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작가가 전통공예 장인과 협업해 만든 이불, 현판, 단청 벽화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인 이슬기(52)의 개인전 ‘삼삼’이다.
이슬기는 1992년 프랑스 생활을 시작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민속적 요소, 일상적 사물, 언어를 기하학적 패턴이나 선명한 색채로 표현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그는 한국의 문살, 통영의 누비이불, 멕시코의 지방 전통 바구니 제작자 등 세계 각지의 장인들과 협업하는데, 그 결과물은 전통이라는 틀 속에서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언어, 문화를 다채로운 방식으로 소환한다.
작가는 작품 속에 고정된 의미와 맥락을 입체화해 익숙하면서도 낯선 작품을 만드는 것에 주력한다. 작가의 이 같은 문제 의식은 이번 전시의 주제 ‘삼삼’에도 잘 드러난다. ‘삼삼하다’라는 형용사는 '외형이 그럴듯하다', ‘눈앞에 보이는 듯 또렷하다’ 등 다양한 의미로 변주돼 사용된다. 작가는 이 단어처럼 자신의 작품이 대상이나 오브제가 지시하는 보편적이고 고정된 의미에 국한되지 않고, 생명이 있는 물체처럼 다채로운 의미와 감각을 지니길 희망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구멍’이다. 작가가 말하는 ‘구멍’은 문이 만드는 밖과 안을 연결하는 큰 구멍부터 나무 문살의 격자 모양, 자연스레 형성되는 작은 구멍, 전시장 벽면에 직조된 모시 단청 사이사이 등 다양한 형태와 의미를 담고 있다. 나아가 이 ‘구멍’은 안과 밖의 이분법을 지우고 한쪽 방향으로 흐르는 보편적 인식과 감각의 관습을 뒤집어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작가의 예술적 시도이기도 하다.
3개 층으로 이뤄진 전시장 각 층에는 모두 격자 모양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단순한 격자 무늬가 아닌 ‘모시 단청’ 벽화다. 단청은 목조 건물에 여러가지 무늬를 그리는 장식의 한 방법으로 작가는 ‘긋기 단청(가칠한 단청 위에 선만 그어 마무리한 단청)'이라는 전통 기법을 구사하는 단청 장인과 협업해 이번 작품을 제작했다. 직물의 직조 방식을 연상하는 이 단청은 지하와 1·2층 전체에 설치돼 있다.
지하에서는 통영의 누비 장인과 협업한 ‘이불 프로젝트:U’의 신작도 살펴볼 수 있다.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불 프로젝트는 프랑스 친구에게 누비 이불을 선물하고 싶다는 단순한 바람에서 시작됐다. 그는 빛 반사가 뛰어난 진주 명주(견직물) 조각천을 조합해 자신만의 감각으로 도상을 만들어 넣었는데 그 문양이 독특하면서도 아름답다.
각 이불 작품마다 작가가 붙여 둔 재기발랄한 제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두 개의 둥그런 덩어리가 있는 듯한 형상을 한 이불은 ‘부아가 난다’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부아가 난다’는 말은 ‘허파가 부푼다’라는 의미로, 작품 속 도상은 실제로 부풀어 오른 허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소개되는 신작 ‘현판 프로젝트’는 도안화된 의성어나 의태어를 나무 널빤지 위에 새겨 단어의 의미와 외형의 연결고리를 해학적으로 형상화한 작업이다. 작가는 2019년부터 ‘문’이라는 주제를 탐구해 왔다. 작가에게 문은 ‘들어가는 곳’,'나가는 곳', 그리고 ‘우리가 있는 곳’이라는 세 가지 공간을 암시한다. 각기 다른 관점에서 하나의 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 본래 현판에는 중요한 이름이 새겨지지만 작가가 자신의 현판에 새긴 단어에는 특정한 의미가 없는 의성어 혹은 의태어다.
현장에서 만난 작가는 “어떤 글자인지를 알려주면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며 작품 속에 새겨진 단어의 정체를 알려주길 꺼려했다. 다만 그는 “한국어의 의성어는 매우 그래픽적으로 모두 ‘삼삼한 장면’을 생성한다”며 “현판에 새긴 단어는 특정한 의미가 없는 의성어로 각기 다른 시각에서의 해석이 사물의 본질을 다르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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