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임병식 중국 탕산해운대학 초빙교수
연재 중
일본, 일본인 이야기
5개의 칼럼 #경제
  • 일본, 일본인 이야기
    박훈 교수가 쓴 ‘위험한 일본책’을 읽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일본인의 친절과 관련해 쓴 대목인데 여러 면에서 공감 갔다. 나 또한 일본을 다니면서 일본인들이 이전 같지 않다고 느끼던 차였다. 박 교수는 ‘불친절해진 일본인’이란 글에서 더 이상 일본인은 친절하지 않다며 경험을 소개했다. 일본 유학 시절 일본인의 친절에 감동했다는 박 교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의심이 생겼다고 한다. 손님을 대하는 종업원들의 음성 톤과 태도가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감정이 거세된 친절을 ‘사이보그 친절’로 명명하고, 솔직하지 못한 일본의 국민성을 아쉬워했다. 그랬던 일본인들이 반갑게도(?) 많이 불친절해졌다며 반겼다. 박 교수는 이자카야에서 사케 잔을 가득 채워 달라고 했다가 종업원으로부터 레이저 눈빛을 받았다고 했다. 일본에서 손님을 쏘아보는 눈빛은 처음이었다는 그는 불친절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기계적 친절에서 벗어난, 일본 청년세대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선의를 담은 박 교수의 해석에 공감한다. 하지만 눈살을 찌푸릴 만큼 극단적인 불친절을 겪었던 나로서는 마냥 공감하기 어렵다. 근래 일본을 다니면서 ‘이건 아닌데’라고 느꼈던 게 한두 번 아니었다. 우연도 거듭되면 필연이 되고, 실수도 반복되면 악의가 되듯 연이은 불친절과, 무례함은 ‘일본의 친절’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지난해 가을, 도쿄 인근 하코네(箱根)에서 겪은 일은 지금 생각해도 불쾌하다. 유명 온천 관광지인 하코네는 도쿄에서 가까워 연중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하코네 여행은 고라(强羅) 역을 중심으로 이뤄지는데, 모든 버스와 산악열차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곳이 고라 역이다. 나는 종점인 고라 역에서 내려야하기에 벨을 누르지 않았다. 버스가 정차하면 자연스럽게 내릴 생각이었다. 종점에 도착해 내리겠다고 하자 버스 기사는 짜증 섞인 얼굴로 “바가야로(멍청한 놈)”라고 중얼거렸다. 순간 나는 “뭐야? 바가야로?”라고 반문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얼버무리며 수습했다. 매일 같은 코스를 운행하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나머지 무심코 내뱉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용납하기 어려웠다. 도쿄 긴자에서 공항버스를 탈 때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버스 타는 줄이 맞느냐는 물음에 중년 여성은 “그렇다”며 차갑게 응대했다. 버스가 출발할 때쯤에서야 그의 불손한 언사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는 출발 시간에 임박해 남편과 딸이 오지 않아 초조했던 것이다. 덮어놓고 친절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불쾌했다. 지난 1월 벳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후쿠오카 공항행 버스 짐칸에 짐을 싣고 탑승하는데 중년 여성은 내가 새치기를 한다며 버스기사에게 격하게 항의했다. 예약석이기에 자신에게 불이익이 없을 뿐더러, 나 또한 새치기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소한 것조차 민감하게 대응하는 그를 보면서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했다. 박훈 교수는 일본 젊은 세대의 불친절을 긍정적인 변화로 받아들였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모두 중년인데다, 불친절과 무례는 정도를 한참 벗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일본의 지방 소도시에서는 감동어린 친절을 수시로 경험한다. 자칫 호들갑스럽다고까지 여겨지지만 ‘친절한 일본’은 긍정적인 자산이다. 이따금 주변에서 일본인의 친절을 ‘본심(혼네)’이 아닌 ‘겉치레(다테마에)’로 폄하하는 이들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러는 당신은 흉내라도 내봤느냐”며 반박한다. 그랬던 일본인들이 변했으니 난감하다. 직접 겪은 사례는 퍽이나 당혹스럽다. 도쿄 등 대도시와 유명 관광지에서 유독 흔하다. ‘사는 게 힘들다보니 각박해졌다.’고 이해하면서도 불쾌한 건 어쩔 수 없다. 무한경쟁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속성에서 비롯된 변화가 아닌가싶다. 그들에게 외국인은 더 이상 손님이 아니라 평온한 삶을 깨뜨리는 ‘침입자’일 뿐이다. 나아가 돈 벌이 상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친절에 앞서 짜증부터 나는 것이다. 여기에 동양인을 우습게 보는 국민성도 한 몫했으리라 짐작한다. 우리도 그렇지만 일본 또한 백인 앞에서는 다소곳하지만 동양인은 쉽게 대하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한때 식민지였고, 이제는 많은 분야에서 경쟁상대로 떠오른 한국을 얕잡고 경계하는 일본인도 적지 않다.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을 지나며 헤매일 때 ‘메이드인 코리아’는 가전제품부터 반도체까지 ‘메이드인 제팬’을 무섭게 대체했다. 그럼에도 일본인의 친절은 여전히 감동적이다. 지난해 가을, 조선 독립운동가 무료 변론에 일생을 바친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간토 대지진 와중에 조선인 300여 명을 구한 오카와 쓰네키치 서장을 취재하러 가는 길에 만난 일본인들은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세차를 멈추고, 정원수 손질을 중단한 채 자신들 차로 나를 안내했다. 과도한 친절과 무례한 불친절이 공존하는 일본 사회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친절과 불친절 여부 또한 개인 성향에 따라 다를 수 있기에 선입견 역시 경계할 일이다. 다만 나는 가식적일망정 일본인의 친절이 계속되길 소망한다. 습관도 오래되면 태도가 된다. 일본인의 겉치레 친절도 시간과 함께 감동어린 친절로 바뀌었다고 믿는다.
    2025.03.13 10:07:02
    예전 같지 않은 ‘불친절한 일본인’
  • 일본, 일본인 이야기
    겉과 속이 다른 일본인을 이해하는 게 어렵다고 한다. 또 과도한 친절과 모호한 언어습관에 주의해야 한다고 한다. 흔히 회자되는 일본인을 규정하는 국민성이다. 부정적인 뉘앙스로 언급하지만 일본인만의 특성은 아니다. 일본인에게서 유달리 이런 정서가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를 배려한 듯싶지만 애매모호하기까지 한 언어습관과 국민성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우리는 그렇지 않을까. 본심과 겉치레 정도로 쓰이는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는 일본인의 특징을 설명할 때 쉽게 인용한다. 권력자나 공권력에 순종적인 일본인과 달리 한국인은 저항 기질이 강하다. 경제대국 중국과 일본을 ‘뙤놈’, ‘쪽바리’로 부르는 나라는 한국인이 유일하다. 또 왕조시대 숱한 민란부터 현대사회 대규모 집회까지 한국인은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국가권력과도 기꺼이 맞섰다. 숨죽이며 순응하는 일본인과 크게 구분되는 지점이다. 일본 전문가들은 혼네(본심)와 다테마에(겉마음), 그리고 과도한 친절을 이해하는 코드로 ‘사무라이 문화’와 ‘와(和) 문화’에서 찾는다. 일본은 1185년 수립된 가마쿠라 막부부터 1868년 붕괴된 에도 막부까지 무려 700년 동안 사무라이가 지배한 칼의 나라였다. 사무라이 집단은 칼을 상시 휴대하고 걸핏하면 사람을 죽였다. 살벌한 사회에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본심을 감춰야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하고 싶은 말도하고 장수까지 누리는 사회는 흔치 않다.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따돌림 당한다. 하물며 목숨이 오가는 사무라이 시대, 공동체를 깨뜨리는 튀는 언행은 죽음을 의미했다. 공동체에 순응하는 ‘와(和) 문화’ 또한 겉치레에 능한 다테마에로 이어졌다. 촌락 공동체에서 마을의 질서를 어길 경우 가해지는 집단 따돌림을 뜻하는 ‘무라하치부(村八分)’는 가혹했다. 유령인간으로 취급하는 이지메를 피하려면 싫어도 좋은 척, 과장된 친절을 통해 공동체에 자신을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혼네와 다테마에는 이런 문화적 산물이다.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사무라이 정권, 공동체와 조화를 꾀해야 하는 와 문화는 일본 국민성의 원형질이다. 과도하다 싶은 친절 또한 여기에서 비롯됐다. 칼 든 사무라이 앞에서 살아남는 길은 면종복배와 위장된 친절, 웃음이었다. 본심은 감추고 비위를 맞춰야 생존 확률은 높았다. 일본인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쓰미마센(미안합니다)”은 정말 미안해서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언어습관에 불과하다. 일본인들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일에도 “쓰미마센”이라고 한다. 40년 전 처음 일본에 갔을 때는 “쓰미마센”을 진심으로 여겨 주변에 ‘일본은 친절한 나라’라고 했다. 언제부터인지 일본에서 듣는 “쓰미마센”은 공허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는 혼네와 다테마에가 다른 일본인을 쉽게 믿지 말라는 편견으로 확장됐는데, 일본인조차 “쓰미마센”을 정말로 미안하다는 뜻으로 여기는 이가 있을까 싶다. 혼네와 다테마에를 떠올릴 때마다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30여 년 전 가나자와(金澤) 시 초청으로 이시카와(石川) 현을 공식 방문했을 때다. 다다미가 깔린 전통 요정에서 만찬이 있었고, 가나자와 시장은 10분정도 늦었다. 그는 만찬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여닫이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수차례 허리를 굽혀 “쓰미마센”이라며 사과했다. 그는 6선 시장으로서 머리 희끗한 70대 초반이었다. 누구도 그가 예의를 저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 정도는 늦을 수 있다고 여겼기에 우리 일행은 다소 당황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예의가 바르다’고 탄복했는데, 훗날 그때 행동은 보여주기 위한 다테마에는 아니었는지 혼동됐다. 정치인으로서 사무라이 관습대로 사과한 것은 아닌지 싶었다. 아마 사무라이 시대였다면 그는 영주가 주관하는 회의에 늦었다는 이유로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좀처럼 속내는 보이지 않는 국민성 때문인지 일본인을 친구로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중국인은 첫 만남에서도 “따거(형님)”라며 쉽게 마음은 여는 반면 일본인은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다. 가깝게 지내는 일본인 가운데 주한 일본대사관 소속 외교관들이 있었다. 그들과 나는 매월 돌아가며 식사비용을 부담하며 1년 넘게 만남을 이어갔다. 허물없는 관계라고 여길법했건만 그들과 끝내 호형호제를 못한 채 헤어졌다. 그들은 내 호칭을 “임상”으로 부르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한국을 떠났다. 이따금 SNS를 통해 안부를 주고받지만 끈끈한 인관관계를 중요시하는 한국인으로서는 왠지 허전했다. 대학 시절 연수 때도 느꼈지만 선을 넘지 않는 평행선을 유지는 일본의 국민성을 거듭 확인한 계기였다. 그들이 나를 다테마에로 대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이보시 고이치(相星孝一) 전 주한 일본대사 또한 기억에 남는 관료다. 그가 대사로 있을 때 정세균 전 총리와 오찬을 주선했다. 아이보시 대사는 리모델링한 일본대사관도 소개할 겸 솜씨 좋은 일본 요리사가 만드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 측은 일본대사관에서 오찬이 불러올 구설을 우려한 나머지 다른 장소를 제안하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후 다시 잡자고 했으나 본국으로 귀국하는 바람에 지키지 못한 약속으로 남았다. 한국 근무만 세 차례, 우리말이 유창한 아이보시 대사는 외교가에 이름난 친한파다. 여러 자리에서 한국에 대한 그의 진심을 숱하게 접했기에 나는 한국에 대한 그의 혼네를 의심치 않는다. 오히려 반일정서를 의식해 오찬 장소마저 흔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가 다테마에는 아니었는지 돌아본다. 한국인의 저항정신과 겉치레 또한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2025.02.23 08:07:38
    '쓰미마센'의 뿌리 '다테마에'
  • 일본, 일본인 이야기
    지난주 미일 정상회담 직후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의 ‘아부 외교’가 화제가 됐다. 뉴욕타임스는 “이시바 총리는 트럼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저항’ 대신 ‘아부’를 택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에 대한 첫인상을 묻는 질문에 이시바 총리는 “TV에서 본 유명인을 직접 만나게 돼 기뻤다”면서 “무섭고 강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는데 매우 진지하고 강력하며 미국과 전 세계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며 한껏 치켜세웠다. 외신은 트럼프 대통령의 입은 귀에 걸렸고, 회담 내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아부’라는 단어를 중립적 의미로 사용했다. 국제무대에서 듣기 좋은 말로 환심을 사는 이유는 국익을 위해서다. 칭찬을 마다할 정치인은 없기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유효한 외교 수단이다. “일본에 전할 메시지는 무엇이냐”는 취재진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사랑해요”라고 했다니 아부 외교는 남는 장사였다. 외신과 달리 국내언론은 이시바 총리의 외교적 수사를 다소 부정적 뉘앙스로 전했다. 동일한 사안을 전하면서도 일본 이슈라면 무조건 비판부터 하고보는, 국내 정서를 뛰어넘지 못한 관성에서 비롯된 보도였다. 정도를 넘어선 외교적 수사는 자칫 굴종으로 비춰질 수 있기에 신중해야 하지만 국익을 위한 것이라면 어느 정도 용인할 수밖에 없다. 이시바 총리의 ‘아부’는 치밀한 준비를 바탕으로 한 실리외교라는 점에서 많은 걸 시사한다. 일본 외무성은 아베 전 총리의 부인을 지난해 12월 마러라고에 보내 트럼프와 대화 물꼬를 열었다. 이어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을 통해 1,000억 달러(약 145조원) 투자 선물 보따리를 제공함으로써 장사꾼 트럼프를 효율적으로 공략했다. 사소한 것 같지만 황금 투구 선물 또한 면밀하게 계산된 결과물이다. 투구를 제작한 곳은 이시바 총리의 고향 돗토리 현이고, 주문 시기는 지난해 11월이니 트럼프 당선 직후부터 준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정상 외교가 멈춘 한국 상황에서 일본이 대미 관계를 선점한 건 아픈 대목이다.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 일본의 실리외교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시바 총리는 미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 달 전부터 공부 모임을 갖는 등 치밀하게 준비했다. 외무상을 지낸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물론 외무성·경제산업성 간부들과 함께 ‘트럼프 식 맞춤형’ 문답을 만들고, 또 지난 30년 동안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가 감소하고 있음을 표로 정리해 제시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얼마나 설득됐는지는 몰라도 향후 미일관계를 예상할 수 있다. 자세를 낮추는 일본 외교는 일본인 특유의 치밀함을 반영한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할복도 마다하지 않는 사무라이 문화를 미덕으로 삼는 일본에서 아부는 계산된 행동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로 있다가 권력을 손에 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화가 상징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겨울날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신발을 품고 있다가 따뜻한 신발을 준비했다는 이야기는 일본사회에서 아부가 아닌 미담으로 회자된다. 히데요시의 행동은 주군을 위한 충성이며, 훗날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은 이유마저 여기에서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러니 진영을 떠나 이시바 총리의 언행을 시비할 일본인은 없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자존심마저 내려놓는 일본인의 사고방식은 패전 이후 빛을 발했다. 미군정하에서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상은 맥아더 극동사령관의 비위를 맞춰 미군 직접통치에서 간접통치로 전환시켰다. 이로써 일본은 경제 부흥에 집중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또 일본은 미국과 코드를 맞춰 정상국가로 이행이라는 실리를 취했다.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1951년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한 뒤 안전보장은 미국에 맡기고 경제부흥에 집중하는 ‘요시다 노선’을 1980년대 초까지 견지했다. 이런 기조 아래서 이케다 수상 재임 당시 일본 경제는 9~10%대 고도성장을 달성하며 GATT와 IMF, OECD에 가입하며 사실상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패전 19년 만인 1964년, 도쿄 올림픽까지 치른 배경에는 스스로를 낮춘 외교가 있었다. 일본이 록펠러센터와 콜롬비아 영화사를 매입하고 대규모 대미 무역흑자를 기록하면서 미국이 일본 때리기에 나서자 일본은 다시 엎드렸다. 일본은 ‘플라자 합의’에 이어 1985년 ‘마에다 리포트’를 토대로 10년 간 430조 엔에 달하는 재정지출과 미국 내수 시장 확대를 뒷받침했다. 또 경제구조를 바꾸고 시장을 개방하라는 미국의 압박을 따랐다. 당시 협상 항목만 200개에 달해 굴욕적이라는 비판이 없지 않았지만 일본은 힘의 역학 관계를 인정하면서 보통국가로 보폭을 넓혔다. 이 결과 일본은 미국에 의존하던 국가안보에서 벗어나 자국이 공격 받거나 동맹국이 요구하면 군대를 파견하고 전쟁에 참여하는 보통국가로서 지위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일본 외교는 철저하게 실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시바 총리는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본과 협력이 미국의 이익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 트럼프를 추켜세울 것,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준비했다. 나아가 정적이었던 아베 전 총리의 외교 방식까지 수용했다. 일본을 따라할 필요는 없지만 아부라고 폄하할 일도 아니다. 자신을 한껏 낮추는 일본 외교는 그런 기회조차 갖지 못한 한국 정치를 돌아보게 한다. 과시용 허세를 내려놓고 국익을 위해 아부를 자처하는 일본 정치를 주목한다. /서경IN
    2025.02.15 11:33:28
    이시바 총리의 계산된 '아부외교'
  • 일본, 일본인 이야기
    다음 달 16일이면 윤동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80년이 된다. 영정 속 학사모를 쓴 시인의 모습은 흔들림 없는 청춘이다. 윤동주가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운데 한 명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우리 세대 모두는 ‘서시’를 읽으며 젊은 날을 지나왔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고뇌로 점철된 고백이다. 일본 규슈 후쿠오카(福岡)는 윤동주가 마지막 생을 보낸 곳이다. 윤동주는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943년 7월 체포됐다. 2년형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 둘은 이곳에서 마지막 1년 7개월을 보냈다. 그리고 ‘육첩방(六疊房) 남의 나라’에서 2월 16일, 3월 7일 차례로 숨졌다. 아직 냉기가 채 가시지 않은, 광복을 반년 남겨 놓은 때였다. 두 사람은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죽음을 맞은 곳도, 묻힌 곳도 같다.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함께 했고 서울 연희전문을 다녔다. 또 일본에서 유학을 했고 중국 용정에 나란히 묻혔다. ‘시인 윤동주 지묘’와 ‘청년문사 송몽규 지묘’는 100m 떨어진 지척에 있다. 윤동주는 그해 3월 6일 장례를 치렀다.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에서 “그날따라 봄을 시샘하는 눈보라가 몹시 날려서 동주의 유골을 땅에 묻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춥게했다”며 시린 그날을 묘사했다. 후쿠오카에 갈 때마다 이따금 구치소에 들리는데, 매번 뭉클한 감상에 젖는다. 아들 또래 청년들이 한창 나이에 죽음을 맞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지금은 구치소로 바뀌었지만 후쿠오카 형무소는 악명 높았다. 구치소 건물은 전혀 생각지 못한, 주택가와 인접해 있다. 우리 같으면 혐오시설이라며 이전 요구가 빗발쳤을 게 분명한데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싶었다. 국가에서 하는 일에 웬만해서 반기를 들지 않는 일본인 특유의 순종주의가 묻어 있다. 두 사람의 공식 사인은 병사(뇌출혈)지만 생체실험 사망설도 꽤 설득력 있다. 가장 먼저 생체실험 사망설을 제기한 이는 일본인 고노 에이치(鴻農映二)다. 한국에서 문학을 전공한 문학평론가 고노는 1980년 ‘현대문학’ 10월호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에서 생체실험 도중 숨졌을 가능성을 맨 처음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전쟁 말기, 일제는 모자란 피를 충당하기 위해 혈장을 대신해 생리식염수를 주사하는 실험을 했는데, 실험 도중 사망했다는 것이다. 두 가지 근거를 들었다. 첫째 ‘규슈제국대학에 해부용으로 제공함’이라는 전보, 둘째 면회 자리에서 송몽규가 했다는 말이다. 해부용 운운은 실험 도중 숨졌음을 추정케 하며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있다”라는 송몽규의 말 또한 정황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이후 생체실험 사망설은 음모론을 넘어 어느 정도 구체화됐다. 미국 정부기록보존소(NATRA) 자료도 그중 하나다. 전후 연합군은 규슈제국대학 의대교수 5명을 전범 재판에 기소했는데, 미군 전투기 조종사 8명을 생체 해부한 혐의였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미군 포로의 장기를 적출하고 ‘바닷물 주사’를 꽂았다. SBS방송(2009년 8월15일)도 미국 국립도서관 기밀문서를 확인해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규슈제국대학이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를 상대로 바닷물 수혈 생체실험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일보 또한 2015년 4월 6일자 ‘이 끔찍한 짓을 우리가 했습니다, 미군 생체실험 규슈의대의 반성’이란 기사에서 미군 포로 생체 해부에 참여했던 일본인이 마이니치신문에 털어놓은 증언을 실었다. 19살 의대생 신분으로 실험에 참여했던 노인(2015년 89세)은 “당시 대학은 군을 거역하지 못했다. 산 채로 미군 장기를 적출했다. 또 혈관에 바닷물을 주입했다. 전쟁이 만든 광기였다”고 증언했다. 규슈대학 또한 2015년 4월 교내에 의학역사관을 개관해 미군 포로 생체 해부 사건을 기록한 전시물을 비치하고 추모 공간을 설치함으로써 생체 실험설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생체 실험 사망 의혹은 후쿠오카 형무소 사망자 추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옥중 사망자는 1943년 64명에서 1944년 131명, 1945년 259명으로 급증했다. 종전에 임박해 대규모 생체 실험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단기간 급증한 옥중 사망자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 일본 정부는 80년 넘게 불편한 침묵을 이어가고 있다. 반면 전후 일본 지식인과 시민들은 윤동주 시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참회하는 일에 적극적이다.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은 1994년 이후 30년 넘게 윤동주 시를 낭송하며 그를 기리고 있다. 이들은 매년 2월 16일 후쿠오카 구치소 옆 뜰에서 윤동주의 시를 읽으며 속죄한다. 니시오카 겐지(西岡健治)·80) 후쿠오카현립대 명예교수는 오랫동안 윤동주 시비 건립을 추진했다. 비록 좌절됐지만 그는 10년 가까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혼신을 다했다. 윤동주 묘를 처음 세상에 알린 이 또한 일본인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전 와세다대학 명예교수다. 그는 1985년 5월 용정 동산교회 묘지에서 윤동주 묘를 발견했다. 그가 없었다면 윤동주가 우리 곁에 오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을지 모른다. 마스오 교수는 2023년 90세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윤동주와 한국문학’, ‘조선의 혼을 찾아서’를 통해 한국과 일본사회에 윤동주를 알렸다. 아부라야마 강과 무로미 강은 후쿠오카 구치소에 이르러 합류한다. 이곳 두물머리에서 동해까지는 1km 남짓이다. 지난 가을, 그곳 소나무 숲에서 윤동주와 송몽규를 떠올렸다. 그들도 차가운 감방에서 파도 소리를 들었을까,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두 조선 청년의 죽음을 애도하며 일본 정부의 무심함을 탓했다. 다시 윤동주 서거 80주년을 맞아 군국주의 어두운 그림자와 양심적인 일본 시민 사이에서 일본 정부의 자세를 묻는다.
    2025.01.25 00:05:00
    윤동주 서거 80주년과 일본의 자세
  • 일본, 일본인 이야기
    올해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게 뜻깊은 해이다. 1945년 광복(일본은 종전)으로부터 80년,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60년 되는 해이다. 그동안 양국에는 숱한 일이 있었다. 맑은 날과 흐린 날이 교차하듯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지금도 양국 관계는 언제 깨져도 조금도 이상할 것 없는 유리그릇이다. 말끔히 정리되지 못한 과거사를 머리에 둔 까닭이다. 특히 피해자로서 한국인에게 과거사는 인화성 높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우리 인식의 기저에는 일본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깊게 깔려 있다. 광복 80년이 흘렀지만 수도 한복판에서 10년째 위안부 소녀상 철야 농성이 이어지고 ‘토착왜구’라는 말이 상대를 제압하는 유용한 기제로 통용되는 게 그렇다. 2023년 1인당 GNI(국내외에서 벌어들인 평균 소득)에서 한국은 처음으로 일본을 제쳤다. 가구당 순자산과 수출액도 일본을 앞질렀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은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18계단 앞섰다고 발표했다. 문화 분야에서도 K팝을 비롯한 K콘텐츠는 일본을 압도하고 있다. 양국을 오가는 연간 방문객은 1000만 명을 넘어선지 오래됐다. 지구상에 이런 두 나라는 없다. 일본을 찾는 외국인 가운데 한국인은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정부관광국(JNTO)에 따르면 2024년의 경우 11월까지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3338만 명 가운데 한국은 795만 명으로 23.8%를 차지했다. 네 명 가운데 한 명꼴로 한국사람인 것이다. 도쿄와 교토, 오사카, 후쿠오카는 물론이고 일본 소도시까지 우리 젊은이들로 북적일 정도다. 2030세대의 70%는 일본에 호감을 갖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다. 경제와 문화에서 성과에 바탕을 둔 자신감으로 이해한다. 대한민국은 80년 전, 일제에서 해방된 나약한 한국이 아니다. 예전에 일본이 알던 한국이 아니라는 말이다. 광복 80년은 변화한 위상에 걸맞은, 자신감에 바탕을 둔 대일관계를 세우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사회에는 여전히 과잉 민족주의가 넘치고, 일본 이슈에는 쉽게 흥분하고 분노한다. 개인 관계에서도 그렇듯 먼저 화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쪽에 허점이 많다. 분노는 냉정해야할 때 눈을 가린다. 한일 양국에는 한일관계를 악용하는 편협한 세력이 있다. 이들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 끝에는 끝없는 불신과 적대감이 있다. 청년세대는 당당한데 끝없이 피해의식만 자극한다면 무책임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5년 일본 방문에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하며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불행한 역사는 짧고 좋았던 때가 훨씬 길었다”며 전향적인 한일관계를 당부했다. 이후 한류는 일본 열도를 뒤덮었다. 앞서 조선통신사는 200여 년 동안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BTS와 블랙핑클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린 문화사절단이었다. 하지만 한일관계는 여전히 불안하고 삐걱댄다. 광복 80년, 국교 정상화 60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30년을 맞는 2025년은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기 좋은 해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두 나라는 어쩌면 가장 서로를 모른다. 불행한 과거는 용서하되 잊지 않는 자세를 견지할 때 미래 지향적인 한일관계도 열리리라 믿는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선진 7개국만 가입하는 ‘5030클럽’ 회원 국가이다. 이 중 제국주의를 경영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한국은 여러 지표에서 일본에 앞서 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우위도 확보하고 있다. 청년세대는 도덕적 우위와 경제, 문화에서 우위를 토대로 일본과 함께 동아시아 경제와 민주주의를 리드할 주인공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에 따라 동아시아 질서는 급격한 재편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우리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불행한 과거에 대해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모습을 보일 때 한국은 국제사회의 성숙한 일원으로 거듭날 수 있다. 박철희 주일 대사는 서울대 교수 재임시절 한 토론회에서 “일본 문제는 가만히 있으면서 여론에 편승해 비판만 하는 게 가장 편하다”는 말로 한국 사회의 곤혹스러움을 토로한 바 있다. 비판과 비난이 두려워 침묵하는 사회는 희망도 기대도 없다. 성숙한 토론이 실종된 사회는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자각증세 없이 서서히 죽음을 맞는 당뇨병 환자와 같은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미셀 오바마는 “그들이 저급하게 갈 때, 우리는 품위 있게 가자”했는데 한일관계에도 적용해볼 만하다. 일본을 도덕적으로 굴복시키는 품위와 관용을 떠올려본다. 일본을 찾는 외국인 4명 가운데 1명은 한국사람인 시대, 일본은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는 나라이다. 그렇다면 흥분과 분노를 내려놓고 긴 호흡에서 미래에 시선을 둬야 한다. 지난 40여 년 동안 100차례 넘게 일본을 다녔고, 최근 2년 동안은 과거사와 관련된 현장을 집중적으로 다녔다. 최남단 가고시마(鹿兒島) 이부스키(指宿)에서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왓카나이(稚內)까지 일본 열도를 종으로 횡으로 오가며 불행한 과거를 직시하는 한편 전후 일본세대가 보여주는 진솔한 움직임을 살폈다. 대학생 자격으로 처음 일본에 발을 디딘 뒤 언론인, 정치인, 대학 교수로 신분이 바뀌었다. 제 시선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뒤따랐다. ‘임병식의 일본, 일본인 이야기’는 한계에 갇힌 양국 정치인들의 정치언어를 뛰어넘어 균형을 이야기한다. 참회와 반성의 토대 위에서 군국주의 망령과 싸우고 있는 시민모임은 원천이다. 일본은 종단거리만 2895km(도쿄 경유), 2700km(가나자와 경유)에 달하며 남한 면적 네 배에 달한다. 매주 저와 함께 ‘섬나라 왜놈’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일본과 일본인을 만나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모색하길 기대한다.
    2025.01.07 14:32:05
    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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