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에 불과하다”라는 말처럼 역사 속의 수많은 학살극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잊혀져 왔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만은 다르다. 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죽음을 맞이한 홀로코스트는 다양한 방식으로의 변주를 통해 기억돼 왔다.
‘쉰들러 리스트’, ‘사울의 아들’, ‘피아니스트’ 등 수많은 명작 영화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홀로코스트를 고발했지만, 영국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10년 만의 신작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들과는 다른 이질적 방식으로 홀로코스트를 조명한다.
영화는 ‘절멸 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의 가족들의 삶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카누를 타고 강을 누비고, 말을 타고 들판을 달린다. 아내는 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차를 나누고, 지인들과 파티도 연다. 아름다운 집과 편안한 생활 속, 이 곳은 천국과도 같다.
하지만 담 하나만 넘으면 그 곳은 지옥 그 자체다. 굴뚝에서는 무언가를 태우는 검은 연기가 계속해 올라오고, 비명인지 총성인지 알 수 없는 소리들이 조금씩 들려온다. 그리고 영화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 절대 시각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독일 출신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개념인 ‘악의 평범성’이 고스란히 영화에서 드러난다. 이 가족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악행이라고 판단하지 못한다. 사람을 ‘적재물’로 표현하며 어떻게 빠르게 소각시킬지를 토론하고 “너 같은 건 얼마든지 우리 남편에게 말해 없앨 수 있어”라는 말도 스스럼 없이 한다. 견고하게 만들어진 나치즘의 구조 아래 이들은 자기비판과 인간성을 상실했다.
전작 ‘언더 더 스킨’에서 보여줬던 글레이저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이 이번 작품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된다. 잘 짜여진 프레임과 구도, 미장센은 오히려 부자연스럽기까지 느껴져 이들의 비뚤어진 인간성을 강조한다.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장치는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기도 한 음향이다. 영화 인트로의 소리만 나오는 강렬한 부분은 관객들이 영화를 감상하며 음향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계속해서 미묘하게 배경에 깔리는 비명과 총소리는 끔찍한 진실을 관객들이 계속해 떠올리게 만든다. 조금씩 어긋난 조성과 불협화음은 불쾌한 감정을 배가시킨다. 엔딩의 음악 역시 관객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
영화의 메시지는 현 시대에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영화의 결말부, 현 시점의 아우슈비츠 기념관과 과거가 연결되는 장면, 회스가 구역질을 하는 장면을 통해 과거와 현재는 이어진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는 민간인들의 희생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대인인 글레이저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들이 그 때 무엇을 했는지 보라고 만든 영화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보라고 만든 영화”라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이스라엘의 피해자는 모두 비인간화의 희생자”라고 일갈했다.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과 음향상을 받았고, 제66회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과 음향상 등 4관왕에 올랐다. 다음달 5일 개봉, 1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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