 연꽃 봉오리가 뚜껑을 떠받치는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는 흙을 빚고 구워 레이스처럼 정교한 투각 문양을 만들어낸 세밀함이 탄성을 자아내는 유물이다. 입 벌리고 앉은 사자 형상이 독특한 ‘청자 사자모양 향로’는 벌름거리는 사자의 코와 돌돌 말린 털 등 표현력이 기막히다. 이들을 포함한 국보 5점과 보물 3점 등 총 18점의 청자가 ‘고려비색’ 방을 차지했다. 오묘한 비색과 섬세한 조형성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명품 중의 명품만으로 꽉 찼다. 박물관 측도 “이처럼 수준 높은 상형청자 18점이 한자리에 모여 전시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라 할 정도다.
‘사유의 방’이 향으로 후각을 먼저 자극했다면 ‘고려비색’에서는 음악이 먼저 귀를 사로잡으며 잡념을 밀어낸다. 미디어 아티스트 다니엘 카펠리앙이 청자를 떠올리며 작곡한 음악 ‘블루 셀라돈(Blue Celadon)’이다.
청자를 먼저 만든 것은 중국이었으나, 그 아름다움의 절정을 꽃피운 것은 고려였다. 청자실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고려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다. 이애령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은 “고려가 10세기 무렵 당시 최첨단 제품인 자기 제작에 성공한 것은 생활 문화 전반의 질적 향상을 가져온 혁신적인 계기였다”면서 “고려인은 불과 150여 년 만에 자기 제작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고려청자의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완성했다”고 말했다. 청자실의 변신도 획기적이다. 청자 조각을 활용해 현대미술가들이 재해석하게 한 시도, 초기 가마터를 비롯해 중요 가마터에서 출토된 조각을 통해 자기 제작의 시작과 과정을 보여주는 시도 등이 인상적이다. 무료관람이며, 연말까지 매주 수요일 저녁에 큐레이터와의 대화가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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