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색과 백색만 가능할 것 같은 산수화를 붉은색으로 그리는 작가가 있다. ‘붉은 산수’로 유명한 이세현(56)이다. 그가 그린 풍경은 낯설지만 익숙하다. 산천 앞에 놓인 군 초소는 고속도로를 조금만 달리다 보면 누구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 풍경에는 한국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들의 모습이 놓여진다.
자칫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는 이러한 풍경을 녹색이 아닌 ‘붉은색’으로 덮어버릴 용기 있는 작가는 많지 않다. 한국처럼 ‘레드 콤플렉스’가 아직도 남아 있는 나라에서 말이다. 실제로 그의 그림을 처음 본 사람들은 의심쩍은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그런 이세현의 심경에 변화라도 생긴 걸까. 이달 27일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 제목은 ‘빛나고 흐르고 영원한 것’이다. 그간 열린 그의 전시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제목이다. 붉은 산수 속에 놓일 풍경도 바뀔까. 전시를 앞두고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 위치한 이세현의 작업실을 직접 찾았다.
500호 신작 가득 쌓인 파주의 이세현 작업실
18일 작업실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이세현은 손에 잔뜩 물감을 묻히고 분주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작업실에는 500호 이상 크기의 ‘붉은 산수’ 작품이 가득 쌓여 있었다. 작가는 “이번 전시는 대부분 대작 위주의 신작으로 꾸며질 예정”이라며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꼈던 여러 가지 경험에 대해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최근 매일 오전 10시께 작업실에 도착해 12시까지 꼬박 그림을 그린다. 전시를 코앞에 둔 터라 더욱 그렇겠지만 그는 “평소에도 오롯이 그림에 몰입하기 위해 다른 행정적 업무는 아내에게 맡겨둔다”며 웃었다. 그렇다고 진짜 그림만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국내 유명 작가 중 드물게 소속 갤러리 없이 홀로 활동한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전시 요청이 들어오면 전시를 기획해야 하고 해외 컬렉터들의 소장 의뢰도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 바쁜 와중에도 갤러리와 협업하지 않는 것은 아직 꼭 맞는 상대를 찾지 못한 까닭이다.
그는 “예술가는 가치를 설득하는 직업이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끝까지 (관객을) 설득하는 게 작가를 도와주는 갤러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또한 “상업 화랑이 수익을 생각하는 것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라면서도 “갤러리가 좋은 작가라고 생각한다면 판매 유무에 따라 흔들리는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바라보는 기술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며 국내 갤러리들을 향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남의 그림 버리고 고심 끝에 탄생한 ‘붉은 산수’
그동안 그는 주로 붉은 산수화로 한국사의 현실을 표현해왔다. 1967년생인 그는 홍익대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오랜 기간 무명작가로 활동했다. 무명 생활이 길어지고 강사 생활을 전전하다 보니 미래에 대한 불안도 종종 찾아왔고 39세에 돌연 영국 유학을 결심한다. 그는 “그림을 그만둘까 고민하다가 문득 한 번도 그림을 열심히 그려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가진 재산을 다 털어서 외국으로 떠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영국 첼시예술대 대학원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 그는 처음에 큰 충격에 빠졌다.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한 이들이 대체로 그렇듯 작가 역시 오랜 시간 서양미술사를 공부하고 서양미술 사조에 맞춰 그림을 그려왔다. 그런데 거대한 미술사의 흐름에 맞춰 자신의 역사를 그리고 있는 유럽 작가들과 달리 자신은 남의 역사와 그들의 그림을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심 끝에 찾은 답이 바로 산수화다. 다만 전통 산수화는 아니었다. 그는 먹 대신 붉은 안료를 선택했고 여기에 작가가 바라본 한국 사회의 모습을 더했다.
붉은 산수에서는 군함, 포탄, 무너져가는 건물 등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작가가 군 복무 시절 야간 투시경을 쓰고 바라본 북한의 모습이기도 하다. 작가는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하며 경험한 분단의 현실과 아픈 역사를 자신의 작품에 녹여냈고 그의 그림은 단숨에 많은 유럽인들을 사로잡았다.
붉은 산수 떡잎부터 알아본 세계의 큰손 컬렉터들
이세현의 첫 번째 컬렉터는 ‘버거 컬렉션’을 운영하는 모니크 버거다. 모니크 버거는 맥스 버거와 함께 다양한 기관과 박물관을 후원하는 스위스의 세계적인 컬렉터. 당시 그는 다른 작가를 만나기 위해 학교를 찾았다 실기실에서 우연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세현을 발견했다. 한참 동안 이세현의 그림을 바라보던 그는 명함을 건네며 작품 구매 의향을 밝히고 떠났다. 이세현은 “그때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는데 다음 날 학교에서 큰 화제가 됐다”며 “한 번도 그림을 팔아본 적이 없어 300호 정도 되는 그림을 1000만 원에 팔았다”고 말했다. 현재 그의 작품 300호는 2억 원에 가깝다. 이후 그의 작품은 컬렉터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중국 미술품 컬렉션으로 유명한 스위스 컬렉터 울리 지그는 한국에서 우연히 그의 작품을 보고 영국으로 날아가 그를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현재 울리 지그는 그의 그림을 10점 이상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사치갤러리,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아트 컬렉션, 뱅크오브아메리카 등도 모두 작가의 컬렉터들이다.
‘빛나고 흐르고 영원한 것’ 담은 새로운 붉은 산수
이세현은 오랜 시간 예술가는 자신의 가치를 설득하는 직업이라고 믿어왔다. 작가라면 사회 비판을 해야 하고 사회에 울림을 줘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세계를 보며 그는 잠시 무기력함에 빠졌다. 작가는 “지금 세계는 단 1분도 쉬지 않고 전쟁을 하고 있고 이러한 갈등은 모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대립해서 벌어지는 것”이라며 “가치판단을 갖고 옳다고 주장하는 예술도 사실은 대립의 단초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느끼는 것을 그리고 싶어졌다”며 “꽃의 향기, 반짝이는 것의 소중함 등을 조명해보고 싶었고 이게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원천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 그토록 서정적인 이유다.
그는 “(전쟁이 만연한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이 이뤄지려면 수많은 잡초가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며 “전시 제목 ‘빛나고 흐르고 영원한 것’처럼 사람의 인연도 일시적이지만 사라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거대한 비극 앞에 사소한 것의 힘 그리고 싶다
작업실에는 이번 전시에 출품할 수많은 그림들이 전시를 위해 포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50여 점의 인물화 소품도 눈에 띄었다. 어머니, 친구, 처음으로 ‘붉은 산수’라는 이름을 붙여준 기자 등 모두 작가가 사랑했던 사람 혹은 작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눈을 감고 있다. 작가는 “사람이 자신의 눈 감을 모습을 볼 일은 거의 없다”며 “한 번쯤 이렇게 자신의 편안하게 쉬고 있는 모습,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문득 한 인터뷰에서 “역사의 참혹함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삶의 눈부심을 쓸 수 없다”고 말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이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그의 ‘붉은 산수’는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직후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독일어판 표지로 채택되기도 했다. 그는 “거대한 비극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사실 별로 없고, 사소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며 “거창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하늘의 별과 잡초, 꽃의 향기가 갖고 있는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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