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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수요일] 비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9.13 10:43:19반찬거리 파는 할머니 조르지도 않았는데 주위 눈치 보며 얼른 새싹 몇 잎 더 넣어준다 할머니와 나만 아는 비밀 다른 사람 절대 알아선 안 되는 무슨 돌이킬 수 없는 불륜이라도 저지른 듯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저 할머니, 밀당의 달인 아닌가? 늙고 행색은 초라해도 중년 시인의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 하다니. 저 시인이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덤을 얻었어.’ 짐짓 무덤덤하게 털어놓더라도 저 비밀을 다 누설했다고는 할 -
[시로 여는 수요일] 추석 만월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9.06 11:14:13애탕글탕 홀아비 손으로 키워낸 외동딸이 배가 불러 돌아온 거나 한가지다 동네 각다귀 놈과 배가 맞아 야반도주한 뒤 한 이태 소식 끊긴 여식 더러는 부산에서 더러는 서울 어디 식당에서 일하는 걸 보았다는 소문만 듣고 속이 터져 어찌어찌 물어 찾아갔건만 코빼기도 볼 수 없던 딸년 생각에 막소주 나발이나 불던 즈음일 것이다 호박잎 그늘 자박자박 디디며 어린것을 포대기에 업고 그 뒤에 사위란 놈은 백화수복 들고 느물느 -
[시로 여는 수요일] 엿치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8.30 10:54:16순례와 엿치기를 한다. 밀가루 묻은 손에서 단내가 솔솔 풍긴다. 가래엿 동강 부러뜨리고 구멍을 후후 분다. 구멍 속으로 종수 오빠 자전거 뒤에 올라타 허리 끌어안고 얼굴 기댄 여자애가 지나간다. 입안 가득한 꿀이 목울대를 넘는다. 감칠맛이 도는 혀를 빙빙 돌리며 달달한 입술 끝까지 빤다. 엿가락 맞대고 구멍을 센다. 구멍 속으로 순례를 태운 종수 오빠 자전거가 지나간다. ‘후!’ 입김 불어넣으며 가래엿 동강 부러뜨릴 -
[시로 여는 수요일] 노거수老巨樹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8.23 14:12:55나는 이제 속도 없다 빛나는 나이테도 없다 안팎을 들락이는 바람 소리뿐어느 하루 나 쓰러진다고 기뻐하지 마라 얼마나 많은 해와 달이 여기 등 기대앉은 사람들의 한숨과 이야기들이 나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냐어느 하루 나 쓰러진다고 슬퍼하지 마라 이 한 몸 사라진 텅 빈 자리에 시원한 하늘이 활짝 트이고 환한 여백이 열리지 않느냐온몸으로 지켜온 내 빈자리에 이슬이 내리고 햇살이 내리고 새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이 걸 -
[시로 여는 수요일] 여름 끝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8.16 10:27:02여문 씨앗들을 품은 호박 옆구리가 굵어지고 매미들 날개가 너덜거리고 쌍쌍이 묶인 잠자리들이 저릿저릿 날아다닌다얽은 자두를 먹던 어미는 씨앗에 이가 닿았는지 진저리치고 알을 품은 사마귀들이 뒤뚱거리며 벽에 오른다목백일홍이 붉게 타오르는 수돗가에서 끝물인 아비가 늙은 오이 한 개를 따와서 씻고 있다아침 이슬 털며 찾은 맏물 오이가 기쁨의 탄성을 자아낸다면, 저녁 서리 속 따낸 작고 꼬부라진 끝물 오이가 풍기는 -
[시로 여는 수요일]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8.09 10:50:14몇 번이나 세월에게 속아보니 요령이 생긴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계절이라 생각될 때 그때가 가장 여린 초록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 보인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 뒤에 다른 광야의 세계가 다가와 있었다두 번 다시는 속지 말자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 사랑은 한 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우린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세월은 언제나 -
[시로 여는 수요일] 행성 E2015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8.02 14:08:28이른 아침에 원시의 밥을 먹고 포스트모던하게 핸드폰을 들고 중세의 회사에 나가 근대적 논리로 일하다가 현대의 술집에서 한잔하고 본능의 잠을 자는 나날들 돌아보면 그저 그렇고 그런 습관들이 만들어내는 안정된 생활이 대사와 동작을 반복하는 코미디처럼 느껴질 때 한번쯤 돌아볼 일이다 월급 명세서 위에서 2차원 활자로 살아가는 자신이 11차원 우주를 뛰어 넘나드는 자연스런 시간과 상상 너머 공간 어디쯤 있어야 하는 -
[시로 여는 수요일] 여름휴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7.26 10:18:39불이 잘 안 붙네 형부는 번개탄 피우느라 눈이 맵고 오빠는 솥뚜껑 뒤집어 철수세미로 문지르고 고기 더 없냐 쌈장 어딨냐 돗자리 깔아라 상추 씻고 마늘 까고 기름장 내올 때 핏물이 살짝 밸 때 뒤집어야 안 질기지 그럼 잘하는 사람이 굽든가 언니가 소리 나게 집게를 내려놓을 때 장모님도 얼른 드세요 차돌박이에서 기름 뚝뚝 떨어질 때 소주 없냐 글라스 내와라 아버지가 소리칠 때 이 집 잔치한댜 미희 엄마가 머릿수건으로 -
[시로 여는 수요일] 빚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7.19 11:05:54아침에 어머니가 쌀을 씻으며 말하신다. 사람은 빚 없이 산다지만 다 빚으로 산단다. 저 꽃나무도 뿌리를 적신 이슬에게 빚졌지 구름도 하늘이 길 하나 빌려 주지 않으면 어떻게 구름이 구름으로 흘러갈 수가 있나. 내 아버지도 평생 네게 빚지고 저승 갔지 그 빚 다 갚으려고 아버지 참새 한 마리로 아침부터 마당 대추나무에 날아와 저렇게 미주알고주알 끝없이 노래해 대지 나도 아버지에게 평생에 진 빚 갚으려 흥얼흥얼 아침 -
[시로 여는 수요일] 매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7.12 11:12:14고작 칠일 울려고 땅속에서 칠년을 견딘다고 더 이상 말하지 말자매미의 땅속 삶을 사람 눈으로어둡게만 보지 말자고작 칠십년을 살려고 우리는없던 우리를 얼마나 살아왔던가환한 땅속이여 환한 없음이여긴긴 없었음의 있음 앞에 있음이라는 이 작은 파편이여 빛나는 것들에겐 그보다 깊은 어둠의 날들이 있다. 푸른 새싹은 땅속에서, 꽃봉오리는 캄캄한 제 가슴에서, 눈부신 별도 낮의 하얀 어둠에서 꺼낸 것이다. 유명배우의 긴 -
[시로 여는 수요일] 벌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7.05 17:20:30지독한 벌이다이중으로 된 창문 사이에 벌 한 마리 이틀을 살고 있다떠나온 곳도 돌아갈 곳도 눈앞에 닿을 듯 눈이 부셔서문 속에서 문을 찾는 벌- 당신 알아서 해 싸우다가 아내가 나가버렸을 때처럼무슨 벌이 이리 지독할까혼자 싸워야 하는 싸움엔 스스로가 적이다 문으로 이루어진 무문관無門關모든 문은 관을 닮았다벌이 벌이었구나. 꽃 아니면 앉지 않고, 꿀 아니면 마시지 않더니 문 속에서 문을 찾는 벌을 받는구나. 사람 -
[시로 여는 수요일] 품어야 산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6.28 10:15:41어머니가 배고픈 아기에게 젖을 물리듯 강물의 물살이 지친 물새의 발목을 제 속살로 가만히 주물러주듯품어야 산다폐지수거하다 뙤약볕에 지친 혼자 사는 103호 할머니를 초등학교 울타리 넘어온 느티나무 그늘이품어주고, 아기가 퉁퉁 분 어머니 젖가슴을 이빨 없는 입으로 힘차게 빨아대듯 물새의 부르튼 발이 휘도는 물살을 살며시 밀어주듯품어야 산다막다른 골목길이 혼자 선 외등을 품듯 그 자리에서만 외등은 빛나듯 우유 -
[시로 여는 수요일] 누구세요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6.21 10:55:54칠순 넘긴 며느리가 구순 시어머니 빤스를 갈아입힌다 다리를 절뚝이며 칠순의 어머니가 할머니와 씨름한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내 이마에 식은땀이 다 난다 귀 어두운 건 피장파장 빌어먹을 하루종일 귀청이 터지도록 소리 질러가며 승강이다 빤스 하나 갈아입히는 것도 전쟁이다 한바탕 일 치르고 나서 눈이 어두워져 돋보기 끼고 신문 보는 손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누구세요? 이제 막 눈을 뜨고 세상 구경 나온 것 같은 저 눈 -
[시로 여는 수요일] 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6.14 12:20:21내 뒷모습은 나 자신의 절반인 것인데 사이도 좋게 딱 반반씩 나눈 것인데 번번이 앞모습만 매만지며 전부로 간주해왔다 벽에 의자에 침대에 바위에 나무에 너에게 툭하면 앉고 기댄 탓에 세상의 소란을 다 삼킨 채 짓눌린 나의 뒤여 아무것도 가질 수도 만질 수도 없이 잠잠한 그늘만 드리운 뒤야말로 응당 앞이 아닐까 하는 생각 우리가 뒤라고 알고 지낸 많은 것들이 실은 진짜 앞이 아닐까 하는 아무리 외로운 사람도 뒤 하나 -
[시로 여는 수요일] 선운사 풍천장어집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6.07 12:26:53김씨는 촘촘히 잘도 묶은 싸리비와 부삽으로 오늘도 가게 안팎을 정갈하니 쓸고 손님을 기다린다. 새 남방을 입고 가게 앞 의자에 앉은 김씨가고요하고 환하다.누가 보거나 말거나 오두마니 자리를 지킨다는 것 누가 알든 모르든 이십년 삼십년을 거기 있는다는 것우주의 한 귀퉁이를얼마나 잘 지키는 일인가. 부처님의 직무를 얼마나 잘 도와드리는 일인가. 풀들이 그렇듯이 달과 별들이 그렇듯이. 풍천장어는 오늘도 팔자를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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