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며 많은 직장인들이 재택근무가 대세를 이룰 것이라는 믿음을 키워갔다. ‘완전 재택’까지는 아니더라도 출근은 일주일에 이틀 정도만 하며 출퇴근에 소모되는 체력과 시간을 아끼는 동시에 불필요한 사무실 잡무 등에서 해방되는 날을 소망한 것이다. 하지만 직장인들이 꿈꿨던 미래는 요즘 조금씩 뒤틀리는 중이다. 글로벌 굴지의 기업들이 재택근무보다 출근을 선호하는 모습이 뚜렷해지면서다. 단순히 ‘선호’ 정도에 그치지 않고 출근하지 않으면 고과에 불이익을 준다거나 성과금을 깎는 등의 강경한 대응도 나오고 있다. 우리들의 꿈이었던 ‘재택근무의 시대’는 이렇게 끝나고 마는 걸까.
글로벌 대기업들의 변심 “모두 출근하라”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미·유럽 대형은행들은 요즘 사무실을 떠났던 직원들의 복귀를 강력히 촉구하는 중이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는 최근 직원들에게 ‘교육용 서한’을 보내 회사 지침에 따라 출근하지 않는다면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앞서 출근을 독려하는 문자 통보를 여러 번 했지만 직원들이 따르지 않자 규제의 강도를 한 단계 높인 것이다. 한 직원이 회사 온라인 게시판에 공개한 서한은 이렇게 적혀 있다. “수신자는 회사의 요청에도 근무 위치에 대한 ‘직장 우수성 지침’을 충족하지 못했다. 이 통지를 받은 날로부터 2주 이내 업무 환경의 우수성 기대치를 따르지 않는다면 추가 징계 조치가 취해질 수 있다.”
독일 기반의 세계적인 투자은행 도이체방크는 최근 금요일과 주말 이후 월요일에는 재택근무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 6월부터 임원은 주 4일 이상, 직원들은 주 3일 이상 출근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재택근무와 출근을 혼합하는 일명 ‘하이브리드 근무제’에서 금요일과 주말 다음 월요일은 직원들이 가장 재택근무를 선호하는 요일이다. 도이체방크의 조치는 금~월요일 사무실이 텅 비었다가 화~목요일에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차는 ‘사무실 비효율’을 해소하려는 목적이라는 분석이다. 실제 크리스티안 제빙 최고경영자(CEO)는 “우리 존재를 일주일에 골고루 분산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호주에서도 대기업을 중심으로 ‘출근이 곧 성과’로 평가되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에 따르면 호주 4대 은행 중 하나인 호주-뉴질랜드은행(ANZ)는 지난해 11월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출근 시간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면 상여금이 줄어들 수 있다”고 통보했다. 대형 보험사인 선코프와 전력기업 오리진에너지도 출근 빈도와 보너스 금액을 연계해 직원들의 사무실 출근을 독려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글로벌 회계·컨설팅법인 어니스트앤영(EY)은 최근 런던 오피스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사무실 출퇴근을 모니터링해 구설수에 올랐다. 일부 직원들의 사무실 출근이 생각보다 저조하자 회사 고위층들이 출퇴근 카드에 찍힌 데이터를 직접 보며 직원들이 제대로 출근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씨티그룹도 지난해 여름부터 직원들의 사무실 입출입 기록을 추적하고 주 3일 이상은 사무실에 출근할 것을 강조했다.
출근이 싫은 직장인들…주 2~3일도 많다
글로벌 기업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재택근무에 대한 직원과 기업 경영진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재택근무를 선호하지만 경영진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은행 등 금융기관은 직원들의 사무실 출근을 가장 강력하게 요구하는 업계 중 하나로 재택근무를 선호하는 직원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일례로 미국 은행업계는 팬데믹이 끝날 기미를 보인 직후부터 직원들의 출근을 독려한 반면 직원들은 가능한 출근하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다. 골드만삭스의 경우 2021년부터 직원들의 사무실 복귀를 촉구하고 최근에는 재택근무자에 야근 식사비를 주지 않는 등의 강경책을 써가며 월~목요일 출근율을 끌어 올렸지만 여전히 금요일 출근자는 팬데믹 이전보다 낮다고 한다. 실제 컨설팅 업체 스쿠프(Scoop)에 따르면 2023년 말에도 미국 대형 금융회사의 82%는 대다수가 주 5일 중 2~3일만 출근하고 나머지는 재택근무를 해도 되게끔 하는 ‘하이브리드 근무 계약’을 맺고 있다.
경영진을 변심하게 만든 더 큰 이유는 주 2~3일 출근조차 잘 지켜지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EY가 사무실 출퇴근을 모니터링하기 시작한 것은 팀의 최소 50%가 주 2일 이상 사무실에 출근해야 한다는 정책조차 따르지 않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호주의 한 직장인은 지난해 11월 “100% 재택근무를 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거부당했다”는 이유로 노사중재기관인 공정근로위원회(FWC)에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다. FWC가 “최소 40%의 출근을 요구한 것은 합리적”이라며 일단 기업의 손을 들어줬지만 이런 갈등은 얼마든지 또 불거질 수 있다. 많은 근로자들이 이미 재택근무의 장점을 잘 알게 됐고, 재택근무를 더 선호하게 됐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독일 Ifo경제연구소가 34개국 4만 명의 풀타임 근로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호주 근로자들은 주당 평균 1.3일 재택근무를 해서 캐나다와 영국에 이어 4번째로 높은 빈도지만 이들이 희망하는 재택근무 일수는 주당 평균 2.2일이라고 한다. 딜로이트의 조사도 미국 금융기관에 일하는 직원의 25%가 일주일에 1~2일 정도만 사무실에서 일하기를 바란다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재택근무 둘러싼 ‘밀당’…승자는 누가 될까
사실 재택근무는 장점과 단점이 뚜렷한 근무형태다. ‘악덕 고용주’와 ‘가련한 직장인’의 대립으로 볼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혹은 코로나19를 거치며 직장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사람들과 ‘이전으로 되돌아갈 것’을 바라는 사람들 간의 ‘문화 충돌’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이견을 단숨에 좁히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근로자 입장을 우선 보자. 미국 전미경제연구소(NBER)이 실시한 대규모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원들은 일주일에 2~3일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을 8%의 임금 인상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한다. 출퇴근 고통이 줄고 스트레스가 감소하며 개인, 여가, 가족과의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어서다. 지난해 7월 발표된 연구에서는 미국 재택근무자들이 출퇴근을 하지 않아 절약한 시간을 모아 일주일에 40분을 더 육아에 투자했다고 한다. 실제 미국에서는 재택근무 확산 후 출산율이 반등했다는데, 저출생이 심각한 우리나라도 재택근무 확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면 많은 경영진들은 직원들이 사무실에 출근해 대면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편이 생산성을 높이고 좋은 팀 문화를 만드는데 효과적이라고 본다. FT의 칼럼니스트인 카밀라 카벤디시도 최근 기고에서 “경력이 높은 부모 세대 사무직 근로자들에게 재택근무로 대표되는 근무 유연성은 큰 혜택이 될 수 있겠지만 막 업무를 시작한 청년들에게는 이점이 명확하지 않다”고 썼다. “사무실에서는 업무에 대한 피드백과 조언, 멘토링을 쉽게 받을 수 있지만 온라인에서는 어렵다. 사무실 환경에서 풀타임으로 일해본 적 없는 20~30대가 많다는 점은 앞으로 걱정되는 지점”이라는 이유에서다.
결국 재택근무를 둘러싼 직원과 경영진의 ‘밀당’은 채용을 결정하는 ‘권력의 추’가 어느 쪽으로 향하느냐에 달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팬데믹 기간 동안 미국 재택근무자가 그토록 빠르게 확산할 수 있었던 것은 인력 부족 탓에 노동자 우위의 고용 시장이 형성된 덕이 크다. 모든 기업이 탐내는 인재라면 지금도 주5일 재택근무가 가능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반대로 미국발 금리 인상으로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깊어진 현재 무게추는 기업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구조조정과 대량 해고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기업들이 해고 사유 중 하나로 재택근무를 거론하고 있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헤드헌팅업체 DHR글로벌의 진 브랜토버 금융부문 책임자는 FT와의 인터뷰에서 “금리 인상과 거래 둔화로 은행 수익이 악화하고 해고가 이어지면서 사무실 출석에 대한 평가는 더 엄격해졌다”며 “은행들은 1년 전만큼 인재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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