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이후 유독 온화했던 날씨 덕에 에너지 대란을 모면해 온 유럽에 본격적인 겨울 한파가 몰아치면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난방 수요 증가로 가스 가격이 다시 뛸 조짐을 보이고 있는 데다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추위의 무기화’ 전략을 구가하는 러시아의 공세 탓에 유럽 각국에서 이미 포화 상태인 우크라이나 난민이 다시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에너지 위기와 난민 수용을 둘러싼 유럽 내부의 분열상도 뚜렷해지는 모양새다.
11일(현지 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최근 북극에서 찬 공기가 유입되면서 남부 유럽을 제외한 북·중부 유럽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유럽중기예보센터(ECMWF)는 향후 한 달 동안 북유럽 기온이 줄곧 -8~-3도에 머물며 -2~-1도 수준이던 30년 평년 기온을 밑돌 것이라고 예측했다. 제라글로벌마켓의 조너선 웨스트바이 LNG 부문 수석부회장은 “추위가 다가오고 있다”고 전했으며 독일 가스네트워크를 관리하는 클라우스 뮐러 연방네트워크청장은 TV 방송 인터뷰에서 “겨울이 길어질 수 있다는 점을 모두 명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겨울 추위에 이처럼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는 것은 지금까지 가까스로 피해 온 에너지 위기가 본격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11월의 온화한 기후는 러시아의 가스 공급 축소에도 유럽이 심각한 에너지난을 피할 수 있던 호재였다. 난방 수요가 적었던 데다 시민들이 에너지 절약에 적극 동참한 덕에 유럽 국가들은 역내 가스 저장고를 평균 94%까지 충전할 수 있었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비축한 가스로 당장 이번 추위는 넘길 수 있겠지만 한파 우려에 에너지 가격이 또다시 비싸질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12월 한파가 시작되자마자 유럽 가스 가격 벤치마크인 네덜란드 TTF 선물 가격은 ㎿h당 135~140유로를 기록하며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8월 25일의 최고가(311유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저장고 충전 소식에 안정세를 보였던 10월 31일 가격(84유로) 대비 60%나 오른 수준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달 보고서에서 유럽이 내년에 최대 300억㎥ 규모의 가스 공급 부족에 시달릴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프랑스·영국·핀란드 등 각국은 당장 앞으로 몇 주간 정전이 발생할 수 있다며 에너지 절약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 같은 위기감은 수개월째 공전 중인 유럽의 천연가스 가격 상한제 도입 논의에 또 하나의 암초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달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유럽의 가스 가격 안정을 위해 내년 1월부터 TTF 선물 가격이 1㎿h당 275유로를 넘고 글로벌 가격과의 격차가 58유로를 초과할 때 상한제를 발동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체코·폴란드·벨기에·스페인 등은 가격 안정 효과를 보려면 상한제 발동 기준을 1㎿h당 220유로로 낮추고 역외 시장 거래에도 상한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독일·네덜란드 등은 가스 가격이 오히려 뛸 수 있다며 상한제 도입 자체에 부정적이다. EU 에너지 장관들은 13일에도 논의를 이어갈 계획이지만 한파에 따른 에너지 공급 우려가 커진 상황에서 합의에 이를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추위로 인한 걱정거리는 에너지 분야뿐만이 아니다. 유럽 각국은 이미 포화 상태인 우크라이나 난민이 겨울철에 더 늘어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올 1~9월 유럽에 ‘일시 보호(최대 3년간 EU 역내에서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신청한 우크라이나 피란민은 440만 명에 달한다. 각지의 대피소가 가득 차 EU 본부가 위치한 벨기에 브뤼셀에 수천 명의 난민이 노숙하고 있다는 전언까지 나올 정도다. 문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전력 시설을 집중 공격하며 ‘추위 무기화’ 전략을 펴는 만큼 난민 유입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알베르토호스트 나이하르트 유럽정책센터 연구원은 “이미 유럽 많은 지역의 난민 수용 시스템은 비상 상황”이라며 “더 이상의 난민 증가는 당국에 큰 부담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EU가 신규 입국자에 대한 비상 계획을 수립하고 있지만 난민 문제를 둘러싼 유럽 국가들의 분열은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 우크라이나 난민뿐 아니라 엔데믹의 여파로 북아프리카·중동·아시아 등지의 난민 유입도 전년 동기 대비 54%나 늘어난 가운데 이탈리아·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 국가들은 난민이 처음 도착한 국가에서 망명을 신청 및 처리해야 한다는 ‘더블린 원칙’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