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50주년을 맞습니다. 50년 전인 1973년은 1인당 국민소득이 300달러 수준이라 ‘식사 하셨습니까’가 안부 인사였을 정도인데 밥 굶는 사람이 있던 그런 시절에 문화를 진흥하겠다고 관련 법을 제정하고 문화예술진흥기금을 만든 선각자적 사고가 밑바탕 됐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문화강국에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문예진흥기금이 1000억 원 수준으로 ‘고갈 위기’라는 걱정을 듣고 있는데 이를 1조 원 수준으로 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은 이달 2일 서울 종로구 동성동 예술가의 집 내 집무실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윤석열 대통령도 늘 강조하듯이 문화 산업의 수출 규모가 점점 덩치를 키우고 있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기반이 순수예술”이라며 “순수예술의 지속 가능성을 지원하기 위해 과거 복권기금처럼 문예진흥기금 마련 법제화로 공공 재원 확보가 필요하다며 기부금 등 민간 재원뿐 아니라 기금 조성이 사업 목적인 뉴서울골프장 운영 수익 확대 등 여러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5선 의원 출신으로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현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10년 이상 활동해왔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까지 지내 ‘역대 최강’ 위원장으로 선출된 그는 지난 경험을 모두 끌어모아 50주년을 맞은 예술위의 새로운 100년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대담=박태준 문화부장 june@sedaily.com
문예위는 1973년 문체부 산하 특수법인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으로 출범했다. 2005년 지금의 위원회 체제로 전환됐고 2007년 기금관리형 준정부기관으로 지정됐다.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중추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편향을 이유로 특정 예술인에 대한 지원을 배제하는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에 휘말렸다. 이로 인해 위상이 흔들릴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 때 ‘치유와 회복’에 대한 기대가 높았지만 문화계 전반이 만족할 만한 성과를 보여줬다고 평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1월에 8기 위원회가 출범했고 정병국 위원장이 조타수를 맡았다. 취임 50일을 갓 넘긴 그는 “정치인이 문예위원이 된 것도, 위원장에 오른 것도 처음”이라며 “문예위는 그간 피감기관 혹은 산하기관으로 접해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인 출신인 내가 정치적 바람막이 역할을 하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비(非)문화계 출신이지만 준(準)문화인인 그는 베테랑답게 빠른 속도로 업무를 파악했다. 정 위원장은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 선진국이 됐지만 선진국은 경제적 부흥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라며 “산업화·민주화와 함께 문화까지 융성해야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는데 그 근간이 바로 순수예술”이라고 현안을 진단했다.
“문예위의 올해 연간 사업비 예산이 3846억 원입니다. 그 중 예술향유기회 확대 사업의 예산이 2708억 원으로 전체의 70.4%를 차지합니다. 문화 향유를 목적으로 한 바우처 형식의 ‘문화누리카드’ 같은 통합문화이용권 사업이 54.6%로 절반을 넘습니다. 정작 예술 창작을 직접 지원하는 예술창작역량강화 사업비는 1034억 원으로 27%가 채 되지 않습니다.”
정 위원장은 운영 구조의 초기 설계부터 잘못됐다고 짚었다. 예술인복지재단의 통계에 따르면 재단에 등록된 예술인 수는 15만 명 정도다. 미술을 예로 들면, 약 3만 3000명의 예술인이 등록돼 있는데 이들 중 창작 지원 혜택을 누리는 경우는 연간 3300명가량에 불과하다. “문예위의 지원 사업에 응모하더라도 뽑히는 비율은 10%밖에 되지 않는 실정”이라며 “문화 복지에 해당하는 ‘향유’ 쪽으로 예산 편성의 무게중심이 기울어진 데도 어떻게 보면 정치권 포퓰리즘의 영향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한 정 위원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풀어야 할 과제가 ‘돈’ 문제라고 하면 자본주의 논리로 예술인을 조종하려 드느냐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예술 활동을 지속하게 하려면 돈이, 즉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면서 “개관 50주년인 올해 앞으로 50년의 역사, 100년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경영 전략 개선을 목표로 소위원회를 구성해 시스템적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 위원장은 우선 지난달 문예위 전체회의에서 경영전략개선소위원회와 예술후원활성화소위원회를 상설 운영하기로 의결했다. 문화 산업 융성에는 순수예술 기반 강화가 전제조건이라는 점을 대국민 캠페인으로 적극 홍보하고 이를 통해 문예위 기부 회원인 ‘예술나무’ 후원자를 늘리겠다는 것이 목표다. 수년간 캠페인을 벌였지만 정기 기부자인 예술나무 후원인은 4500여 명에 불과하다. 이에 정 위원장은 예술나무 후원 회원이 어떤 인센티브를 받고 어떻게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으며, 지원이 어떻게 예술 창작으로 이어지는지를 제대로 알려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뉴서울골프장도 연간 수익의 일부를 문예위에 전입시키는 구조인데 골프장 수익 확대를 추구하며 운영개선 태스크포스(TF)를 가동하기로 의결하는 등 자체 수입 증대도 모색하고 있다.
“기관이 자율적으로 사업을 전개하려면 문예진흥기금 재원의 안정성이 확보돼야 합니다. 그래야 사업비를 효율적으로 집행할 수 있고, 예술 현장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며, 예술생태계가 지속 가능하게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재원 안정성이 사업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게 기관장으로서 제 역할의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하며 우선 올해는 기금을 1200억 원까지 늘리고 1조 원 확보 목표는 윤 대통령 재임 중에 달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술위 설립 50주년인 올해를 정부는 ‘K아트 도약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선포했다. 이에 발맞춰 정 위원장은 “통상적인 백서를 만들기보다 지난 50년간 지원해 생산된 창작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아카이빙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예술위가 예술인 혹은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각각 진행하던 사업별 플랫폼 19개를 하나의 통합 플랫폼으로 만드는 것도 이의 일환이다. 강력한 플랫폼은 창작물을 소개하는 마케터 역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 버전을 함께 제작해 해외에서도 접근, 활용이 가능하게 할 계획이다. 정 위원장은 “K아트가 세계로 나가는 아웃바운드뿐 아니라 인바운드도 겨냥하는 기반을 조성할 것”이라며 “해외 예술계에서 ‘한국에는 요즘 이런 작품, 이런 예술가가 있다는데 뭐가 있나’를 통합 플랫폼으로 찾아보고 협업 요청이나 초청까지 가능한 창구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 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