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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수요일]치마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11.03 07:00:00문정희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하다 가만 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들 -
[시로 여는 수요일] 모든 대추나무는 벼락을 맞고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10.27 07:00:00-성선경 내 도장은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것 이것을 나는 무슨 벽사의 부적처럼 여기고 주머니 안에 넣어 다니며 몰래 남몰래 주머니에 손을 넣어 만지작거리고 무슨 못 들을 말을 듣거나 못 볼 일을 보게 되면 만지작거리고 벽사의 주문처럼 웅얼거리고 이 대추나무 뼈다귀를 움켜쥐게 된다 알고 보면 모든 대추나무는 벼락을 맞고 이 벼락 맞은 대추나무 뼈다귀들이 축제의 난전에서 도장으로 환생하지만 그래도 참 이딴 것 -
[시로 여는 수요일]파리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10.20 07:00:00-이정록 파리채 위에서 놀자. 파리채를 들어 올리면 그때 사뿐 날아가자. 놈의 주먹 위에서 놀자. 놈의 손아귀에서 놀아나지 말자. 손은 열심히 비비는 척하자. 손에 피가 돌면 머리가 좋아지니까. 주먹을 들어 올리면 순간 높이 날아오르자. 주먹만 믿는 놈에게는 날개가 없다는 걸 보여주자. 내가 높이 날아오를수록 놈은 코딱지처럼 작게 보인다. 도망치면 내가 작아지지만 날아오르면 놈이 바닥이 된다. 닭이 열이면 그중 하나 -
[시로 여는 수요일]돌지 않는 풍차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10.13 07:00:00- 송찬호 그는 일생을 노래의 풍차를 돌리는 바람의 건달로 살았네 그는 때때로 이렇게 말했네 풍차가 돌면 노래가 되고 풍차가 멈추면 괴물이 되는 거라고 그는 젊어서도 사랑과 혁명의 노래로 풍차를 돌리지는 못했네 풍차의 엉덩이나 허리를 만지고 가는 바람의 건달로나 살면서 바람 부는 언덕에서 덜컹거리는 노래의 풍차는 쉼 없이 돌았네 그는 지치고 망가져가는 풍차에게 이렇게도 말했네 멈추지 말게 여기서 멈추면 삶은 -
[시로 여는 수요일]고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10.05 10:22:53폭설이 내린 산을 오른다 척박한 비탈에서 온몸을 뒤틀어가며 치열한 균형으로 뿌리박은 나무들이 저마다 한두 가지씩은 부러져 있는데 귀격으로 곧게 뻗어 오른 소나무 한 그루 상처 난 가지 하나 없는 명문가 출신에 훤칠한 엘리트를 닮은 듯한 나무 한 그루 하지만 나는 금세 싫증이 났다 너는 어찌 된 행운인가 너에겐 폭풍과 천둥 벼락의 시대도 없었느냐 너에겐 폭설도 눈보라의 부르짖음도 없었느냐 나는 눈길을 걸으며 굽 -
[시로 여는 수요일]서둘러 후회를 하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9.30 07:00:00-김월수 평소대로라면 등 떠밀며 서둘러 손 재촉했을 어머니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종종걸음으로 큰길까지 나와 궁색한 목소리로 발길을 잡아끈다 - 자고 가믄 안 되냐? 죄지은 사람마냥 서 있는 젖은 눈망울 못 본 척 돌아서 왔다 풀죽은 보따리를 업고 그리운 도시를 향해 돌아오는 내내 궁색한 그 한마디가 마음을 찔렀다 마음 한구석 철렁했을 것이다. 늘 서둘러 등 떠밀던 어머니가 궁색한 목소리로 발길을 잡았을 때. 하룻밤 -
[시로 여는 수요일] 만월
정치 정치일반 2021.09.15 07:05:00- 김정수 막내네 거실에서 고스톱을 친다 버린 패처럼 인연을 끊은 큰형네와 무소식이 희소식인 넷째 대신 조커 두 장을 넣고 삼형제가 고스톱을 친다 노인요양병원에서 하루 외박을 나온 노모가 술안주 연어 샐러드를 연신 드신다 주무실 시간이 진작 지났다 부족한 잠이 밑으로 샌다 막내며느리가 딸도 못 낳은 노모를 부축해 화장실로 가는 사이 작은 형이 풍을 싼다 곁에서 새우잠을 자던 아내를 깨운다 며느리 둘이 노모의 냄 -
[시로 여는 수요일]아내와 나 사이
정치 정치일반 2021.09.08 07:00:00이생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
[시로 여는 수요일] 곰 인형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9.01 05:50:00박복조 영등포 역사, 새벽 두 시가 넘었는데 불이 훤하다 그 남자, 의자처럼 누워 있다 누군가 가지고 놀던 곰 인형 의자에 버려져 있다 그 남자처럼 버려져 있다 누군가 가지고 놀던 그 남자, 곰 인형처럼 의자에 버려져 있다 그 남자의 가슴에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 남자가 의자에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세상 바닥에 버려진 곰 한 마리의자 위에 구겨진 한 남자가 누워 있구나. 그 옆에 때 묻은 곰 인형 하나가 쓰러져 있구 -
[시로 여는 수요일] 오늘은 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8.25 05:50:00육근상 ?아침 겸 즘심을 짜장면이랑 쏘주로 때우고 있는디 옆자리에서 탕수육 노나 먹던 홍안의 여자아이 들이 주뼛주뼛허더니 저어 아저씨예 담배 있으모 두 까치만 주이소 나헌티 하는 소리는 아니겄제 면발에 고춧가루 뿌려 길게 끌어 올리는디 쏘주도 한 잔 털어 놓으려 허는디 아저씨예 으이 담배 있으면 돌라고 예에 있으모 두 까치만 주이소 허는디 금방이라두 눈물 쏟아낼 것 같은 내 어릴 적 닮은 미간과 깊게 파인 간절 -
[시로 여는 수요일] 복숭아에 난 벌레의 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8.18 05:50:00김안려 구불구불하게 패여 있는 길 하나 보인다 가고 있는 길 어딘지 모른 채 우주의 한가운데를 열심히 기어가고 있다 홈이 파인 둥근 길 접어놓아도 언제, 벌린 사람의 입 속으로 들어갈지 알 수 없는 잦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잎사귀같이 불안에 잠기는 붉은 흙 위의 길에서 신발을 신어보기도 전에 저만치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날려가 버리고 마는 풀무치같이 가벼운 목숨을 놓아 버린다 복숭아밭에서 종일 일하면, 벌레 먹 -
[시로 여는 수요일] 니가 좋으면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8.11 05:50:00김해자 시방도 가끔 찾아와 나를 물들이는 말이 있다 두레박 만난 우물처럼 빙그레 퍼져나가는 말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전생만큼이나 아득한 옛날 푸른 이파리 위에 붉은 돌 찧어 뿌리고 토끼풀꽃 몇 송이 얹어 머시마가 공손히 차려준 손바닥 만한 돌 밥상 앞에서 이뻐, 맛있어, 좋아, 안 먹고도 냠냠 먹던 소꿉장난처럼 이 세상 것이 아닌 말 덜 자란 토끼풀 붉게 물들이던 덩달아 사금파리도 반짝 빛나게 하던 니가 좋으면 -
[시로 여는 수요일] 눈사람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8.04 05:50:00강영환 대설주의보가 지나간 벌판에 서서 햇살만으로도 녹아내릴 사람이다 나는 한쪽 눈웃음으로도 무너져 내릴 뼈 없는 인형이다 벌판을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곁에 왔다 걸어온 길은 돌아보지 않는다 앞서갈 길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내 지키고 선 이 자리에서 여분으로 남겨진 사랑도 가슴에서 뽑아낸 뒤 흔적 없이 떠나고 싶을 뿐 얼어붙은 바람 속에서 쓰러지지 않는다 그려 붙인 눈썹 떨어져 나간 뒤 그대 뿜어낸 입김에 빈터 -
[시로 여는 수요일] 한 수 배우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7.28 05:50:00문성해 매미가 아파트 방충망에 붙어 있다 내가 시 한 줄 건지지 못해 겹겹이 짜증을 부릴 때조차 매미는 무려 다섯 시간이나 갓 태어난 날개며 평생 입고 다닐 몸이며 울음이며를 말리우고 있다 내가 소리 내어 울고 싶을 때조차 그저 조용히 울음을 견디고 있다 내가 안 나오는 시를 성급히 애 끓이는 사이 매미는 그저 조용히 제가 지닌 것들을 미동도 없이 말리우고 있다가 드디어 해가 지기 시작한 즈음 조용히 물이 끓기 시 -
[시로 여는 수요일] 수태고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7.21 05:50:00윤제림 승강기 버튼을 누르면서 아이가 물었다 할아버지 몇 층 가세요? 나는 화를 내며 말했다 나, 할아버지 아니다 아이가 먼저 내리며 인사를 한다 안녕히 가세요, 할아버지! “이런 고얀 녀석” 하려는데, “그래, 안녕” 소리가 먼저 나왔다 잘 했다 저 아이가, 내 딸애한테 태기(胎氣)가 있음을 알려주러 먼길을 온 천사인지 누가 아는가 고 녀석도 고스란히 돌려받을 겁니다. 한동안 ‘학생’ 하고 불리다가, ‘총각’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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