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중(對中) 고율 관세 부과로 세계경제와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4일(현지 시간) 무역법 301조에 의거해 중국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최소 2~4배 올리겠다는 방안을 공식화했다. 대상 품목은 전기차·배터리·반도체·태양광·철강 등으로 수입 규모만 180억 달러(약 24조 5538억 원)에 달한다.
미국의 대중 관세 인상으로 한국 수출은 일시적으로 이득을 볼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오히려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중 중간재 수출 감소부터 중국산 저가 제품 범람 등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다. 이번 조치에 따라 관세가 높아진 주요 5개 업종에 미치는 영향을 진단했다.
미국이 중국산 철강에 대한 관세장벽을 높이면서 오히려 판로를 잃은 값싼 중국산 철강이 한국 시장으로 몰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최근 중국은 자국 내에서 소화하지 못한 철강 재고를 저가로 수출하고 있는데 올해는 그 물량만 1억 톤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의 밀어내기식 수출을 막기 위해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14일(현지 시간) 중국산 철강에 대한 관세를 기존 7.5%에서 25%로 3배 이상 높였다.
언뜻 보면 이번 조치로 한국 철강 업계는 중국산 철강을 대체하며 혜택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은 2018년부터 대미 철강 수출에 쿼터(공급 물량 제한)를 적용받고 있어 반사이익을 누리기 어려운 구조다. 현재 한국의 대미 철강 수출 물량은 연 263만 톤으로 묶여 있다.
박성봉 하나증권 연구원은 “이미 할당받은 쿼터를 꽉 채워서 수출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국내 철강 업계에서 쿼터 관련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에서 부정적인 입장이라 대미 수출 확대는 제한적”이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이번 조치로 미국 시장을 잃은 중국이 한국으로 밀어내기 수출을 확대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국철강협회 관계자는 “안 그래도 중국의 저가 공세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미국이 관세장벽을 높이면서 국내 철강 업계가 받을 타격이 더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중국 철강 업계는 대부분 자국 내에서 물량을 소화했지만 최근 부동산 위기로 건설 수요가 위축되면서 수출을 늘리고 있다. 세계철강협회에 따르면 중국의 철강 수출 물량은 2020년 5372만 톤에서 지난해 9120만 톤으로 70%가량 증가했다. 올해 1분기에도 약 2600만 톤을 수출하며 올해만 연간 1억 톤 이상의 중국산 철강이 전 세계에서 쏟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 기간 한국으로 유입된 중국산 철강도 크게 늘었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중국산 철강재 수입 물량은 지난해 873만 톤으로 전년(675만 톤) 대비 29.3% 증가했다. 올해 1분기에도 228만 톤이 들어와 전체 수입량의 57%를 차지했다.
문제는 중국산 철강이 국내 시중 가격보다 낮은 수준으로 판매되다 보니 국내 업체들의 철강 판매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포스코와 현대제철(004020)은 중국산 철강의 저가 공세 영향으로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이 급감했다. 업계는 특히 미국을 시작으로 주요국들이 중국산 철강에 보호무역 조치를 시사하면서 국내에 미칠 반사작용을 우려하고 있다. 최근 칠레는 중국산 철강에 최대 33.5%에 달하는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했고 브라질·베트남·영국 등도 중국산 철강재 덤핑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에 국내 업체들도 정부에 반덤핑 조사를 요청하고 나섰다. 중국산 후판에 대해 반덤핑 제소를 하기로 가닥을 잡고 피해 상황을 집계하고 있다. 국내 후판 유통가는 톤당 약 100만 원대지만 중국산은 80만 원 후반대에서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철강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이 원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후려치면서 국내 가격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며 “미국의 관세 인상은 중국의 밀어내기 수출을 더욱 가속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레거시 반도체까지 '칩워'…반도체 장비 수출에도 악재
국내 반도체 업계가 중국산 구형(레거시) 반도체에 대한 미국의 관세 인상 조치에 대해 불확실성 가중 측면에서 예의 주시하고 있다. 중국에 생산기지를 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주요 반도체 기업들의 주력 생산 제품이 첨단 반도체인 만큼 직격타를 입지는 않겠지만 중국의 보복 대응이나 장비 수출 면에서 영향을 완전히 비켜날 수는 없어서다.
14일(현지 시간) 조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산 구형 반도체에 대한 관세율을 25%에서 50%까지 올린 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국내 반도체 업계는 이에 따른 현지 공급망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연원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팀장은 “중국이 저가 전략을 기반으로 범용 반도체 시장을 독점적으로 가져가려는 전략을 공격적으로 펼치고 있다”며 “일차적으로는 시장 성장을 가로막고 중국의 독점 전략에 제동을 걸려는 사전적 조치”라고 말했다.
중국을 주요 시장으로 둔 국내 반도체 장비 업체의 경우 일정 수준 타격이 불가피하다. 중국의 범용 반도체 제조 시장이 타격을 받게 되면 장비 수요가 줄어드는 연쇄 타격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반도체 장비 업체 관계자는 “미국의 레거시 반도체 규제는 관세로 시작해서 궁극적으로는 중국으로 향하는 장비와 기술 수출을 틀어막으려는 것으로 보인다”며 “중국을 시장으로 둔 기업들은 일정 부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칩 제조사로서는 생산 품목이 중국 기업들과 크게 겹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보복 대응과 이로 인한 미중 갈등 증폭이 불러올 추가 피해가 우려 지점이다. 일례로 지난해 중국이 미국 무역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의 핵심 원료 중 하나인 갈륨 수출을 통제하며 국내 업체들에도 불똥이 튀었다.
미국의 제재 그물이 촘촘해질수록 간접적인 피해도 늘어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가 시작된 후 중국 공장의 노후 반도체 장비를 팔지 않고 있다. 해당 장비들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 미 정부 규제망에 걸릴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로 인한 양 사의 피해 규모가 수천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다만 8인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등 일부 사업에서는 국내 업체들이 반사이익을 볼 수 있는 기회라는 분석도 나온다. 현재 국내에서는 DB하이텍과 SK하이닉스의 자회사인 SK하이닉스시스템IC, 키파운드리 등이 해당 사업을 영위하고 있지만 중국 업체들의 저가 정책으로 매출과 수익성이 동반 하락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연 팀장은 “구형 파운드리 업계에서는 가격으로 경쟁이 불가능할 정도로 시장을 교란하는 중국 업체들에 대한 우려가 컸던 상황이라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저가 中 전기차, 美 진출 봉쇄 효과…"미래 불확실성 제거 호재"
국내 완성차 및 배터리 업계는 미국 정부의 관세 인상 조치에 대해 미래 불안 요소가 제거됐다는 측면에서 호재라는 반응이다. 저가의 중국산 제품이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인 미국 본토로 밀려 들어오는 최악의 상황을 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터리 부품과 소재 업체들의 경우 여전히 중국 생산 의존도가 높아 불확실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내 완성차 업체는 이번 관세 인상 조치로 반사이익이 기대된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14일(현지 시간) 현행 25%인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관세율을 100%까지 올리기로 했다. 이번 관세 인상 조치가 현대차그룹의 올해 미국 판매 실적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낮다. 현재 미국에서 판매되는 중국산 전기차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계열을 길게 놓고 보면 호재다. 값싼 전기차로 글로벌 전기차 시장을 교란해온 중국 전기차 업체들의 덤핑 판매 전략이 미국에서는 통하기 힘들어진 까닭이다. 이번 관세 인상 조치는 사실상 중국산 전기차의 미국 시장 진입을 봉쇄하는 효과가 있다. 현대차그룹이 적어도 미국 시장에서는 저가의 중국산 전기차와의 경쟁을 피하면서 시장점유율을 안정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셈이다.
임은영 삼성증권 연구원은 “단기로는 미국에 판매 중인 중국 전기차가 없어 효과는 미미할 수 있다”면서 “중장기적으로는 미국에 중국의 값싼 자동차가 앞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번 제재는 우리 기업에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 등 배터리 3사도 미국 정부의 조치를 호재로 판단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주로 현대차그룹과 미국·유럽 완성차 업체에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중국 전기차 회사에 판매하는 배터리 물량이 거의 없다. 미국 정부가 중국산 배터리에 대해 관세율을 25%로 올려도 영향이 미미하다는 얘기다.
오히려 이번 관세 인상으로 배터리 3사가 중저가 배터리 시장에 대응할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니켈·코발트·망간 등 삼원계 배터리가 주력인 국내 배터리사는 일러야 내년 말 LFP(리튬·인산·철) 배터리 양산이 가능하다”며 “이번 관세 인상 조치는 LFP 배터리가 주력인 중국 업체를 견제하는 효과가 있어 국내 업체들이 양산 시점까지 한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중국 생산 비중이 높은 배터리 부품 및 소재 업체들은 긴장하는 분위기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배터리 4대 소재(양극재·음극재·전해액·분리막)에 대한 중국의 생산 점유율은 2022년 기준 평균 71%로 집계됐다. 음극재의 경우 한국의 생산 비중은 6%에 불과하다. 중국이 미국의 관세 폭탄에 보복성 정책을 쏟아내면 공급망 불확실성이 커져 국내 배터리 소재사들의 피해가 커질 수 있는 지점이다.
소재에 들어가는 광물도 중국 의존도가 높다. 흑연은 2026년으로 관세 부과를 2년 유예했지만 그동안 대체재를 확보하지 못하면 타격은 불가피하다. 흑연은 중국이 전 세계 생산 점유율 78%를 차지하고 있다.
태양광, 중국산 덤핑 해소 전망… “가격 상승에 수익성도 오를 것”
국내 태양광 업계는 중국산 태양광에 대한 미국의 관세 조치로 반사이익을 기대하고 있다. 미국 현지에서의 생산을 확대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상 보조금 혜택이 커질 수 있고 중국산 태양광이 덤핑 수준으로 낮추던 태양광 판매 가격이 올라 한국 기업의 태양광 수익 역시 높아질 수 있다는 전망에서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정부가 양면형 태양광 패널에 대해 14.25%의 관세를 부과하고 동남아 4개국(태국·베트남·캄보디아·말레이시아)에서 생산된 태양광 패널의 관세 면제 조치를 종료하기로 한 것은 중국산 태양광에 대한 높은 진입 장벽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낮은 가격을 앞세워 물량을 투하하던 중국산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타격을 입는다는 분석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 태양광 시장에서 중국의 장악력이 낮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지난해 국내 태양광 수출액 10억 달러 가운데 96%(9억 6000만 달러)의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최대 시장이다. 미국의 대중국 관세 조치는 우리나라 기업이 미국 현지 생산을 확대해 태양광 영토를 더욱 넓힐 계기가 될 수 있다. 강정화 수출입은행 인프라금융부 연구원은 “자국에 생산 공장을 지은 국가에 보조금 등 지원을 집중하겠다는 미국의 의도가 더욱 분명해졌다”며 “국내에서 제품을 생산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것은 불리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조지아주에 연간 모듈 생산능력이 총 8.4GW인 2개의 생산 라인(돌턴·카터즈빌)을 갖춘 한화큐셀은 수혜가 예상된다. HD현대에너지솔루션 등 다른 태양광 업체들도 미국 진출을 고려해볼 필요성이 커졌다.
미국에서 중국산 제품이 끌어내린 태양광 판매 가격이 오르는 것도 한국 기업에 긍정적이다. 강 연구원은 “제품 가격 상승으로 수익 개선을 기대해볼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미국 수출 길이 막힌 중국산이 다른 우회 루트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은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 조현렬 삼성증권 연구원은 “중국의 우회 수출에 대한 미국의 추가 대응이 관건”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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