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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선의 할리우드 리포트] 밥 딜런이 된 티모시 샬라메

영국 시인 딜런 토마스를 좋아해서 이름을 바꿨다는 노래하는 음유시인 ‘밥 딜런’(본명 로버트 앨런 지머맨)의 청년 시절을 티모시 샬로메가 재현해냈다. 사진제공=Searchlight Pictures




뉴저지의 한 병원으로 무작정 찾아가 ‘포크의 아버지’ 우디 거스리를 만나고 그를 위해 작곡한 노래 ‘Song to Woody’를 부른다. 자신을 ‘바비 딜런’으로 소개하며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자작곡을 들려주는 장면부터 티모시 샬라메의 연기는 진짜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컴플리트 언노운’(A Complete Unknown)은 포크 세대에게 연말 최고의 선물이다. 밥 딜런의 대표곡들을 라이브로 연주해 영화의 깊이와 진정성을 더했다. 티모시 샬라메가 이 곡들을 배워서 직접 연주했음이 놀랍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밥 딜런을 그저 흉내 내지 않아 기쁘다. 마이크에서 손을 떼고 가사를 엉망으로 만들거나 하모니카 솔로를 추가하고 템포와 페이스를 다르게 조절한 공연 장면들은 실제 연기가 아니었다면 이 같은 감흥은 없었을 것이다.

지난달 23일 화상으로 진행된 기자 간담회에서 티모시 샬라메는 “처음 본 밥 딜런의 이미지는 1963년부터 65년 사이 잭 크레이머가 찍은 사진 중 하나였다. 정리 안 된 부시시한 곱슬머리가 상징적인 흑백 사진이었는데 가장 먼저 기억에 남았다”며 “항상 음악에 관심이 많았기에 기타를 배우고 피아노와 하모니카 연주를 습득하며 1960년대 미국 포크 음악의 정신에 빠져들 수 있는 좋은 핑계로 삼았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인물 탐구가 연구로 느껴지지 않고 집착이 되어버렸다. 5년이란 시간을 할애해서 그의 경험을 호흡했다. 한 번 들어가면 돌아올 수 없는 세계, 완전히 밥 딜런이란 종교에 빠져 버렸다”고 뒤돌아봤다.

20대 중반을 밥 딜런으로 산다는 건 배우에게 축복이다. 2019년 토론토 영화제에서 제임스 맨골드 감독을 만난 후 수년간 촬영이 지연되면서 준비 기간이 길어졌고 티모시 샬라메는 기타와 하모니카를 모두 마스터할 수 있었다. 맨골드 감독에게 배우가 직접 노래하지 않는다는 건 어불성설. 매너리즘과 성대모사의 연속도 허용되지 않았다. 보이스 코치인 에릭 베트로와 함께 수많은 공연과 인터뷰를 무한 반복 시청하면서 숙성한 와인과도 같은 밥 딜런의 다층적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티모시 샬라메는 “수년 간의 연습이 자신감을 주었지만, 어느 순간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손에 스스로를 맡겼다. 밥 딜런에 대한 탐구를 위해서는 정형화된 뮤지컬 전기 영화는 잘못된 방식이라 직시한 그를 그냥 믿었다”고 밝혔다.

직접 기타를 치고 하모니카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티모시 샬라메는 자세가 목소리에 미치는 영향 등 사소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관찰해 밥 딜런을 연기했다. 사진제공=Searchlight Pictures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은 밥 딜런이 방랑자에서 로큰롤의 아이콘이 되기까지의 4년 여정을 그린다. 제목은 포크록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에 등장하는 후렴구에서 따왔다. 1960년대 초 미국은 반전운동과 민권운동을 내세운 사회·정치·문화적 격변을 겪으며 스스로를 재정의하는 과정에 있었다. 로어 맨해튼(그리니치 빌리지와 첼시)을 중심으로 마일즈 데이비스와 함께 모던 재즈의 꽃을 피우고 레니 부르스의 풍자 코미디, 팝아트의 대표주자 앤디 워홀과 유명한 팩토리 스튜디오, 그리고 우디 거스리와 피트 시거가 촉발한 포크 음악 운동이 시작된 시기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들썩였던 2024년, 할리우드 리포트를 밥 딜런의 반전·저항정신으로 마무리한다. 노래에 문학을 더한 포크록 가수 밥 딜런에게 2016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며 한림원은 “위대한 미국 노래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밥 딜런은 냉전이 삶의 모든 측면을 뒤덮고 있던 중요한 순간에 등장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결국 전 세계를 재앙 직전까지 몰고 갔고 1963년 JFK(케네디) 암살은 미국의 순수성을 무너뜨리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민권 운동은 탄력을 받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하기 직전, 딜런이 링컨 기념관에서 공연한 워싱턴 행진으로 민권운동이 시작됐다. 이 시기는 낡은 규범과 새로운 이상 사이의 첨예한 충돌을 반영했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지만 딜런은 자신의 신념을 음악에 담아 한 세대에 불을 지폈고, 이후 60년 동안 그는 상징적인 인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고 장르를 넘나드는 아티스트들은 시대를 초월한 그의 노래와 가사를 계속해서 재현해냈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밥 딜런은 예술적 규범에 갇히기를 거부하며 문화 전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하은선 골든글로브협회(GGA)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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