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시장이 거래총액 1조원을 가뿐히 넘긴 2022년이 ‘아트페어와 갤러리의 해’였다면 2023년은 ‘비엔날레와 미술관의 해’가 될 전망이다. 경기침체로 유동성이 줄어들면서 시장 위축은 불가피하다. 반면 한 번 맛본 예술 경험의 속성상 미술과 등 돌리고 살기는 어렵다. 안목을 충족시킬 새로운 예술을 찾아 대형 비엔날레와 귀한 미술관 전시를 찾는 발길은 더욱 분주해질 듯하다. 이에 부합하듯 에드워드 호퍼부터 김환기까지 명성 자자한 거장전과 다채로운 비엔날레가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올해 미술전시의 화려한 포문을 열 주인공은 ‘미술계의 악동’ 마우리치오 카텔란이다.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운석맞고 쓰러진 교황(2001)을 선보이는가 하면, 작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회고전(2011)이 열렸을 때 돌연 은퇴를 선언한 괴짜다. 황금으로 만든 변기 ‘아메리카’(2016)가 도난당하고, 바나나를 테이프로 벽에 붙여둔 작품 ‘코메디언’(2019)을 누군가가 먹어버리는 해프닝으로 더 유명해진 문제아이기도 하다. 삼성문화재단의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은 31일부터 카텔란의 국내 첫 개인전이자, 2011년 구겐하임 회고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4월에는 20세기 미국 사실주의 미술의 대가인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개막한다. 지난해 10월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시작한 호퍼 개인전의 연장선상에 놓인 전시다. 2019년부터 휘트니미술관과 이번 전시를 공동기획한 서울시립미술관은 호퍼의 ‘자화상’ 등 150여 점을 선보일 예정이다. ‘도시인의 고독’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호퍼의 국내 팬층이 두터워 4년 전 열린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 못지 않은 화제성이 예상된다.
경기도 용인의 호암미술관은 1년 여의 리노베이션을 끝내고 4월 김환기 회고전으로 재개관 한다. 작가의 40년 예술 여정을 되짚으며 90여 점을 선보일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이건희컬렉션으로 기증된 ‘여인들과 항아리’, 리움 소장품 ‘영원의 노래’를 비롯해 한국 미술품 거래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운 ‘우주’ 등 김환기의 명작을 한 자리에 모두 선보일 예정이다.
‘단색화’에 쏠린 관심을 이어갈 한국미술의 거장급 작가군으로 기대를 모아온 ‘한국의 1960~70년대 실험미술’ 전시가 5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막 올린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과 순회전으로 기획돼 이미 지난해 열렸어야 할 전시지만 여러 사정으로 지연됐고, 7월까지 서울에서 열린 후 9월에 뉴욕으로 옮겨간다. 이승택·김구림·정강자·이건용·이강소·성능경 등 실험미술 대표작가들의 100여점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과천관에서는 5월 동산방화랑 창립자이자 전통 표구의 대가인 동산 박주환(1929∼2020)의 기증작 200여점 중 대표작을 선정해 ‘동산 박주환컬렉션 특별전’이 열린다. 11월에는 유영국·한묵·이승조로부터 시작해 홍승혜·강서경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전이 예정돼 있다.
집중도 높은 개인전도 풍성하다. 이중섭·박수근과 함께 한국적 정서를 품은 3대 국민화가로 꼽히는 장욱진의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6월에 개막한다. 실험미술가 김구림의 개인전은 서울관에서 8월에 열린다. 리움미술관은 7월에 김범, 9월에 강서경의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아시아 최고의 비엔날레로 자리잡은 제14회 광주비엔날레가 4월 7일부터 94일간의 대장정에 돌입한다.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의 수석큐레이터 이숙경 예술감독이 진두지휘 하는 올해 전시의 주제는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전 지구적 위기 앞에 예술이 이 어떤 타협과 화합의 계기를 만들지 30개국 80여 팀 작가들과 머리를 맞댄다.
공예의 가치에 집중한 청주공예비엔날레가 9월1일부터 45일간 충북 청주시 문화제조창 일원에서 열린다. 강재영 예술감독이 ‘사물의 지도-공예, 세상을 잇고 만들고 사랑하라’는 주제로 20여개국 80여 작가가 참여하는 본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생명과 디지털, 업사이클 등 동시대 화두를 생활밀착형 예술인 공예로 풀어낼 전망이다.
9월에는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과 서울역사박물관 등지에서 열린다. 그간 보통 9월 첫주에 비엔날레를 개막했으나, 올해는 그 기간을 아트페어인 키아프(kiaf)와 프리즈(Frieze)의 공공프로그램 운영에 내어주고 21일부터 본격적인 비엔날레로 관람객을 만난다. 네덜란드 출신 큐레이터 레이철 레이크스가 예술감독을 맡아 세계적 작가들의 작업이 서울의 도시·지리적 특성과 교차하는 방식을 새롭게 보여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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