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선 매력적인 연기를 해야 한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캐릭터가 존재감이 생기려면 궁금해지는 연기가 필요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의 배우 정성일은 매력적인 캐릭터로 확실하게 존재감을 증명했다.
‘더 글로리’(극본 김은숙/연출 안길호)는 화제의 중심에 선 작품이다. 유년 시절 당한 학교 폭력(학폭)으로 인해 인생이 부서진 문동은(송혜교)이 자신의 인생을 걸고 가해자들에게 처절한 복수를 하는 이야기로, 사회적 경종을 울리고 있다.
정성일이 연기한 하도영은 극의 입체감을 더하는 역할이다. 학폭 가해자 박연진의 남편인 그는 박연진과는 전혀 다른 결의 사람이다. 냉철하며 말수가 적고, 선을 지킨다. 반면 아내와 딸에게는 따뜻한 가장의 모습이다. 김은숙 작가는 이런 하도영을 ‘나이스한 X새끼’라고 표현했다.
김 작가가 정확한 설명을 해준 건 아니었다. 정성일은 그렇게 하도영의 양면성을 찾아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던 와중에 대본에서 해답을 찾았다. 비 오는 날 운전기사가 하도영에게 차에서 와인을 꺼내는 동안 잠시 우산을 들어달라고 하는 신에서다.
“명확하게 양면성을 찾을 수 있는 신이에요. 짧은 신에서 입장 차가 나오는데, 하도영은 기사를 나쁘게 대하는 게 아니거든요. 물론 기사가 하도영에게 우산을 들게 하는 것이 기분 나쁘기도 했지만 해고할 정도는 아니었던 거죠. 어떤 한 사람을 고용하고 쉽게 자를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사람을 많이 바꾸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어요.”
딸 예솔(오지율)에 대한 절절한 부성애는 하도영의 매력 포인트다. 하도영은 예솔이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음에도 끝까지 지키려 한다. 정성일은 이런 설정이 경험해 본 일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가늠할 수 없는 마음이었지만, 실제로 아들을 키우는 아빠의 입장에서 공감이 됐다.
“키우는 정이 무섭다는 걸 알다 보니 이해가 됐어요. 키우면 정말 예뻐요. 힘들어도 아이만 보면 다 풀리거든요. 어떻게 보면 예솔은 하도영이란 인물이 모든 걸 다 걷어내고 직접적으로 대할 수 있는 가장 편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점잖은 하도영이 무게감 없는 박연진과 결혼한 건 의아한 부분이다.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어울리는 부부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캐릭터 구축이 필요했다.
“하도영은 여자를 많이 만나면서 살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일, 운동, 바둑 이렇게 자기만의 루틴 안에서 살았다는 전제하에, 선이라는 걸 보다가 결혼도 계획 중 하나였던 거 같아요. 지루한 흐름에서 박연진이라는 여자를 만났는데 가장 적게 입었는데 천박해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이 여자랑 살면 심심하진 않겠다 싶었던 거죠. 하도영에게 자극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문동은에 대한 감정도 알쏭달쏭하다. 하도영은 기원에서 바둑을 두는 문동은을 만난 이후로 관심이 쏠린다. 좀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하도영이기에 사랑의 감정을 느낀 것인지, 단지 바둑 때문에 호기심이 생긴 것인지 쉽게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하도영이 박연진의 과거 행태를 알고 나서도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 문동은을 볼 수 있어서라는 추측도 나왔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옛날에 들은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엄마가 죽어서 장례식을 치르는데 너무 멋진 남자가 온 거예요. 그 남자를 보기 위해 언니를 죽였다는 사이코패스 이야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하도영이 박연진을 이용하는 거겠죠. 그렇다면 박연진에게 미안한 마음이 이만큼이라도 있다면 이혼하든 어떤 선택을 할 때 사랑이라고 말은 못 하겠죠. 그렇지만 정성일이라는 사람이 하도영에게 접근할 때 문동은에 대한 호기심, 숨 막히는 분위기 같은 건 제 기준에서 사랑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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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영은 결국 딸을 지키기 위해 예솔의 친부 전재준(박성훈)을 죽인다. 그는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공사장 옥상에서 전재준을 떨어뜨리고, 문동은과의 추억이 있는 삼각김밥을 먹는다. 시청자들은 하도영이 왜 삼각김밥을 먹는 것인지 숨은 의미에 관심이 집중됐다.
“제일 어려운 신이었어요. ‘왜 여기서 삼각김밥을 먹고 있지? 전재준을 제거하고 난 다음에 먹는, 아니면 죽이기 전에 먹는 건가? 문동은만을 생각해서 먹는 건가? 지금의 내 현실을 인지한 건가?’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해봤어요. 결국 내가 뭘 표현을 하려고 삼각김밥을 먹는 건지 생각한 것 중에 선택한 것은 어쩔 수 없이 문동은이었고요. 내가 먹지 않겠다고 했던 삼각김밥을 지금 먹는 건 이 사람을 이해한 걸까 싶더라고요.”
하도영과 문동은이 기원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은 명장면으로 꼽힌다.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못하다는 정성일도 “내가 봐도 그 장면은 멋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송혜교 덕분에 두 캐릭터의 케미가 있었다고 치켜세웠다.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어디 가서 송혜교를 보겠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좀 편했어요. 놀란 것도 있었고요. 제가 생각한 이상의 것을 보여주니까 덩달아 같이 할 수 있었어요. 진짜 멋있어요.”(웃음)
스포트라이트 이면에 고민도 있다. 배우로서 차가운 이미지로 굳혀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산후조리원’ ‘우리들의 블루스’ 등 유독 드라마에서 냉정한 남편 역할을 많이 맡아 ‘더 글로리’도 선뜻 나설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이면 그 안에서 변화를 줘서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며 도전의 이유를 밝혔다.
매체 외에서 정성일의 모습은 다르다. ‘대학로 프린스’라는 별명이 있는 그는 오랫동안 연극 무대에 서며 유쾌한 면모를 보여줬다. 현재도 그는 연극 ‘뮤지컬 선데이’과 뮤지컬 ‘인터뷰’에 출연 중이다.
“실제로 저는 하도영처럼 무겁고 어두운 편이에요.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어서 유쾌하고 활발하게 바꾸려고 하다 보니까 두 가지 모습이 있는 거죠. 밖에서 사람들과 일할 때는 즐겁게 일하고 싶고 혼자 있거나 내 시간을 가질 때는 하도영 같은 면이 있어요.”
“코미디도 잘해요. 코미디야말로 정극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웃기려고 하고 재밌게 애드리브를 하려고 하면 관객들은 다 알아요. 진실되게 연기해야 상황이 웃겼을 때 코미디가 되는 거죠. 코미디를 하면서 연기를 정말 많이 배웠어요.”
하도영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정성일이라는 매력적인 배우의 모습이 알려진 때다. 일은 더 많아졌고, 선택지도 다양해졌다. 그럼에도 무대에 서는 것도 게으르지 않게 하고 싶다. 그는 “무대가 좋아서 하는 건데 젊은 친구들이 많아져서 나와 나이 차이가 많더라. 우스갯소리로 ‘난 대학로 나가라는 거구나’ 한다”고 장난스레 말하면서도 “더 접할 기회가 생긴다면 더 하겠다”고 말했다.
“차기작은 정말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감사하게도 많이 찾아주시는데 사무실 식구들과 마음이 잘 맞아서 신중하게 천천히 좀 더 명확한 걸로 가자고 했어요. 하도영이라는 인물이 너무 명확하고 강하기 때문에 그 캐릭터를 넘고 싶다는 욕심은 없어요. 비슷하더라도 다른 색깔이 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접근을 해보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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