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은
김다은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
연재 중
웹소설 종의기원
17개의 칼럼 #문화
  • 웹소설 종의기원
    7. 기원이 없는 종의 기원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단추를 낄 수는 없었다. 밤새워 준비한 질문들은 이제 소용이 없게 되었다. 혼자 문학작품을 읽을 때는 어떻게 읽든 문제 될 것이 없다. 작가의 의도도 상관이 없고, 읽고 싶은 부분만 읽거나, 마음에 드는 문장에 줄을 치거나, 혼자 해석하고 즐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대담은 달랐다. 공적 대담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 대담은 『인공낙원의 문』의 작가를 추앙하는 전 세계 인간들이 영상을 통해 보고 들을 한국 국제도서전의 특별 기획행사였다. 아찔한 기분이 순간 찾아들었다. 가장 자신 있는 영역에서 허방을 디딘 심정이었다. 문학작품을 제대로 논하려면 작품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독자가 밖에서 열쇠로 열고 들어가서 작가를 만나거나, 작가가 안에서 열어주며 독자를 초대하는 방식이어야 했다. 나는 『인공낙원의 문』을 열 수 있는 두 번의 기회를 잃었다. 표지 문구를 이해하지 못해 스스로 문을 열지 못했고, 그 사실을 솔직하게 알리지 못해 작가가 문을 열어줄 기회를 놓쳐 버렸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다면, 저 순진한 얼굴을 한 작가는 작품을 한국에 더 많이 팔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알려주었을 것이다. 내가 알면서도 일부러 질문을 던졌다고까지 생각했을 것이다. 사회자나 대담자는 청중이나 관객을 위해 알면서도 모르는 척 대신 물어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부지불식간에 표지 문구의 출처를 안다고 나는 말해버렸다. 나는 내 오만함에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작가가 독자들에게 직접 알려줄 기회도 차단해버렸으니 결코 좋은 대담자가 아니었다. 내가 표지의 모순적인 문구를 이해했다는 전제 하에 작가는 대화를 진행했다. 다른 독자들도 그 정도는 이해한다고 여긴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 정도’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이다. 지금 솔직하게 번복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여태 녹화된 내용과 대화가 맞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담을 넘어보자는 심정이었다. 순간, 머리를 치는 것이 있었다. 문득 세상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이 다윈의 『종의 기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읽지는 않더라고 전 세계 사람이 모른다고 말할 수 없는 책이다. 우리나라 초등학생들도 아는 내용이었다. 표지의 모순적인 문구가 다윈의 ‘종’과 관련된 것이라는 근거없는 확신이 올라와서, 나는 즉석에서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메종에서 키우는 ‘푸른 감자’로 다윈의 종을 건드려보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요?” 화면 속 작가의 눈동자가 한없이 커지는 것을 먼저 보았고, 이어 그의 대답이 들렸다. “오! 그렇게 연결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윈의 종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의 종으로 연결된 이론이니까요.” 작가의 반응이 반가웠다. 표지 문구를 다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스스로 그 의미를 말하도록 유도하면 될 것 같았다. 최근에 다윈의 자필 원고가 일부 발견되어 세상이 떠들썩했다. 그 자필 원고는 폐지로 버려지거나 자녀의 그림 낙서나 문제풀이 종이로 사용되었다가 발견되었다. 나는 작가의 의도를 더욱 정확하게 알기 위해 다시 확인했다. “다윈에 따르면 척박한 환경에 적응한 생물만 진화한다니, 경쟁하다가 지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다윈의 이론은 철저한 세상의 경쟁 논리이고 죽음의 질서에 부합한다는 뜻이군요.” “맞습니다. 다윈에 따르면 인간도 다른 생물에 비해 특별난 존재가 아니지요. 우연으로 태어났고 인간은 앞으로 다른 경쟁자에 의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논리이니까 철저한 죽음의 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윈의 최근 기사에서 읽었는데, 자연선택은 곰같은 동물을 고래같은 동물로 점차 변화시킬 수 있다는 기록이 나중에 삭제되었다고 했습니다. 비평가들의 반박이 심해지자 그 뒤의 판본에서는 다 사라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부분을 다시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워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살리건 죽이건 별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윈의 ‘종의 기원’은 과학이라는 허울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자연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 기원이 없으니까요.” “어떻게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생명의 체계에서는 한 가지 종이 다른 종으로 결코 바뀔 수 없습니다.” “종에서 종으로 바뀌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소설 속 푸른 감자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땅의 성질 때문에 푸른 감자가 생겼다고 적지 않았나요?” “소설 속 푸른 감자는 물론 상상의 산물이지만, 설령 그런 변화가 있다 해도 환경에 의해 ‘종’안에서 일어난 다양성으로 보시면 됩니다. 감자뿐만 아니라 자연의 생명체계는 태초에 이미 정해져 변할 수 없습니다. 생물의 종이 계속 변한다는 다윈의 논리는 생명의 기원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원숭이에게서 진화했다는 것도 거짓이라는 것이군요?” “당연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우리는 한 번도 원숭이가 인간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관찰할 수 없었을까요? 천천히 진화해서?” 작가는 질문을 던지면서 약간의 코웃음을 쳤다. 나는 코웃음이 거슬려서 다시 겸손한 마음을 잃었다. “그렇다면 수없이 사라지고 새로 생겨나는 동식물의 변화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죽음의 종이 아니라 생명의 종을 제대로 이해하면 됩니다. 표지 문구가 그 비밀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표지 문구의 출처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내가 아직도 표지 문구에서 헤매는 심정을 작가가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책상다리를 발로 차버리고 싶을 정도로 스스로 화가 났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 부분 혹은 전체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2024.09.09 09:00:00
    종의 기원  <7회>
  • 웹소설 종의기원
    6. ‘모르’의 비밀 “인간의 뼈로 마약을 만드는 일이 실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나요?” 나는 준비한 두 번째 질문을 『인공낙원의 문』의 작가에게 던졌다. 화면만 바라보던 촬영 기사가 고개를 약간 들었다. 출판사 편집자도 궁금한지 작가의 대답을 기다렸다. “실제로 있습니다. 마약의 이름을 제가 ‘모르’로 바꾸었을 뿐입니다.” 나는 첫 번째 질문과 달리 호의를 가지고 대응했다. “‘모르’라는 단어가 한국어 발음으로도 마약에 어울립니다.” “프랑스어가 유창하시니, ‘모르’의 뜻을 아시지요? ‘모르’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대담이 제법 순조로워진 것 같아 나는 자신있게 덧붙였다. “마약 중독은 말 그대로 인간을 ‘종’의 상태로 만들죠.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살하니까요. 그렇다면 작가님은 인간을 종처럼 묶어 놓는 가장 강력한 것이 마약이라고 보신 것인지요?” “대담자님은 마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를 종으로 묶을 만큼 강력한 것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문직에 경제적으로나 세상 그 어느 쪽으로 견주어 보아도 나는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에 있었다. “저는 마약을 해본 적이 없어서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요. 인간을 가장 비인간적으로 만들 물건이 마약이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만, 저를 종으로 묶을 수 있는 대상을 아직 만나지 못했지요.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을 ‘종’으로 만드는 가장 강력한 것은 모르입니다. 죽음이지요.” “…….” “대담자님도 이 포박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순간, 출판사에서 온 편집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모습이 영상에 올라왔다. 얼마 전 시골에 사시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은 생각이 났다. 봉투에 조의금을 넣어준 것으로 나는 죽음의 예의를 지켰다. 녹화 현장의 사람들이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다들 귀를 곤두세우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죽음의 종이라는 작가의 발언에 대한 내 반응이 궁금할 것이다. 그 말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 또한 죽음의 종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작가도 자기가 죽음의 종이라고 선언한 셈이다. 이 침묵을 깨뜨릴 말을 찾고 싶었지만, 더 강력한 말을 투척한 것은 화면 속의 작가였다. “우리는 모두 썩어갈 것입니다.” 대서양을 건너 날아온 비수는 정확하게 나를 관통했다. 갑작스럽게 몸의 떨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연은 아니었다. 영원히 살 것이라 여기진 않았지만, 여태 죽음이 나를 종으로 부리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인류가 처음 인간의 죽음을 접했을 때 느꼈을 법한 놀라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일었다. 처음으로 ‘죽음’의 실체가 온몸으로 감지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구더기와 함께 썩어갈 것이다. 죽음의 비수를 쏘아준 인간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항하는 공갈 아기를 내세웠군요.” “공갈 아기?” “가짜 생명요. 관 속의 죽은 여자에게서 악당들이 살아 있는 아기를 안고 나오지요?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공갈이지요.” “공갈 아기라는 표현이 매우 흥미롭지만 실제로 한국에서 사용하는 표현인지 궁금합니다. 상상 임신은 있겠지요. 세상에 모든 종류의 공갈이 가능할지라도 결코 생명은 공갈이 없습니다.” 두 번째 질문이 다시 나의 덫이 될 조짐을 보였다. 생명은 확실히 공갈이 없다! 그 사실은 나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내가 대담에서 계속 헤매는 이유가 작가가 걸어놓은 표지 문구를 아직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데 기인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통해 모순 문구를 풀어낼 힌트를 조금 얻긴 했다.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그러니까 ‘(죽음의)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는 뜻이 함축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죽음의 종이 아닌 생명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 누가 ) 값을 치르고 (나를) 사신 것인지 마저 풀어야만 했다. 순간적인 호기심에 사로잡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을 무시하고 싶은 강력한 욕망 또한 동시에 일어났다. 작가가 책 표지의 문구로 계속 나를 함정에 빠뜨리지 않도록, 문득 떠오르는 프랑스 속담을 임기응변으로 내뱉었다. “L’habit ne fait pas le moine.” 직역하면 ‘옷이 성직자를 만들지는 않는다’였다. 책과 관련해서는 ‘표지가 반드시 책 내용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이었다. 내가 농담한다고 생각했는지 부드러운 얼굴선을 가진 작가가 웃음을 호탕하게 터뜨렸다. “프랑스 속담에는 이런 것도 있지요. ‘고양이는 고양이라고 말해야 한다.’” 말은 바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반격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 부분 혹은 전체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2024.09.02 09:00:00
    종의 기원  <6회>
  • 웹소설 종의기원
    5. 종의 순서 일의 목표나 방향은 우두머리가 정한다. 여태 그것은 단테의 역할이었다. 오늘은 달랐다. 좀 전에, 생명의 포대기를 안은 자가 서슴없이 일당의 방향을 결정했다. “메종으로 가. 메종!” 홉이 그렇게 소리쳤을 때, 단테는 명령의 서열이 한순간에 뒤집힌 것을 알았다. 홉의 결정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어디로 가야 하는지 미리 정해둔 사람 같았다. 홉을 무시하던 로깡도 아무 말이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앤드류는 홉의 권위에 순종하듯이 물었다. “홉의 집으로?” 메종은 집이라는 뜻이었다. 홉의 집에 가면 우유며 아기 옷들이 있을 테니 좋은 선택이었다. 단테는 어림없다고 생각했다. 홉이 일당을 자신의 집으로 끌어들일 사람이 아니었다. 여태 그런 여지를 보인 적도 없었고, 특히 아이가 생기고 난 뒤로 더욱 경계했다. 앤드류의 질문에 놀란 것은 도리어 홉이었다. 홉은 이전의 단테처럼 단호하게 명령했다. “대문자!” 대문자 집(Maison)은 일당만의 은어였다. ‘푸른 감자의 집’을 약칭해서 메종이라 불렀다. 푸른 감자를 수확하는 집이었다. 홉이 하필 그곳을 선택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다른 곳이어야 할 것 같은데, 단테는 다른 곳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죽은 자의 뼈를 수송할 때는 목적지가 분명했다. 하지만 아기의 생명을 구할 미지의 방향은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죽음과 관련된 결정과 달리, 생명과 관련된 결정은 더없이 막막했다. 홉이 단테의 마음을 꿰뚫듯 말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순간 갈림길이 나타났고, 앤드류는 메종의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푸른 감자의 집으로! 잘라보면 푸른색이 도는 감자들이었다. 땅의 특징 때문에 그런 색깔을 띠었다. 최근에는 보라색이나 노란색 감자도 시장에서 볼 수 있지만, 단테의 형이 푸른색 감자를 처음 수확했을 때는 팔 수 없는 종이었다. 그런데 푸른 감자를 먹으면 약한 몸이 빠르게 회복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근처에서 찾는 사람들이 생겼다. 일당은 겉으로는 푸른 감자를 키우고 수확하는 평범한 일꾼들이었다. 단테는 아기를 ‘푸른 감자의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 최선인지 확신이 없었다. 그 ‘메종’이야말로 아기에게는 더없이 위험한 곳이었다. “여기 잠깐 세워 줘!” 저만치 주유소와 잡화점이 보이는 곳에서 홉이 갑자기 요구했다. 무슨 일인지 다들 긴장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테도 왜 그러냐고 물을 여유가 없었다. 차를 세우자마자, 홉은 아기를 로깡에게 맡기고 서둘러 내렸다. 차의 앞문을 열더니, 단테에게 아까 자신이 바닥에 던졌던 돈을 돌려달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술수인가 싶어 단테는 얼굴을 험악하게 찡그렸다. 마치 우두머리가 총무에게 돈을 정산하라는 식이었다. “아기에게 먹일 것을 사야 해요. 빨리 서둘러요.” 단테는 그제야 홉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급하게 돈을 주섬주섬 꺼냈다. 홉이 바닥에 던져 꾸겨진 지폐 두 장과 자신의 지갑에서 제법 큰 금액의 몇 장을 꺼내 주었다. “단테 씨! 자주 올 수 없을 테니 필요한 것을 한꺼번에 사도록 할게요. 물건을 가지고 나오면 바로 싣고 갈 수 있도록 잡화점 뒤쪽에 차를 세워두도록 하세요.” 홉은 단테에게 지시하고, 아기용품을 사기 위해 달려갔다. 단테가 그의 달리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앤드류가 말을 걸었다. “언제 잡화점 뒤쪽으로 이동해야 하나요?” 홉이 사라지자 기존의 서열이 다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기다려!” 단테는 속으로 언제부터 서열이 뒤집혔을까를 생각했다. 10분 전만 해도 홉은 오늘 받은 일당(日當)을 던지고 일당(一黨)에서 달아나던 도망자였다. 그런데 달아나던 사람을 중간에서 태우고 아기를 안겼을 때, 그는 달라졌다. 아기 포대기를 품에 안자 그는 여태 보이지 않던 결단력과 행동력을 발휘했다. 홉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앤드류와 로깡도 아기를 발견할 때부터 달라졌다. 그들도 단테를 두고 먼저 아기를 안고 달아났다. 그렇게 발이 빠른 놈들인 줄을 처음 알았다. ‘죽은 자를 위한 예의의 시간’에서 관의 마지막 뒷정리를 단테가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죽음의 덮개를 닫는 것은 서열상 꼴찌가 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홉 대신 단테가 닫았다. 그때부터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종의 순서가 달라졌다. “이제 차를 이동시켜.” 앤드류는 주유소를 지나 잡화점 뒷문 쪽에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게으르고 느려터진 앤드류의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 이전 앤드류는 무감각하고 자기 의견을 내는 적이 좀체 없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표현할 줄도 몰랐다. 한데, 아기의 울음을 들었다고 말할 때부터 눈빛이 달라졌다. 살아 있는 아기를 버려두고 갈 것이냐고 버틸 때 그는 변했다. 그는 죽은 자의 뼈가 아니라 살아 있는 아기를 안고 나오는 시간을 지나왔다. 자신의 의견이 단테에게 먹힌 아주 강렬한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꼬박꼬박 지시해주어야만 했던 이동 경로를 스스로 결정하기 시작했고, 그는 달라졌다. “홉이 나타났어요.” 앤드류가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뒤쪽의 로깡은 아기를 안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단테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로깡에게 몸을 낮추라고 말하고, 자신도 그렇게 했다. 앤드류가 서둘러 홉이 사 온 물건들을 받아서 뒤쪽에 싣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집이 제법 날쌔게 움직이는 모습이 신이 난 사람 같았다. 다시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급하게 시동을 걸었다. 뒤쪽에, 홉이 아기를 건네받는 모습이 거울에 비췄다. 홉은 30초만 기다리라고 했다.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쉬운 위치인데, 홉은 포기하지 않았다. 로깡은 홉이 사 온 물건들을 이리저리 들춰보며 대기 상태였다. 홉이 요구한 이 절체절명의 30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테는 깨달았다. 형의 삶과 죽음의 갈림길의 몇 분과 같은 시간일 것이다. 단테는 아기에게 뭔가를 먹이는 듯했다. 잠시 후, 다시 달리라고 지시한 것은 홉이었다. 단테는 혼란한 마음에 뒤쪽을 돌아보지 않고, 가슴에 걸리는 일을 생각했다. 무엇보다 지금 단테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구하지 못한 죽은 자의 뼈였다.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 실패한 일을 복구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지금 새로운 시체를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공작을 새로 꾸미려면 최소한 한 달 이상 필요했고, 그것도 극히 조심해야 했다. 더구나 교통사고로 부서진 시체를 구하는 일은 운이 극히 좋아야 했다. 슬그머니 아기의 엄마가 떠올랐다. 지금쯤 단단하게 못질을 당한 관이 묘지로 가고 있을 터였다. 푸른 감자가 심긴 들판 가운데 길로 앤드류가 차를 몰아 들어가고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 부분 혹은 전체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2024.08.26 09:00:00
    종의 기원  <5회>
  • 웹소설 종의기원
    4. 두 종류의 다급함 단테가 아기를 데려가자고 말하자, 믿기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게으르고 굼뜬 로깡과 앤드류가 거짓말처럼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죽은 자의 뼈를 담기 위해 가져온 비닐 시트를 맞잡고 뒤집었다. 마치 의사처럼 죽은 여자와 분리한 아기를 들어 올렸다. 뒤집힌 부드러운 시트 쪽에 아기를 감쌌다. 그리고 단테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뒤쪽 출구를 향해 달렸다. 명령도 복종도 필요 없었다. 두 놈은 관도 제대로 덮지 않은 채 포대기를 안고 뒷문으로 사라졌다. 여느 때 홉이 하던 마무리를 오늘은 단테가 해야만 했다. 어떠한 범죄의 단서도 남기지 않아야만 했다. ‘죽은 자를 위한 예의의 시간’의 마지막 30초를 두고 단테는 빠져나왔다. 이제부터 되도록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아야만 했다. 외진 곳이라 사람들의 왕래가 드물지만, 일찍 도착한 죽음의 봉사자가 있을 수도 있었다. 이 장소를 배회하는 자는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로깡과 앤드류는 차가 있는 곳으로 줄달음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묘를 파고 인골을 구할 때는 밤에 주로 움직였기에 사람의 눈을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에 짐승들의 눈이 따라 다녔다. 사람의 시신 냄새를 짐승들은 기차게 알아챘다. 일행이 서둘러 뼈를 채취하고 나면, 남은 시신을 동물들이 처리하는 모양이었다. 동물들이 협조자이면서도 경쟁자였다. 여태 단테 일당이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도 파묘가 동물들의 행위로 매번 결론이 났기 때문이었다. 꼬리가 길면 밟힐 수 있다는 느낌이 왔을 때, 단테는 인골(人骨) 도둑질의 장소를 묘지가 아니라 ‘죽은 자의 예의의 시간’으로 바꿨다. 당분간 묘지 부근에는 얼씬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일부러 천천히 걸어 도로까지 왔다. 그때부터 단테는 미친개처럼 맹렬하게 달렸다. 다급함이 단테를 몰아세웠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다른 작업 때와 다른 다급함이었다. 이전의 다급함은 누구에게 쫓기는 도망자의 것이었다. 뒤에 누가 보고 있는지, 경찰이 잡으러 오는 것은 아닌지, 알 수 없는 분노나 죄의식에서 달아나는 다급함이었다. 오늘의 다급함은 반대로 추격자의 그것이었다. 따라잡으면 귀한 것을 잃지 않을 조급함이었다. 앞서간 로깡과 앤드류를 따라잡아야 했다. 그들이 안고 간 포대기를 따라잡아야 했다. 그 안에 있는 아기를 잃지 않아야 했다. 아기의 생명을 붙잡아야 했다. 살려야 했다. 손톱자국처럼 열렸던 아기의 한쪽 실눈! 단테를 향해 열렸던 그 실눈의 호소. 그런 간절한 실눈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단테는 왜 눈물이 날 정도로 다급한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런 눈을 형에게서 보았다. 마지막 스르르 감기던 한쪽 눈을 단테는 보았다.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오로지 세상 전부처럼 의지하던 형, 항상 친구 같던 형, 그의 유일한 혈육이 죽어가던 순간에 열려 있던 실눈, 세상에 혼자 남겨질 동생을 한순간이라도 더 보려고 애타게 열려 있던 형의 눈과 아기의 눈이 닮아 있었다. 그때처럼 단테는 마음이 초조하고 다급했다. 드디어 차를 숨겨놓은 곳까지 왔다. 그런데 차가 보이지 않았다. 보스인 단테를 버리고 이 망할 두 놈이 달아나버린 모양이었다. 단테는 그들이 사라졌을 방향으로 도로변을 달렸다. 한참 달려가자 뒤에서 빵빵거리며 차가 나타났다. 단테는 욕을 하며 차에 올랐다. 운전대를 잡은 앤드류가 말했다. “단테 씨를 태우려고 갔는데, 우리를 보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어요. 다시 돌려서 온 것입니다.” 단테는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깡이 포대기를 안은 모습이 보였다. 생소하면서도 안도가 되었다. 형을 싣고 병원으로 달려갈 때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다행히 로깡과 앤드류가 곁에 있었다. 처음으로 그들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살아 있어?’ 말없이 표정으로 물었지만, 로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른다는 뜻인지 죽었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단테가 앞쪽으로 몸을 바로잡자, 운전석의 앤드류가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 “어디로 갈지 방향을 정해야 해요.” “홉의 집으로 가자.” 뒷좌석의 로깡이 단테가 들리도록 큰소리를 쳤다. “홉을 혼쭐내러 갈 생각이세요? 아기부터 어떻게 해봐요.” “아기를 살리러 홉에게 가자는 거야.” “홉은 아기를 보자마자 도망가버렸어요. 우리가 가면, 우리가 아기를 데려가면 경찰에 신고할 놈이에요.” “홉에게 가야만 해. 그는 아기를 키워봤잖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가 알 거야.” “그의 여자가 거절할 거예요. 훔친 아기를 도와줄 리가 없어요.” “아니야. 홉이 달아난 것은 죽은 여자와 아기에 대한 연민 때문에 그랬을 거야. 너희들도 돈이 되는 여자가 아니라 아기를 데리고 나왔잖아.” “여자를 포기했다고 우리도 홉처럼 돈을 돌려줘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때 앤드류가 로깡의 흥분된 저항을 끊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중에 홉의 집이 가장 가깝기는 해요.” “더 빨리 달려!” 형을 싣고 달릴 때 느꼈던 절박함이 그의 온몸을 다시 감쌌다. 조금만 더 일찍 병원에 도착했으면 형을 살릴 수도 있었다고 들었다. 단 몇 분에 삶과 죽음의 순간이 갈렸다고 했다. 단테는 홉에게 연락을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작업 중 휴대전화 사용은 금지조항이었다. 어쩔 수 없을 때 ‘푸른 감자’를 사용했다. 푸른 감자는 그들만이 아는 암호였다. 만약 발각되어도 마약 제조를 숨길 수 있도록 만든 암호였다. 휴대전화를 꺼내려던 단테의 눈앞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분명 익숙한 모습이었다. 차가 앞으로 달릴수록, … 분명했다. 홉이다! 앤드류가 단테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단테는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홉도 차를 분명 알아보았지만 달아나지 않았다. 앤드류가 차를 세우자, 홉은 당연하다는 듯이 뒷좌석으로 올라탔다. 홉이 달아나다가 우연히 따라잡힌 것인지, 홉이 아예 일행을 기다린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누구도 홉을 탓하지 않았다. 홉도 변명하지 않았다. “아기를 좀 돌봐 줘.” 단테는 일부러 무심한 듯 말했다. 홉은 흠칫했지만, 상황을 금방 파악했다. 네 남자 중에 아기를 키워본 것은 홉밖에 없었다. 홉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아기를 이리저리 신중하게 들여다보았다. 급하게 물병의 물을 수건에 적혀 아기의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로깡도 아기의 온몸을 닦는 그를 도왔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달리는 차 안은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병원처럼 엄숙했다. 마침내 홉이 아기를 로깡에게서 자신의 품으로 옮겨 안았다. 단테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앤드류는 기쁨의 나팔처럼 차의 경적을 빵빵 울렸다. 그때 홉이 마치 우두머리처럼 명령했다. “메종으로 가. 메종!”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 부분 혹은 전체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2024.08.12 09:00:00
    종의 기원  <4회>
  • 웹소설 종의기원
    3. 나무관 속의 아기 “분명 관속의 아기가 운 거지?” “살아 있나?” 낡은 나무관 옆에 서 있던 두 명의 악당은 동시에 말을 뱉었다. 우두머리 단테는 홉이 달아나면서 던진 돈을 줍느라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관 속의 가냘픈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단테는 주운 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후 관을 깊숙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두 놈을 발견했다. ‘죽은 여자에게 반한 것이야. 쓸모없는 놈들!’ 단테는 성실한 홉이 가버리고 무능한 두 놈이 남은 것이 속상했다. 같이 동거하던 여자가 임신한 후 홉은 일행에 합류했다. 홉은 아기가 생기자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성실하게 마약 제조일에 동참했다. 그런데 관속에 들어 있는 모자(母子)를 보고 달아나버렸다. 자신의 아기를 먹여 키우기 위해 벌어야만 하는 돈도 던지고 가버렸다. 충격을 받은 것은 이해하지만, 그런 결정을 단숨에 하게 만든 홉의 내면의 무엇이 궁금했다. 다가갈 때까지, 멍청한 두 놈은 여전히 나무관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단테는 큰소리로 야단을 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두 놈은 여자가 아니라 황토로 빚은 듯한 물컹한 아기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기의 감은 두 눈의 단아함과 또렷한 입술의 윤곽이 신비하여 멈칫했다. 키가 큰 로깡이 단테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기가 살아 있어요.” “지금이 농담할 때야? 아기를 핑계 삼아 홉처럼 일하기가 싫은 거지. 여자와 아기, 두 사람의 뼈를 수거하니 돈을 더 달라는 거야?” 그 순간이었다. 단테는 관 속 아기가 한쪽 실눈을 가늘게 떠는 것을 보았다. 얇은 눈꺼풀이 세상의 무게를 견디며 미미하게 열리는 믿기 어려운 순간과 맞닥뜨렸다. 몇 밀리미터 열린 실눈이 온몸의 에너지로 단테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두 놈은 실눈의 변화를 보지 못한 듯했다. “단테 씨! 우리가 아기 울음소리를 들었어요.” 아기는 나머지 한 눈을 뜰 여력은 없어 보였다. 단테는 시계를 보았다.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나무관에 못을 치기 전 죽은 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30분이었다. 세상의 미련이나 고통을 놓고 정리하라는 ‘죽은 자를 위한 예의의 시간’이었다. 세상과의 인연을 못질로 단단히 닫아버리기 전에 베푸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에는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상례(喪禮)였다. 단테는 그 예의의 시간을 예외로 샀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일을 치를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시간이었다. 서로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사람들과 맞닥뜨리거나 얼굴을 보면 안 되는 계약이었다. 아기의 열린 실눈과 단테의 시선이 다시 조우했다. “빨리 뼈들을 뜯어서 담아!” “누구의 뼈를요?” 이 질문에 단테는 잠시 망설였다. “죽은 여자의 뼈! 여자의 뼈를 샀으니 여자 것만 가져가자.” 두 놈은 동시에 단테를 바라보았다. “아기는요?” “ …… .” “살아 있는 아기는요?” “살아 있을 리 없어. 죽은 직후에 사후 경직 현상 때문에 … 꿈틀거릴 수 있어.” 아기가 여전히 단테의 시선을 붙잡고 있어서 더듬거렸다. 두 놈은 자꾸 엉뚱한 소리로 버텼다. “울음소리를 분명히 들었어요.” 평소 미련하기도 하고 소심해서 자신의 의견이 별로 없는 앤드류까지 나섰다. 단테는 시계를 보고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손톱자국처럼 열린 실눈이 온 생명을 다해 단테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관속에서 생명이 태어날 수는 없었다. 죽은 여자의 몸속에서, 죽음 속에서 생명이 뚫고 나올 수 없었다. “아니라니까!” 단테가 워낙 강하게 말하자 그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뚱뚱이 앤드류는 가만히 있었지만, 로깡은 포기한 기색 없이 관 안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기의 울음을 토해내게 하려는 듯 작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건드려보기까지 했다. “이번에 인골을 가져가지 못하면 다음 달 제공할 마약 ‘모르’의 제조 자체가 불가능해. 굶어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하나라도 건져.” 인골 없이 마약을 제조할 수는 있어도 가짜 약이었다. 인골을 빼고 제조한 ‘모르’는 효능이 거의 없었다. 인골 자체에 어떤 효과가 있다기보다 촉진제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다른 마약보다 효능이 높은 ‘모르’는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모르’는 고급 손님을 상대로 한 마약이었다. 가짜 마약으로 신용을 지킬 수는 없었다. 단테는 마음이 급했다. “5분 안에 빨리 나가야만 해. 지금 나가지 않으면 우리 모습을 들키고 말 거야. 장례사가 들이닥치면 끝장이야.” 순간, 로깡인지 앤드류인지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했다. “단테 씨! 아이를 관 안에 넣은 채 못질을 하게 내버려 둘 거예요?” “그럼 어쩌라는 거야?” 망치를 든 사람들이 곧 들이닥칠 것이다. 나무관을 못질하여 봉해버릴 죽음의 봉사자들이 올 것이다. 최근 마약에 절은 시신이 많아서 동물들의 파묘가 심해졌다. 그들은 과거보다 더 완벽하게 못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기의 한쪽 실눈이 견디지 못해 스르르 닫히는 순간이었다. 단테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아, 안 돼! 죽은 여자는 두고 … 아기를 데려가자, 빨리!”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 부분 혹은 전체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2024.08.05 09:00:00
    종의 기원  <3회>
  • 웹소설 종의기원
    2. 세상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 김아리랑 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다음 날, 나는 예약한 병원에 가서 코로나 백신 2차 접종을 받았다. 1차에서 아무런 부작용이 없었기에, 2차에서는 방심하고 말았다. 전날 저녁부터 그날 새벽까지 400페이지에 달하는 『인공낙원의 문』을 읽으며 대담 질문을 뽑았고, 아침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병원에서 백신을 접종했고, 먹어두면 좋다던 타이레놀도 찬장 어디 뒀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생략하고 말았다. 갑자기, 온몸에 툭툭 알레르기 증상이 솟고 끙끙 앓기 시작했다. 하루 지나면 가라앉는다는 항간의 경험을 철석같이 믿고 버텼다. 하지만 다음 날은 불의 도가니에 들어앉은 것처럼 온몸에 열이 올랐다. 병원을 방문해서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몇 가지 검사를 했지만, 별 이상은 없다고 했다. 주는 약을 삼키고 또 하루가 지나갔다. 아무래도 새 대담자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다른 이를 대신한 대담자였기에 국제예술창작재단도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여러 나라를 떠돌았던 나는 이런 상황에서 문화적 외교 관계를 무너뜨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 덕분에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도 많아 자연스럽게 습득한 외국어가 여럿 되었고, 그중에 프랑스어도 있었다. 막 번역 출간된 프랑스 책을 사서 읽고 프랑스 작가와 토론할 수 있을 대담자를 ‘반나절 만에’ 찾기에는 내가 봐도 너무 늦었다. 아리랑 씨 말대로 “지금 상황에서 이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한참 코로나 팬데믹이 기승을 부리던 때라 국제 도서전은 방역 수칙 때문에 온라인 축제를 벌인다고 했다. 그래서 영상으로 대담을 먼저 찍게 되어, 촬영을 위해 최소한의 사람들만이 모여 있었다. 아리랑 씨는 출장을 갔다며 창작재단 측에서는 노랑머리 여자 직원이 왔고, 영상 기술진, 책을 번역 출간한 출판사 편집자, 그리고 몇 명의 취재진이 모여 있었다. 대담은 영상 편집 후에 서울 국제 도서전 참가 나라들에 송출된다고 했다. 대담 화면에는 프랑스 작가의 모습은 올라오기 전이었고, 내 모습이 막 잡힌 것이 보였다. 어, 나도 모르게 작은 소리를 뱉어냈다. 미용사가 머리를 과도하게 매만져 평소와 다른 모습이기도 했지만, 백신으로 퉁퉁 부어서인지 영상에 올라온 나를 내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못생겨져 버린 모습이 속상해서 못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영상 속의 나는 분명 내가 아니었다. 내가 입을 열면 영상 속의 내가 흉측하게 일그러지며 말을 따라 했다. 그때, 화면에 프랑스 작가가 솟아올랐다. 시차 때문인지 한동안 영상이 흔들렸고, 작가는 이쪽의 상황을 모르는지 스스로 마이크 테스트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와이셔츠나 넥타이 없이 느슨한 모습으로 긴장감 없이 자기 행동에 몰두했다. 작품 속에서 보여주던 환각의 도시와 잔인하고 죄의식이 없는 마약 제조자들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풀어낸 작가라기에는 너무 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가 우리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는 동양식으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프랑스식으로 “봉주르~!”로 시작하는 인사말을 했다. 기술진이 시작하라는 사인을 주었다. 나는 프랑스 작가에게 자신을 소개해 달라고 했고, 나는 들은 대로 통역했다. 그리고 나를 소개해야만 했다. 설핏 내가 아닌 내가 보였다. 모두 내 입을 바라보는 다급한 상황에,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말았다. 현장에서 대담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약간 움찔하는 느낌이었지만, 프랑스 작가는 호감의 웃음기를 띄면서 말했다. “내가 누구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당신은 아픈 대담자를 대신해서 저를 위해 나와주신 고마운 분입니다. 이런 변화가 책을 읽을 한국 독자와 우리 두 사람의 인생에 어떤 변수가 될지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이 난센스 같은 대화에 현장 사람들은 귀를 기울인 모습이었다. 문학적인 토론이라는 것이 모호하면 할수록 시적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대로 좋은 서막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우선 표지 문구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나는 저급한 역설적인 표지 문구로 먼저 그를 건드리고 싶었다. 프랑스 작가는 예상했다는 듯이 간단하게 대응했다. 표지 문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대응 문구를 같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 p.202에 대응 문구가 있다고 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은 /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가 말한 문장을 듣자마자 숨이 거칠게 올라왔다. 우선 그 문장을 읽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표지 문구의 대응 문장이라면 당연히 기억해야 한다. 기억하지 못해도 들으면 기억나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제대로 독서했다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코로나 백신의 부작용으로 기억력이 약해졌거나, 세계적인 작가의 언어 감각 앞에서 오래간만에 사용하는 프랑스어가 삐걱거려 내심 당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주르륵 빠르게 읽어 치운 허술한 독서의 구멍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프랑스 작가는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들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제가 고백하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세상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에서 인용한 것이니까요.” 작가가 말하는 문구가 기억나지 않는데, 문구의 출처를 아는 것은 가능치 않은 일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이라는데 그가 책의 제목까지 알려주면서 나의 자존심을 뭉개지 않도록, 나는 서둘러 아는 척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말한 두 번째 문장이 표지 문구와 정반대의 뜻을 담고 있음을 깨달았다. ‘오만하구나.’ 속으로 그런 생각이 올라오자 차츰 정신이 돌아왔다. 표지 문구에서도 반어적인 표현으로 독자를 우롱하더니, 그 문장과 전혀 반대되는 문장으로 다시 독자를 우롱하려고 했다. 지혜로운 대담자라면 작가의 오만쯤은 쉽게 누그러뜨릴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는군요.” 그는 은인에게 하듯 친절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의 종이 되지 않아야 모든 이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의 비밀이 제가 책에 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인용한 책을 모르고 대담을 계속 이어가다가는 실수를 저지르겠다는 우려가 설핏 머릿속을 스쳤다. “저는 알고 있지만, 혹여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 책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런데 그때, 프랑스 작가는 천사를 보았거나 악마를 보았거나 무엇인가 본 모양이었다. 작가의 얼굴에서 난감함과 호기심이 섞인 표정이 대서양을 건너 나에게로 전달되었다. 나는 그때 약 때문인지 텔레파시 주파수가 매우 높게 올라가 있어서 그의 내면에서 느끼는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곤 했다. 한국의 영상 기술자가 나를 흘끗 쳐다보았고, 김아리랑 씨 대신에 온 국제예술창작재단의 노랑머리 직원이 급하게 종이에 무엇인가를 써서 허공에 들고 내 쪽을 향하여 흔들었다. 두 사람의 거리 때문인지 열 때문인지 그 글자가 선명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한숨 같은 탄성이 전해졌다. 그 책이 무엇인지, 나만 빼고 모두가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 부분 혹은 전체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2024.07.29 09:00:00
    종의 기원  <2회>
  • 웹소설 종의기원
    김다은 작가는 첫 소설작품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습니다. 이후 장편소설 ‘바르샤바의 열한 번째 의자’ ‘금지된 정원’ ‘모반의 연애편지’ ‘훈민정음의 비밀’, 창작집 ‘쥐식인 블루스’ ‘위험한 상상’ 등을 비롯해 문화칼럼집 ‘발칙한 신조어와 문화현상’ ‘너는 무엇을 하면 가장 행복하니’, 서간집 ‘작가들의 연애편지’ ‘작가들의 우정편지’, 문학이론서 ‘영감의 글쓰기’ 등을 출간했습니다. 다수의 작품이 번역되어 해외에 소개됐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 청송 객주 문학관의 작가 레지던시, 그리고 정선 여량면에서 주최한 아우라지 작가 레지던시 문학관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와 불어불문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 프롤로그 이 소설은 자신이 겪은 가장 치욕스러운 일을 통해 구원받은 이야기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잊을 수 없는 치욕스러운 일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과거의 치욕을 아직 치워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다. 그 감정이 여전히 남아 울컥 마음의 밑바닥에서 치솟아 올라오는, 떨쳐 버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나쁜 꿈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치욕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지, 반대로 삶의 영예처럼 여겼던 일이 나를 어떻게 롤러코스터처럼 솟구치게 했다가 순식간에 나락으로 내동댕이쳤는지를 전하고 싶다. 내가 느꼈던 치욕도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명예로운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1.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국제예술창작재단에서 전화가 왔다. 김아리랑 팀장이라고 했다. 아리랑이라는 이름을 듣고 나는 단번에 그녀를 기억해 냈다. 그녀가 강하게 각인된 이유는 ‘아리랑’이라는 독특한 이름과 언젠가 한 대사관 파티에서의 과한 술주정이 매우 천진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껏 멋을 내고 도도하게 잘난 척하는 무리 속에서 마치 술에 취한 시골 아낙처럼 혀 꼬인 소리로 사람들을 쥐락펴락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여 프랑스 대사관 행사에 단골로 오는 약간 귀여운 주정뱅이 정도로 알았는 데, 그녀는 국제예술창작재단의 유럽지역 문학 담당자였다. 사람에 관한 인상이나 추측이 그렇게 빗나간 적이 살면서 처음이었다. 아마 그 빗나감이 내가 겪을 사건의 전조였던 모양이다. 그 귀여운 술주정뱅이가 아니었으면, 사람의 마음을 턱 놓게 만드는 그녀의 대화술이 아니었으면 일이 그렇게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경계심 없이 그쪽의 용건에 귀를 기울였다.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 도서전에서 프랑스 작가와의 대담을 기획했는데, 한국인 대담자가 코로나에 감염되어 갑자기 격리되었다 했다. 행사가 3일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긴급전화라 했다. 대담의 논제가 될 프랑스 작가의 작품은 한국에 막 번역 출간된 『인공낙원의 문』이라 했다. 책을 구해 읽을 시간이 충분치 않다거나 코로나 2차 접종을 앞둔 사실을 말하기 직전에, 아리랑 씨는 “지금 상황에서 이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 당신입니다”라고 말했다. 귀여운 주정뱅이에게서 정중한 부탁을 받자, 언어 마법에 걸렸던 모양이다. 환각에서 깨듯 정신을 차리고 나니 승낙한 후였다. 전화를 끊고 나니,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결정이 묘하게 미심쩍었다. 자주적인 결정이었다고 합리화하기 위해, 내심 독서가 뜸해진 시기에 책이나 읽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그녀의 화술에 넘어가 무심코 한 결정은 아리랑 고갯길이 아니라, 이렇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찾아 먼 길을 떠나게 만든 것이다. 책을 구하는 데 시간을 잃지 않도록 재단 측에서 『인공낙원의 문』을 택배로 보내주었다. 막 출간된 따끈한 책을 펼치고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은 진지하게 독서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책 커버의 문구가 눈에 띄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표지 문구에는 작가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을 담는다. 값을 주고 누가 누구를 샀단 말인가. 인간을 값을 주고 샀다면 그것은 고대 시대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값을 주고 샀으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는 문장은 매우 모순적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비틀어 쓴 반어법에 지나지 않았다. 『종의 기원』이 생물학적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을 의미하고, 사람들에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러기에는 표지 문구에 자유의 본질을 상징하는 무엇인가가 빠져 있었다. 대담의 첫 질문으로 이 모순적인 문장을 건드리기 위해 메모장에 적었다. 소설류는 이래서 읽을 가치가 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두 번 읽을 시간이 없을 것이다. 아예 첫 번째 독서로 세계적인 작가와의 대담에 걸맞은 질문들을 뽑아내야 했다. 장편 소설 『인공낙원의 문』의 배경은 세계지도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특정 나라가 아니었다. 도입부에 묘사된 소설 시공간이 살아있는 시체들의 도시처럼 보여서 좀비 이야기인가 싶었다. 그런데 ‘인공낙원’은 마약의 환각에 의해 들어갈 수 있는 미지 세계의 기괴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좀비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고 아무도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소설의 중심 인물은 마약 제조자들이었다. ‘모르’라는 이름의 마약은 사람의 뼛가루가 들어가야만 효능이 있어서, 그들은 인간의 뼈를 구할 수 있으면 무엇이든지 했다. 몰래 무덤을 파내고 덮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갈수록 대담해진 일당은 무덤을 파고 덮는 번잡하고 위험한 과정을 생략하고 싶어졌다. 돈을 주고 장의사(葬儀社)에게서 뼈를 빼돌리기로 했다. 교통사고로 몸이 손상된 사체의 뼈들이 가장 안전한 상품이었다. 장의사가 뼈를 빼돌려 악당들에게 넘겨주거나 묘지로 이동하기 전에 필요한 부위의 뼈를 적출하기로 했다. 그날도 교통사고로 죽은 한 여인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 몰래 관을 열었다. 일당은 소스라쳤다. 죽은 여자만 들어 있어야 하는 관 안에 갓난아기가 탯줄도 끊지 못한 채 어머니의 몸에 매달려 있었다. 어찌 임신한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입관했는지 경악스러웠다. 분명 의사가 여자의 죽음을 확인했고, 장의사도 여자의 죽음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가 죽은 후에 아이가 출생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아이가 죽은 엄마의 몸에서 스스로 빠져나왔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여자의 사망을 선고한 가짜 의사에게 생명을 경원시한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한동안 떠들다가, 악당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고 스스로 풀이 죽었다. 여자의 시체를 빼돌린 브로커도 경찰에 넘겨야 한다고 떠들다가 잠잠해졌다. 어머니의 몸에서 죽은 후에 분만된 사산아는 사체 유기죄의 사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일당의 우두머리가 아는 척을 했다. 그러자 일당은, 가족도 없고,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여자인 것 같으니, 문제를 크게 만들지 말자고 의견을 모았다. 소설 도입부를 읽을 때 만해도, 나는 기존 좀비와 전혀 다른, 즉 죽어서 돌아다니는 좀비가 아니라, 마약 때문에 살아도 죽어 있는 사람들의 도시를 설정한 것에 신선함을 느꼈다. 치밀하게 직조된 악의 그물망을 따라 읽을 때만 해도, 작가의 문학적인 재능에도 조금 감탄이 되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독자를 건드리기 위해 작가가 놓은 교묘한 덫을 발견하고는 기분이 나빠졌다. 여자의 뼈는 빼돌린다 해도 아이를 어찌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부분부터였다. 일당은 아무렇지 않게 아이까지 데려가자는 결론을 내린다. 한 사람의 돈으로 두 사람의 뼈를 가지게 된 것이 이득이라고까지 했다. 나는 갑자기 작가가 놓은 덫이 너무 허술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작가와의 대담에서 흔히 하는 질문들은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냐, 혹은 영감을 어디서 얻었느냐 등 정해진 루틴이 있다. 하지만 나는 죄의식 없는 인간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고 싶어졌다. 이 질문을 뽑으면서, 나는 스스로 당혹스러워졌다. 도덕이 선에 관한 윤리라면, 문학은 인간의 갈등과 악에 관한 철학이다. 그러므로 소설이 악한 주인공을 선호한다고 해서 탓할 일은 아니다. 문학은 그런 악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들여다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재판장이 왜 살인했느냐고 묻자, 주인공 뫼르쏘는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라고 자신을 변론한다. 그 소설은 세계적인 작품의 반열에 올라 있다. 그런데, 악당 중의 한 명이 갑작스럽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는 처음에 모자(母子)의 관을 도로 덮자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었지만, 갑자기 무슨 쇼냐는 일당의 면박을 받는다. 그는 다시 도덕심에 호소했고, 동료들은 요즘 벌이가 좀 괜찮아지니 배가 부르냐고 콧방귀를 뀐다. 그는 망설이다가 받았던 돈을 땅에 던지고 줄행랑을 쳤다. 동료들은 이 배반자를 잡아 족치고 싶었지만, 너무 빨리 달려 가버렸다. 그는 그들 중에 유일하게 딸아이가 있는 아버지였고, 그들은 그를 조금 이해하기로 했다. 단지 괘씸죄로 한 달간 일할 기회를 주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먼저 탯줄을 끊고 아기를 옮기기로 한다. 그러다가, 다들 경악한 표정으로 관에서 뒷걸음질을 쳤다. 나도 문장을 읽다가 ……소스라쳤다. 여자의 다리 아래쪽에서, 염소 새끼처럼 아이는 아주 미묘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다음 회에 계속 …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 부분 혹은 전체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2024.07.15 1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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