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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수요일] 벌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7.05 17:20:30지독한 벌이다이중으로 된 창문 사이에 벌 한 마리 이틀을 살고 있다떠나온 곳도 돌아갈 곳도 눈앞에 닿을 듯 눈이 부셔서문 속에서 문을 찾는 벌- 당신 알아서 해 싸우다가 아내가 나가버렸을 때처럼무슨 벌이 이리 지독할까혼자 싸워야 하는 싸움엔 스스로가 적이다 문으로 이루어진 무문관無門關모든 문은 관을 닮았다벌이 벌이었구나. 꽃 아니면 앉지 않고, 꿀 아니면 마시지 않더니 문 속에서 문을 찾는 벌을 받는구나. 사람 -
[시로 여는 수요일] 품어야 산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6.28 10:15:41어머니가 배고픈 아기에게 젖을 물리듯 강물의 물살이 지친 물새의 발목을 제 속살로 가만히 주물러주듯품어야 산다폐지수거하다 뙤약볕에 지친 혼자 사는 103호 할머니를 초등학교 울타리 넘어온 느티나무 그늘이품어주고, 아기가 퉁퉁 분 어머니 젖가슴을 이빨 없는 입으로 힘차게 빨아대듯 물새의 부르튼 발이 휘도는 물살을 살며시 밀어주듯품어야 산다막다른 골목길이 혼자 선 외등을 품듯 그 자리에서만 외등은 빛나듯 우유 -
[시로 여는 수요일] 누구세요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6.21 10:55:54칠순 넘긴 며느리가 구순 시어머니 빤스를 갈아입힌다 다리를 절뚝이며 칠순의 어머니가 할머니와 씨름한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내 이마에 식은땀이 다 난다 귀 어두운 건 피장파장 빌어먹을 하루종일 귀청이 터지도록 소리 질러가며 승강이다 빤스 하나 갈아입히는 것도 전쟁이다 한바탕 일 치르고 나서 눈이 어두워져 돋보기 끼고 신문 보는 손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누구세요? 이제 막 눈을 뜨고 세상 구경 나온 것 같은 저 눈 -
[시로 여는 수요일] 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6.14 12:20:21내 뒷모습은 나 자신의 절반인 것인데 사이도 좋게 딱 반반씩 나눈 것인데 번번이 앞모습만 매만지며 전부로 간주해왔다 벽에 의자에 침대에 바위에 나무에 너에게 툭하면 앉고 기댄 탓에 세상의 소란을 다 삼킨 채 짓눌린 나의 뒤여 아무것도 가질 수도 만질 수도 없이 잠잠한 그늘만 드리운 뒤야말로 응당 앞이 아닐까 하는 생각 우리가 뒤라고 알고 지낸 많은 것들이 실은 진짜 앞이 아닐까 하는 아무리 외로운 사람도 뒤 하나 -
[시로 여는 수요일] 선운사 풍천장어집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6.07 12:26:53김씨는 촘촘히 잘도 묶은 싸리비와 부삽으로 오늘도 가게 안팎을 정갈하니 쓸고 손님을 기다린다. 새 남방을 입고 가게 앞 의자에 앉은 김씨가고요하고 환하다.누가 보거나 말거나 오두마니 자리를 지킨다는 것 누가 알든 모르든 이십년 삼십년을 거기 있는다는 것우주의 한 귀퉁이를얼마나 잘 지키는 일인가. 부처님의 직무를 얼마나 잘 도와드리는 일인가. 풀들이 그렇듯이 달과 별들이 그렇듯이. 풍천장어는 오늘도 팔자를 그리 -
[시로 여는 수요일] 신발에 대한 경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5.31 11:20:20늙은 신발들이 누워 있는 신발장이 나의 제단이다. 탁발승처럼 세상의 곳곳으로 길을 찾아다니느라창이 닳고 코가 터진 신발이 나의 부처다. 세상의 낮고 누추한 바닥을 오체투지로 걸어온저 신발들의 행적을 생각하며 나는 촛불도 향도 없는 신발의 제단 앞에서아침저녁으로 신발에게 경배한다.그 제단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합장하는나는 신발의 行者,신발이 끌고 다닌 그 수많은 길과 그 길 위에 새겼을 신발의 자취들은내가 평 -
[시로 여는 수요일] 이것도 없으면 너무 가난하다는 말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5.24 10:32:32가족이라는 게 뭔가. 젊은 시절 남편을 떠나보내고 하나 있는 아들은 감옥으로 보내고 할머니는 독방을 차고앉아서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삼인 가족인 할머니네는 인생의 대부분을 따로 있고 게다가 모두 만학도에 독방 차지다. 하지만 깨칠 때까지 배우는 것이 삶이다. 아들과 남편에게 편지를 쓸 계획이다.나이 육십에 그런 건 배워 뭐에 쓰려고 그러느냐고 묻자 꿈조차 없다면 너무 가난한 것 같다고 지그시 웃는다. 할머니의 -
[시로 여는 수요일] 꽃을 먹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5.17 10:45:45동부시장 시계탑이 내려다보고 있는 사거리, 정오, 튀김 천막 내외가 점심상을 받는데 다붓하게 마주 앉아서 <시골밥집> 된장찌개를 놓고 흰밥을 먹는데 된장 한 그릇에 들어가는 두 개의 숟가락이 서로의 입속에 깊숙이 혀를 밀어넣듯 서로를 먹이는데 길 위에서 먹는 밥이 달고도 달아 서로를 먹어주는 것이 달고도 달아 아, 먹는 일 장엄하다 펑펑 지구 어딘가에서는 산수유 피고 노란 꽃가루가 토핑처럼 뿌려지는 시장(市場)을 -
[시로 여는 수요일] 운주사 돌부처님께 말 걸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5.10 11:13:08어느 별에서 망명 온 난민인지요 온몸 가득 마마 자국 더께 진 몰골에 집도 절도 없이 노숙자로 사시는 영구산 운주사 돌부처님들왜 하필이면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이 막돼먹은 세상에 오셨는지요 아낙네가 코 떼어 속곳 속에 감춰도 없어도 없지 않고 있어도 있지 않으니 숨 쉬지 않고도 영겁으로 가시며아등바등 사는 이들 깨진 꿈 주워 개떡탑 거지탑 요강탑 쌓아 놓고 어느 새 내 맘속에 기척 없이 들어와 탐욕 덩어리 모아 -
[시로 여는 수요일] 책 읽는 소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5.03 11:24:15아빠가 다닌 문 닫은 초등학교개망초 꽃밭에 책 읽는 소녀상혼자 남아 나머지 공부하죠.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밤낮 똑같은 책이십 년 넘도록 한 쪽도 못 넘기죠. 나도 처음 몇 년은 엉덩이가 들썩거렸죠. 한 장도 넘기기 어려운 시멘트 동화책을 집어던지고, 의자에서 일어나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들’ 따라 교문 밖으로 걸어나가고 싶었죠. 단발머리 나풀대는 여중생, 팔짱 낀 여고 동창생이 부러웠죠. 청운의 캠퍼스를 나 -
[시로 여는 수요일] 복사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4.26 11:26:14갓난애에게 젖을 물리다 말고 사립문을 뛰쳐나온 갓 스물 새댁, 아직도 뚝뚝 젖이 돋는 젖무덤을 말기에 넣을 새도 없이 뒤란 복사꽃 그늘로 스며드네. 차마 첫정을 못 잊어 시집까지 찾아온 떠꺼머리 휘파람이 이제야 그치네. 복사나무는 가지마다 복사꽃이라도 벌 나비가 다 찾은 것은 아니었으리. 벌 나비가 첫정을 주었어도 꽃마다 결실은 어려웠으리. 가녀린 꽃잎에도 빗방울과 바람의 드잡이가 빗겨가진 않았으리. 아낙들은 -
[시로 여는 수요일] 분홍 나막신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4.19 11:16:53님께서 새 나막신을 사 오셨다 나는 아이 좋아라 발톱을 깎고 발뒤꿈치와 복숭아뼈를 깎고 새 신에 발을 꼬옥 맞추었다그리고 나는 짓찧어진 맨드라미 즙을 나막신 코에 문질렀다 발이 부르트고 피가 배어 나와도 이 춤을 멈출 수 없음을 예감하면서 님께서는 오직 사랑만을 발명하셨으니분홍 나막신 신고 가는 널 보았다.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려다 입술이 굳었다. 너는 춤추는 듯 했으나 절름거렸다. 딛는 곳마다 꽃물인 줄 알았 -
[시로 여는 수요일] 소풍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4.12 14:07:44여기서 저만치가 인생이다 저만치,비탈 아래 가는 버스 멀리 환한 복사꽃꽃 두고 아무렇지 않게 곁에 자는 봉분 하나 여기서 저만치 사이 우리가 간다. 여기서 저만치 사이 꿈을 꾼다. 여기서 저만치 사이 일대사를 건다. 여기서 사랑을 하고, 저기서 전쟁을 한다. 사이사이 웃다가 운다. 피안행 버스인 줄 알지만 모두 차안에서 내린다. 비탈길 돌아가는 여기는 어디쯤일까? 우리가 살아 무겁게 여겼던 일은 정말로 무겁고, 가벼 -
[시로 여는 수요일]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4.05 11:06:21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
[시로 여는 수요일] 낮잠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3.29 15:08:47여덟 살 때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집 닭장이 엎어졌기 때문이다 하느님보다 더 무서운 우리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회초리가 무섭고 사사건건 고자질하는 누나도 무섭다 맷돌 뒤로 들어간 공을 꺼내다가 맷돌이 떨어지고 맷돌 위에 얹힌 닭장이 엎어졌다 닭장 속에는 알을 품고 있던 암탉이 소리 질렀고 달걀은 깨어져 물이 되었다 따뜻한 달걀 속엔 병아리의 심장과 핏줄이 떠 있다 부러진 암탉의 다리에 붕대를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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