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사랑의 대가인가, 죄악에 대한 징벌인가!”
사랑에 빠져 가족까지 배신하고 연인 ‘이아손’을 도운 마법사 ‘메데이아’로 분한 파트리샤 프티봉. 그는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애절하게 사랑과 분노, 비탄의 감정을 담은 아리아로 무대를 장악했다.
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마법사의 불꽃’ 공연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를 접할 수 있는 무대였다. 한화클래식의 고음악 시리즈 일환으로 마련된 이번 공연은 17~18세기 바로크 오페라의 걸작들을 엮어 재구성한 1인극이다.
공연의 막은 음악사 전문가 정경영 한양대 음대 교수의 해설로 열렸다. 고음악이 익숙치 않은 관객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였다. 정 교수는 “이 공연은 17세기 프랑스 오페라의 다양한 관습과 구성을 따랐다”고 설명했다. 5개 파트로 이뤄진 것도 당대 오페라가 흔히 5부 구성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어 그는 “바로크 오페라에는 여성 마법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이들도 사랑 앞에서는 나약해지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장치”라며 프티봉이 펼칠 마법 같은 무대에 기대감을 더했다.
악기 구성부터 특별했다. 고음악 단체 ‘아마릴리스’의 연주자들은 바이올린, 첼로 외에도 하프시코드, 아치류트(기타와 유사한 발현악기), 타악기 등 고악기를 사용해 수백 년 전 바로크 시대의 소리를 21세기 한국 관객에게 전했다. 이 공연을 기획한 예술감독 엘로이즈 가이아르도 단원 중 한명으로, 바로크 플루트를 직접 연주하며 무대에 섰다.
첫 곡은 장-페리 르벨의 교향곡 ‘원소들’ 중 ‘혼돈’. 불규칙한 화성 변화로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표현한 곡으로, 18세기 음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이고 강렬했다. 이어 화난 표정과 거친 발걸음으로 등장한 프티봉. 마르크-앙투안 샤르팡티에의 오페라 ‘메데이아’ 중 ‘이제는 끝이야, 더는 참을 수 없어’를 노래하며 그의 빨간 머리만큼이나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1·2부에서 연인의 배신에 대한 분노와 탄식을 표현한 메데이아에 이어, 3·4부는 사랑에 두 번이나 처절하게 실패한 여자 마법사 키르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공연의 중심에는 프티봉이 있었다. 무대나 다른 배역 없이 펼쳐진 1인 콘서트 형식이었지만, 허전함은 없었다. 가장 높은 음역대인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인 프티봉은 고음역과 저음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실연당한 여인의 슬픔은 물론, 격정에 휩싸여 끓어오르는 감정까지 완벽하게 표현하며 무대를 압도했다.
특히 마지막 5부에선 장-필리프 라모의 오페라 ‘플라테’ 속 ‘광기의 아리아’를 부르며 팔색조 매력을 선보였다. 엉뚱하고 사랑스럽고 드라마틱한 노래와 연기로 공연을 클라이맥스로 끌어올렸다. 노래 중간에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차용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프티봉과 가이아르가 과거의 갇힌 음악이 아니라 관객들과 소통하기 위한 음악을 들려주려 한 의도가 드러난 대목이기도 했다.
고조된 무대의 열기는 앙코르곡으로 이어졌다. 프티봉은 라모의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 중 ‘위대한 파이프의 춤’을 선보였다. 이는 국내에서 고음악 열풍을 일으켰던 프티봉의 2003년 공연 실황 DVD에 수록된 곡이기도 하다. 마지막 곡으로는 한국어로 ‘아리랑’을 부르며 공연의 막을 내렸다.
공연 초반, 생소하지만 섬세한 음악을 한음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숨죽였던 관객석은 후반부에 이르러선 인간적인 감정을 노래하는 소프라노에 몰입하며 즐기게 됐다. “내가 부르는 바로크 오페라는 과거에 갇힌 노래가 아니라, 동시대 음악처럼 들리길 바란다”는 프티봉의 희망대로였다. 음악평론가 송주호는 “바로크 음악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귀한 무대였다”며 “국내에서는 듣기 힘든 프랑스 레퍼토리를 제대로 연주하고 노래하는 음악가들의 무대여서 더욱 반가웠다”고 평했다.
한편, ‘마법사의 불꽃’은 6월8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에서 한차례 더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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