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한때 세계가 주목하는 거대한 실험장(테스트베드)이었다. 자동차, 철강, 화학, 반도체 같은 중후장대 제조업은 정부 주도의 과감한 투자와 제도적 지원 속에서 기술 자립을 이뤘다. 지난해 자동차 산업은 생산 412.8만 대, 수출 708억 달러, 약 30만 명 고용을 기록하며 여전히 국가 경제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반도체도 메모리 분야를 중심으로 전체 수출의 20% 이상, 1400억 달러 넘는 실적을 올리며 효자 노릇을 한다. 철강, 석유화학, 조선도 정부의 전략적 산업 정책 아래 수출산업으로 성장해 대한민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는데 기여했다.
반면 문화와 지식 산업은 성장 경로가 달랐다. K컬처, K푸드, K뷰티 같은 분야는 민간 주도의 창의와 자율이 원동력이었다. 한류 콘텐츠의 확산은 국가 정책이 아니라 기업과 창작자들의 도전에서 비롯됐다. K뷰티는 브랜드 스토리텔링과 글로벌 유통망으로 세계 시장을 넓혔다. 제조업이 국가 주도의 ‘위로부터의 실험’이라면 문화 산업은 시장의 역동성 속 ‘아래로부터의 실험’이었다. 그렇지만 중후장대 제조업과 문화·지식 산업의 성장 방식은 달랐지만 두 길 모두 ‘실험을 통한 성장’이라는 DNA를 공유했다.
문제는 이 DNA가 최근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의 그린뉴딜,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등 새로운 성장동력 시도는 있었지만 제조업이나 한류 콘텐츠 수준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특히 바이오, 태양광, 풍력 같은 미래 산업은 수차례 테스트베드 시도가 좌절됐다. 바이오 산업은 2005년 말 줄기세포 연구 논문 조작 의혹에 휘말린 ‘황우석 사태’나 2020년 임원들의 배임죄 의혹과 임상 실패로 거래정지됐다가 이후 2년 5개월 만에 거래가 재개된 ‘신라젠 사건’들과 같은 투명성 이슈와 단기성과에 매달리는 풍토로 지지부진한 상태다. 태양광은 정치적 논란은 뒤로 하더라도 전력망 연계 지연과 변전소 부족에 막혔고 울산 해상풍력의 경우 주민 반발과 정치적 이유로 수년간 중단됐다.
에너지 정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탈원전’과 ‘원전 회귀’를 오가는 바람에 장기 계획의 일관성 측면에서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이는 단순히 지역 갈등이나 기술 미성숙의 문제가 아니다. 정책 설계의 정교함, 이해관계 조정 능력, 경제 문제에 대한 정치적 중립성, 실패를 흡수할 수 있는 안전망 부재 등이 원인이다. 제조업과 지식산업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험을 거듭하며 경쟁력을 쌓았지만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고자 했던 신산업들은 애초에 시험의 기회조차 충분히 부여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AI를 국가 성장의 축으로 세우며 ‘인공지능(AI) 선도국’을 선언했다. 100조 국민성장펀드 조성, 벤처 투자 연간 40조 달성 등 구체적인 국정과제까지 마련하여 인프라·기술·인재를 동시에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다. 아직 재원의 조달 구조가 불명확하고 국가 AI컴퓨팅센터 구축사업은 사업자 선정과정부터 표류하고 있다. AI 인재 유출이 심화하고 있어 단기 유인책만으로는 장기 생태계 구축이 어렵다. 미국과 중국의 투자 속도와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이런 조건에서 ‘AI 선도국’이 되려면 예산 투입 이상의 전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공정한 ‘놀이터’, 즉 혁신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규제를 과감히 없애고 실증 사업의 실패가 곧 산업 전체의 붕괴로 이어지지 않도록 안전판을 마련하여 민간의 창의력이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의지가 필요한 때다. 정부는 생태계를 만드는 역할에 충실하고 실제 ‘실험’은 민간의 손에 맡기면서 기업이 정부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인 성과에 힘쓰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이 ‘놀이터’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는 곳에 정부 자원을 집중 지원해야 한다. 과거 우리는 나눠먹기식의 분산 투자로 진정한 승자가 없는 상황을 만들곤 했다. 누구나 가능성을 가지고 도전을 하게 하되 실질적인 성과를 내는 기업이 마지막 한고비(캐즘)를 뛰어넘게 도와줘야만 기업이 국가의 성장동력까지 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에너지 정책이 정권 교체에 따라 ‘탈원전’과 ‘원전 회귀’를 오가며 장기 계획의 일관성이 무너졌던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AI 전략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법제화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지속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기술 개발뿐만 아니라 AI 윤리, 데이터 활용 등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분야들을 정부가 주도해서 조율하고 장애를 없애야 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조율하고 설득하는 정치적 리더십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자동차, 인터넷, 5세대 통신(5G)에서 국가 전체를 거대한 테스트베드로 5활용해 세계를 선도한 경험이 있다. AI라는 새로운 도전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테스트베드 국가’의 DNA를 되살려야 AI 시대의 진정한 선도국으로 도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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