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은
김다은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
연재 중
웹소설 종의기원
12개의 칼럼 #문화
  • 웹소설 종의기원
    2. 세상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 김아리랑 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다음 날, 나는 예약한 병원에 가서 코로나 백신 2차 접종을 받았다. 1차에서 아무런 부작용이 없었기에, 2차에서는 방심하고 말았다. 전날 저녁부터 그날 새벽까지 400페이지에 달하는 『인공낙원의 문』을 읽으며 대담 질문을 뽑았고, 아침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병원에서 백신을 접종했고, 먹어두면 좋다던 타이레놀도 찬장 어디 뒀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생략하고 말았다. 갑자기, 온몸에 툭툭 알레르기 증상이 솟고 끙끙 앓기 시작했다. 하루 지나면 가라앉는다는 항간의 경험을 철석같이 믿고 버텼다. 하지만 다음 날은 불의 도가니에 들어앉은 것처럼 온몸에 열이 올랐다. 병원을 방문해서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몇 가지 검사를 했지만, 별 이상은 없다고 했다. 주는 약을 삼키고 또 하루가 지나갔다. 아무래도 새 대담자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다른 이를 대신한 대담자였기에 국제예술창작재단도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여러 나라를 떠돌았던 나는 이런 상황에서 문화적 외교 관계를 무너뜨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 덕분에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도 많아 자연스럽게 습득한 외국어가 여럿 되었고, 그중에 프랑스어도 있었다. 막 번역 출간된 프랑스 책을 사서 읽고 프랑스 작가와 토론할 수 있을 대담자를 ‘반나절 만에’ 찾기에는 내가 봐도 너무 늦었다. 아리랑 씨 말대로 “지금 상황에서 이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한참 코로나 팬데믹이 기승을 부리던 때라 국제 도서전은 방역 수칙 때문에 온라인 축제를 벌인다고 했다. 그래서 영상으로 대담을 먼저 찍게 되어, 촬영을 위해 최소한의 사람들만이 모여 있었다. 아리랑 씨는 출장을 갔다며 창작재단 측에서는 노랑머리 여자 직원이 왔고, 영상 기술진, 책을 번역 출간한 출판사 편집자, 그리고 몇 명의 취재진이 모여 있었다. 대담은 영상 편집 후에 서울 국제 도서전 참가 나라들에 송출된다고 했다. 대담 화면에는 프랑스 작가의 모습은 올라오기 전이었고, 내 모습이 막 잡힌 것이 보였다. 어, 나도 모르게 작은 소리를 뱉어냈다. 미용사가 머리를 과도하게 매만져 평소와 다른 모습이기도 했지만, 백신으로 퉁퉁 부어서인지 영상에 올라온 나를 내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못생겨져 버린 모습이 속상해서 못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영상 속의 나는 분명 내가 아니었다. 내가 입을 열면 영상 속의 내가 흉측하게 일그러지며 말을 따라 했다. 그때, 화면에 프랑스 작가가 솟아올랐다. 시차 때문인지 한동안 영상이 흔들렸고, 작가는 이쪽의 상황을 모르는지 스스로 마이크 테스트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와이셔츠나 넥타이 없이 느슨한 모습으로 긴장감 없이 자기 행동에 몰두했다. 작품 속에서 보여주던 환각의 도시와 잔인하고 죄의식이 없는 마약 제조자들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풀어낸 작가라기에는 너무 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가 우리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는 동양식으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프랑스식으로 “봉주르~!”로 시작하는 인사말을 했다. 기술진이 시작하라는 사인을 주었다. 나는 프랑스 작가에게 자신을 소개해 달라고 했고, 나는 들은 대로 통역했다. 그리고 나를 소개해야만 했다. 설핏 내가 아닌 내가 보였다. 모두 내 입을 바라보는 다급한 상황에,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말았다. 현장에서 대담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약간 움찔하는 느낌이었지만, 프랑스 작가는 호감의 웃음기를 띄면서 말했다. “내가 누구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당신은 아픈 대담자를 대신해서 저를 위해 나와주신 고마운 분입니다. 이런 변화가 책을 읽을 한국 독자와 우리 두 사람의 인생에 어떤 변수가 될지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이 난센스 같은 대화에 현장 사람들은 귀를 기울인 모습이었다. 문학적인 토론이라는 것이 모호하면 할수록 시적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대로 좋은 서막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우선 표지 문구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나는 저급한 역설적인 표지 문구로 먼저 그를 건드리고 싶었다. 프랑스 작가는 예상했다는 듯이 간단하게 대응했다. 표지 문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대응 문구를 같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 p.202에 대응 문구가 있다고 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은 /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가 말한 문장을 듣자마자 숨이 거칠게 올라왔다. 우선 그 문장을 읽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표지 문구의 대응 문장이라면 당연히 기억해야 한다. 기억하지 못해도 들으면 기억나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제대로 독서했다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코로나 백신의 부작용으로 기억력이 약해졌거나, 세계적인 작가의 언어 감각 앞에서 오래간만에 사용하는 프랑스어가 삐걱거려 내심 당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주르륵 빠르게 읽어 치운 허술한 독서의 구멍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프랑스 작가는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들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제가 고백하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세상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에서 인용한 것이니까요.” 작가가 말하는 문구가 기억나지 않는데, 문구의 출처를 아는 것은 가능치 않은 일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이라는데 그가 책의 제목까지 알려주면서 나의 자존심을 뭉개지 않도록, 나는 서둘러 아는 척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말한 두 번째 문장이 표지 문구와 정반대의 뜻을 담고 있음을 깨달았다. ‘오만하구나.’ 속으로 그런 생각이 올라오자 차츰 정신이 돌아왔다. 표지 문구에서도 반어적인 표현으로 독자를 우롱하더니, 그 문장과 전혀 반대되는 문장으로 다시 독자를 우롱하려고 했다. 지혜로운 대담자라면 작가의 오만쯤은 쉽게 누그러뜨릴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는군요.” 그는 은인에게 하듯 친절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의 종이 되지 않아야 모든 이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의 비밀이 제가 책에 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인용한 책을 모르고 대담을 계속 이어가다가는 실수를 저지르겠다는 우려가 설핏 머릿속을 스쳤다. “저는 알고 있지만, 혹여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 책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런데 그때, 프랑스 작가는 천사를 보았거나 악마를 보았거나 무엇인가 본 모양이었다. 작가의 얼굴에서 난감함과 호기심이 섞인 표정이 대서양을 건너 나에게로 전달되었다. 나는 그때 약 때문인지 텔레파시 주파수가 매우 높게 올라가 있어서 그의 내면에서 느끼는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곤 했다. 한국의 영상 기술자가 나를 흘끗 쳐다보았고, 김아리랑 씨 대신에 온 국제예술창작재단의 노랑머리 직원이 급하게 종이에 무엇인가를 써서 허공에 들고 내 쪽을 향하여 흔들었다. 두 사람의 거리 때문인지 열 때문인지 그 글자가 선명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한숨 같은 탄성이 전해졌다. 그 책이 무엇인지, 나만 빼고 모두가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 부분 혹은 전체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2024.07.29 09:00:00
    종의 기원
  • 웹소설 종의기원
    김다은 작가는 첫 소설작품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습니다. 이후 장편소설 ‘바르샤바의 열한 번째 의자’ ‘금지된 정원’ ‘모반의 연애편지’ ‘훈민정음의 비밀’, 창작집 ‘쥐식인 블루스’ ‘위험한 상상’ 등을 비롯해 문화칼럼집 ‘발칙한 신조어와 문화현상’ ‘너는 무엇을 하면 가장 행복하니’, 서간집 ‘작가들의 연애편지’ ‘작가들의 우정편지’, 문학이론서 ‘영감의 글쓰기’ 등을 출간했습니다. 다수의 작품이 번역되어 해외에 소개됐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 청송 객주 문학관의 작가 레지던시, 그리고 정선 여량면에서 주최한 아우라지 작가 레지던시 문학관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와 불어불문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 프롤로그 이 소설은 자신이 겪은 가장 치욕스러운 일을 통해 구원받은 이야기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잊을 수 없는 치욕스러운 일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과거의 치욕을 아직 치워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다. 그 감정이 여전히 남아 울컥 마음의 밑바닥에서 치솟아 올라오는, 떨쳐 버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나쁜 꿈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치욕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지, 반대로 삶의 영예처럼 여겼던 일이 나를 어떻게 롤러코스터처럼 솟구치게 했다가 순식간에 나락으로 내동댕이쳤는지를 전하고 싶다. 내가 느꼈던 치욕도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명예로운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1.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국제예술창작재단에서 전화가 왔다. 김아리랑 팀장이라고 했다. 아리랑이라는 이름을 듣고 나는 단번에 그녀를 기억해 냈다. 그녀가 강하게 각인된 이유는 ‘아리랑’이라는 독특한 이름과 언젠가 한 대사관 파티에서의 과한 술주정이 매우 천진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껏 멋을 내고 도도하게 잘난 척하는 무리 속에서 마치 술에 취한 시골 아낙처럼 혀 꼬인 소리로 사람들을 쥐락펴락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여 프랑스 대사관 행사에 단골로 오는 약간 귀여운 주정뱅이 정도로 알았는 데, 그녀는 국제예술창작재단의 유럽지역 문학 담당자였다. 사람에 관한 인상이나 추측이 그렇게 빗나간 적이 살면서 처음이었다. 아마 그 빗나감이 내가 겪을 사건의 전조였던 모양이다. 그 귀여운 술주정뱅이가 아니었으면, 사람의 마음을 턱 놓게 만드는 그녀의 대화술이 아니었으면 일이 그렇게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경계심 없이 그쪽의 용건에 귀를 기울였다.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 도서전에서 프랑스 작가와의 대담을 기획했는데, 한국인 대담자가 코로나에 감염되어 갑자기 격리되었다 했다. 행사가 3일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긴급전화라 했다. 대담의 논제가 될 프랑스 작가의 작품은 한국에 막 번역 출간된 『인공낙원의 문』이라 했다. 책을 구해 읽을 시간이 충분치 않다거나 코로나 2차 접종을 앞둔 사실을 말하기 직전에, 아리랑 씨는 “지금 상황에서 이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 당신입니다”라고 말했다. 귀여운 주정뱅이에게서 정중한 부탁을 받자, 언어 마법에 걸렸던 모양이다. 환각에서 깨듯 정신을 차리고 나니 승낙한 후였다. 전화를 끊고 나니,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결정이 묘하게 미심쩍었다. 자주적인 결정이었다고 합리화하기 위해, 내심 독서가 뜸해진 시기에 책이나 읽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그녀의 화술에 넘어가 무심코 한 결정은 아리랑 고갯길이 아니라, 이렇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찾아 먼 길을 떠나게 만든 것이다. 책을 구하는 데 시간을 잃지 않도록 재단 측에서 『인공낙원의 문』을 택배로 보내주었다. 막 출간된 따끈한 책을 펼치고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은 진지하게 독서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책 커버의 문구가 눈에 띄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표지 문구에는 작가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을 담는다. 값을 주고 누가 누구를 샀단 말인가. 인간을 값을 주고 샀다면 그것은 고대 시대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값을 주고 샀으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는 문장은 매우 모순적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비틀어 쓴 반어법에 지나지 않았다. 『종의 기원』이 생물학적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을 의미하고, 사람들에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러기에는 표지 문구에 자유의 본질을 상징하는 무엇인가가 빠져 있었다. 대담의 첫 질문으로 이 모순적인 문장을 건드리기 위해 메모장에 적었다. 소설류는 이래서 읽을 가치가 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두 번 읽을 시간이 없을 것이다. 아예 첫 번째 독서로 세계적인 작가와의 대담에 걸맞은 질문들을 뽑아내야 했다. 장편 소설 『인공낙원의 문』의 배경은 세계지도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특정 나라가 아니었다. 도입부에 묘사된 소설 시공간이 살아있는 시체들의 도시처럼 보여서 좀비 이야기인가 싶었다. 그런데 ‘인공낙원’은 마약의 환각에 의해 들어갈 수 있는 미지 세계의 기괴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좀비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고 아무도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소설의 중심 인물은 마약 제조자들이었다. ‘모르’라는 이름의 마약은 사람의 뼛가루가 들어가야만 효능이 있어서, 그들은 인간의 뼈를 구할 수 있으면 무엇이든지 했다. 몰래 무덤을 파내고 덮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갈수록 대담해진 일당은 무덤을 파고 덮는 번잡하고 위험한 과정을 생략하고 싶어졌다. 돈을 주고 장의사(葬儀社)에게서 뼈를 빼돌리기로 했다. 교통사고로 몸이 손상된 사체의 뼈들이 가장 안전한 상품이었다. 장의사가 뼈를 빼돌려 악당들에게 넘겨주거나 묘지로 이동하기 전에 필요한 부위의 뼈를 적출하기로 했다. 그날도 교통사고로 죽은 한 여인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 몰래 관을 열었다. 일당은 소스라쳤다. 죽은 여자만 들어 있어야 하는 관 안에 갓난아기가 탯줄도 끊지 못한 채 어머니의 몸에 매달려 있었다. 어찌 임신한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입관했는지 경악스러웠다. 분명 의사가 여자의 죽음을 확인했고, 장의사도 여자의 죽음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가 죽은 후에 아이가 출생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아이가 죽은 엄마의 몸에서 스스로 빠져나왔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여자의 사망을 선고한 가짜 의사에게 생명을 경원시한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한동안 떠들다가, 악당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고 스스로 풀이 죽었다. 여자의 시체를 빼돌린 브로커도 경찰에 넘겨야 한다고 떠들다가 잠잠해졌다. 어머니의 몸에서 죽은 후에 분만된 사산아는 사체 유기죄의 사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일당의 우두머리가 아는 척을 했다. 그러자 일당은, 가족도 없고,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여자인 것 같으니, 문제를 크게 만들지 말자고 의견을 모았다. 소설 도입부를 읽을 때 만해도, 나는 기존 좀비와 전혀 다른, 즉 죽어서 돌아다니는 좀비가 아니라, 마약 때문에 살아도 죽어 있는 사람들의 도시를 설정한 것에 신선함을 느꼈다. 치밀하게 직조된 악의 그물망을 따라 읽을 때만 해도, 작가의 문학적인 재능에도 조금 감탄이 되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독자를 건드리기 위해 작가가 놓은 교묘한 덫을 발견하고는 기분이 나빠졌다. 여자의 뼈는 빼돌린다 해도 아이를 어찌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부분부터였다. 일당은 아무렇지 않게 아이까지 데려가자는 결론을 내린다. 한 사람의 돈으로 두 사람의 뼈를 가지게 된 것이 이득이라고까지 했다. 나는 갑자기 작가가 놓은 덫이 너무 허술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작가와의 대담에서 흔히 하는 질문들은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냐, 혹은 영감을 어디서 얻었느냐 등 정해진 루틴이 있다. 하지만 나는 죄의식 없는 인간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고 싶어졌다. 이 질문을 뽑으면서, 나는 스스로 당혹스러워졌다. 도덕이 선에 관한 윤리라면, 문학은 인간의 갈등과 악에 관한 철학이다. 그러므로 소설이 악한 주인공을 선호한다고 해서 탓할 일은 아니다. 문학은 그런 악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들여다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재판장이 왜 살인했느냐고 묻자, 주인공 뫼르쏘는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라고 자신을 변론한다. 그 소설은 세계적인 작품의 반열에 올라 있다. 그런데, 악당 중의 한 명이 갑작스럽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는 처음에 모자(母子)의 관을 도로 덮자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었지만, 갑자기 무슨 쇼냐는 일당의 면박을 받는다. 그는 다시 도덕심에 호소했고, 동료들은 요즘 벌이가 좀 괜찮아지니 배가 부르냐고 콧방귀를 뀐다. 그는 망설이다가 받았던 돈을 땅에 던지고 줄행랑을 쳤다. 동료들은 이 배반자를 잡아 족치고 싶었지만, 너무 빨리 달려 가버렸다. 그는 그들 중에 유일하게 딸아이가 있는 아버지였고, 그들은 그를 조금 이해하기로 했다. 단지 괘씸죄로 한 달간 일할 기회를 주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먼저 탯줄을 끊고 아기를 옮기기로 한다. 그러다가, 다들 경악한 표정으로 관에서 뒷걸음질을 쳤다. 나도 문장을 읽다가 ……소스라쳤다. 여자의 다리 아래쪽에서, 염소 새끼처럼 아이는 아주 미묘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다음 회에 계속 …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 부분 혹은 전체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2024.07.15 10:04:16
    종의 기원
1 2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