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가 6일 야당의 반대로 지명 45일 만에 낙마했다.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부결되기는 1988년 이후 35년 만이다. 법조계에서는 대법원장 공석 장기화로 재판 지연 등 사법행정 전반에 커다란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헌정 사상 두 번째로 사법부 수장 장기 공백 사태를 맞은 대법원에는 비상이 걸렸다.
이날 이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 표결 결과 반대 175표, 찬성 118표, 기권 2표로 부결됐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이 모두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풀이된다.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가결되려면 재적 의원 과반 출석에 출석 의원 과반 찬성이 있어야 한다. 전체 의석의 과반인 168석을 가진 민주당이 반대하면 임명동의안 통과는 불가능한 구조였다.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된 것은 노태우 정권이던 1988년 7월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자 이후 35년 만이다.
일찌감치 정치권에서는 이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이 부결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점쳐졌다. 야당이 처가 소유 비상장 주식 재산 신고 누락, 윤석열 대통령과의 친분 등을 이유로 부적격 의견을 냈고 민주당이 표결 직전 임명동의안 부결을 당론으로 채택하면서 부결이 확실시됐다. 표결을 하루 앞둔 5일 이 후보자는 입장문을 통해 “대법원장 직위의 공백을 메우고 사심 없이 국가와 사회, 그리고 법원을 위해 봉직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지만 분위기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평가다.
대법원은 지난달 24일 김명수 대법원장의 퇴임 이후 이 후보자의 임명동의안 표결이 지연되면서 권한대행 체제로 전환됐다. 대법원장이 공석이기는 1993년 9월 이후 30년 만이다. 당시 김덕주 대법원장이 부동산 투기 문제로 사퇴하면서 최재호 대법관 권한대행 체제로 운영됐지만 2주 만에 새로운 대법원장이 선임돼 최 전 권한대행 체제에서는 전원합의체 선고 등 별다른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새로운 대법원장이 취임할 때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새로운 후보자를 지명해야 하고 국회 인사청문특별위원회 구성부터 대법원장 인선에 관한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거쳐야 한다. 10일부터 시작되는 국정감사 등의 일정을 고려하면 새로운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까지 적어도 2개월가량의 공백이 예상된다. 대법원 입장에서는 모든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하는 초유의 상황에 놓인 셈이다.
당장 전원합의체 선고는 당분간 나오기 어렵게 됐다. 전원합의체는 판례 변경을 결정하는 중요한 재판으로 대법원장이 재판장을 맡아 진행한다. 올 8월 10일 기준 전원합의체에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 교원 소청 심사 취소소송 등 총 5건이 상정돼 있다. 전원합의체는 대법원장을 포함한 13명(법원행정처장 제외)의 대법관 중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면 의결이 가능하다. 다만 대법원은 지난달 25일 긴급대법관회의를 열고 권한대행의 권한 행사 범위 등에 대해 논의한 결과 전원합의체 선고를 내리지 않기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권한대행을 재판장으로 전원합의체를 개최할 수도 있지만 자칫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논란이 큰 사건일 경우 대법원장 권한대행인 안철상 대법관이 그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는 점은 부담이다. 또 대법원장이 공석인 상황에서 나온 전원합의체 결과에 사건 당사자들이 불만을 제기하는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지난해 김재형 전 대법관 퇴임 이후 후임자인 오석준 대법관 임명동의안이 장기간 표류하면서 3개월가량 전원합의체가 열리지 않았던 것 역시 이런 이유에서다. 권한대행 업무가 많아질수록 안 대법관이 속한 대법원 3부 심리는 차질이 불가피하다.
대법원장 부재는 대법관을 비롯한 법원 인사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대법원장은 법원조직법에 따라 대법관 임명 제청권과 법관 3000여 명, 법원 직원 1만 5000여 명에 대한 임명권을 행사한다. 대법관 임명 제청권과 헌법재판관·국가인권위원 지명권도 행사한다. 당장 내년 1월 1일 임기 만료로 안 대법관과 민유숙 대법관이 퇴임을 앞두고 있다. 대법관 후보자 임명 제청권은 대법원장의 몫이다. 통상 2개월 전에는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를 구성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법관 인선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법원장 권한대행이 대법관을 임명 제청한 전례는 없다.
11월 10일 임기가 만료되는 유남석 헌법재판소장 후임자 임명 과정도 순탄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소장 공백을 막기 위해서는 늦어도 이달 초 안으로 후보자가 지명돼야 하는 상황이다. 헌법재판소장 역시 지명권은 윤 대통령이 행사하지만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임명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최고 사법기관인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이 동시에 공석인 초유의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임명동의안 부결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은 대법원은 공식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원장 공석 사태 장기화로 사법부 전반에 적지 않은 장애가 발생할 것”이라며 “대법관회의를 통해 권한대행 체제 운영 방안을 논의할 수밖에 없는 충격적인 상황”이라고 전했다. 수도권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상고심을 비롯한 재판 지연은 불가피하게 됐다”며 “사법부 수장 공백에 따른 피해는 결국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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