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가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결정 철회와 전공의에 대한 완전한 행정처분 취소를 요구하며 18일 하루 전면 휴진과 총궐기를 선언했다. 2020년 의대정원 증원과 공공의대 설립 등에 반대하며 집단행동을 벌인 지 4년만으로, 중증질환 등 환자 불편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직역이기주의라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17일 서울대병원 집단 휴진 결정에 이어 의료계 전반으로 집단행동이 확산될 경우 4개월이 넘게 지속돼온 의정(醫政) 갈등이 심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과거 의료계 총파업 당시 개원의들의 참여가 저조했음을 고려하면 우려와 달리 미풍에 그칠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정부가 의료법·공정거래법 등에 따른 업무개시명령에 이어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의사 면허취소 카드까지 꺼낼지 주목된다.
의협 “범의료계 투쟁특위 구성… 파업기간, 정부 태도 달려”
의협은 9일 서울 의협 회관에서 전공의, 의대 교수, 봉직의, 개원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의사대표자대회를 열고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는 집행부와 대의원회, 전국 16개 시도 및 시군구 의사회장, 각 산하 단체에 직역별 대표자들까지 모이며 ‘단일대오’를 과시했다. 의협은 앞서 이달 4~7일 진행한 온라인 총투표 결과 투표 대상자 12만 9000명 중 63.3%가 투표에 참여했으며 90.6%가 강경 투쟁에 지지 의사를 나타냈다고 전했다. 단체행동에 참여하겠다고 밝힌 응답자는 전체의 73.5%였다. 이를 반영하듯 이날 대표자대회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격앙돼 있었다.
임현택 의협 회장은 “18일 전면 휴진과 함께 14만 의사는 물론 의대생, 학부모, 전 국민이 참여하는 총궐기 대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밝혔다. 18일은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회가 무기한 전체 휴진에 들어가는 다음 날이다. 임 회장은 “정부의 의료 농단에 맞서 대한민국 의료를 살리기 위해 범의료계 투쟁특위를 꾸려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임 회장은 “14만 의사, 2만 의대생은 더 이상의 인내를 중단한다”며 “의료계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강력한 대정부 투쟁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의사들이 정부·여당에 회초리를 들고 국민과 함께 의료정책을 바로잡을 결정적 전기를 마련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폭압적 정책 추진을 중단하고 국민 앞에 사죄하며 전공의·의대생들에게 용서를 구하라”며 “의료 농단 사태 책임자들을 즉시 파면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개원의들이 이번 의료 공백 사태에서 처음으로 참여하는 집단행동을 두고 과거에 비춰 휴진율이 낮으리라는 전망과 의대 교수들까지 동참하기로 한 만큼 이번에는 다르다는 전망이 엇갈린다. 의협 주축인 개원의들은 휴진이 곧바로 수입 감소로 이어지는 데다 동네 단골 환자들의 불만과 맞닥뜨려야 하는 만큼 병원 문을 닫기가 쉽지는 않다. 2020년 집단행동에 참여한 개원가가 한 자릿수 비율에 그쳤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다만 이번 강경 투쟁 찬반투표율이 이례적으로 높은 데다 개원의들도 후배인 전공의 문제에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어 휴진에 적극 참여할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의협은 18일 총파업 이후 움직임이 정부 태도에 달렸다는 입장이다. 최안나 총무이사 겸 대변인은 대표자대회 후 기자들과 만나 “2025학년도 증원 절차 중단을 요구한다”며 “올해 1500명을 증원하고 내년에 원래대로 돌아간다고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목적은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멈추게 하는 데 있다"며 "이후 상황이 어찌 될지는 정부에 달렸다. 모든 의사 직역과 다시 논의해 정부의 입장 변화를 이끌겠다”고 말했다.
환자단체 “몰염치한 결정”… 업무개시명령 등 정부 대응 주목
의료계 바깥의 반응은 싸늘하다. 서울대 교수회는 이날 “의료인으로서 지켜온 원칙과 노력을 수포로 돌릴 수 있어 자제해야 한다”며 “다른 한쪽의 극단적 대응을 초래할 비민주적 위험성도 있다”고 호소했다. 김성주 한국중증질환연합회 대표는 “생명을 담보로 집단의 이익을 위해 본분을 망각한 몰염치한 결정”이라며 “정당성도 없고 납득할 수 없는 처사로 즉각 철회를 촉구한다”고 비판했다.
의협과 의료계의 집단행동에 대해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진행된 대국민 담화를 통해 “일부 의료계 인사들과 의사 단체가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추가적인 불법 집단행동을 거론하고 있다”며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한 총리는 “의료계의 집단행동은 비상 진료 체계에 큰 부담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깊은 상흔을 남길 우려가 있다”며 “의료계와 환자들이 수십 년에 걸쳐 쌓은 사회적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의협 등 의료계가 불법 단체행동에 들어갈 경우 법과 원칙대로 대응할 방침이다. 한 총리는 “총파업과 전체 휴진이 현실화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의료계를 설득하겠다”며 “의료 공백 최소화에 모든 전력을 쏟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의료법·공정거래법으로 의사 면허까지 취소하는 강경 대응에 나설지 관심이 쏠린다. 전병왕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최근 브리핑에서 “개원의들의 불법적 집단행동이 있으면 정부는 의료법 등에 따라 여러 필요한 조치로 대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2000년 의약분업 추진 당시 의협 회장은 집단 휴진 사태를 주도했다가 공정거래법·의료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면허가 취소된 전례가 있다.
정부는 개원의들이 휴진할 경우 업무개시명령을 내릴 수 있다.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1년 이하의 자격 정지뿐만 아니라 3년 이하의 징역형도 받을 수 있다. 특히 개정 의료법은 어떠한 범죄든 금고형 이상의 실형·선고유예·집행유예를 선고 받았을 때 의사 면허를 취소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업무개시명령을 어기면 의료법에 따라 면허까지 박탈될 수 있다는 얘기다.
공정거래법은 사업자단체가 부당하게 경쟁을 제한하거나 각 사업자의 활동을 제한하는 행위를 할 경우 해당 단체에 10억 원 이내 과징금을, 단체장 등 개인은 3년 이하 징역 또는 2억 원 이하 벌금을 부과한다. 이 경우도 의료법상 면허취소 조항을 적용 가능하다. 또 응급의료법상 의료기관장은 종사자에게 비상 진료 체계 유지를 위한 근무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이를 어기고 환자에 중대 불이익을 끼치면 6개월 이내 면허·자격정지 혹은 취소가 가능하다.
한편 정부는 의대 정원 증원에 맞춰 교육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한 ‘의대 교육 선진화 방안’을 9월까지 발표하기로 했다. 교육에 필요한 건물과 강의실 등에 대한 공사 속도를 높이기 위해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하는 내용이 포함된다. 이와 함께 의료 기자재와 실습실 도구 충원 등을 위한 비용과 필수의료 지원을 위한 예산 등이 내년 예산안에 추가 배정될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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