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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 탄생 100주년 세미나> 김준경 "환율·금리·물가·외자문제 한번에 풀어…백상은 경제 해결사"
경제·금융 경제동향 2016.04.28 18:25:04“백상은 우리나라가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정책을 추진한 분입니다. 금리·환율·물가·외자 등 네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했는데 ‘컴퓨터 달린 불도저’라는 별칭도 그래서 나왔습니다.” 이번 세미나 경제 부문에서 백상 장기영 선생의 업적을 조명한 김준경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의 평가다. 그는 “1960년대 제3세계에서는 종속이론의 유행 때문에 수입대체 정책 일색이었는데 유일하게 시장 친화적 개방정책을 펼친 게 우리나라였다”며 “백상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기득권의 반대로 이 같은 구조개혁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상의 추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1964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백상을 직접 불러 부총리직을 제안했다. 당시 경제 상황은 암울했다. 1962년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골자는 수입품을 국산화하는 수입대체 정책이었다. 이를 위해 1962년 역사상 가장 큰 실패를 맛본 정책으로 평가되는 긴급통화조치를 단행한다. 국민이 은행에 맡긴 예금을 동결해 그 재원을 산업개발에 쓰겠다는 것이었다. 당장 미국이 국가 자본주의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식량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나섰다. 부산항과 인천항에 정박해 있던 배에서 미국이 원조 농산물 하역을 중단하자 결국 한 달여 만에 조치가 철회된다. 김 원장은 “은행을 믿을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은행 예금이 사채시장으로 많이 빠져나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백상은 이 같은 경제 현실을 누구보다 직시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에게 시장 자유화 정책이 실현돼야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에서 차관을 들여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만 그 같은 구조개혁이 “정말 어렵다”며 강력한 지지가 필요하다고 설득했고 박 전 대통령의 승낙을 얻어냈다. 그가 부총리에 올라서자마자 단행한 첫 번째 구조개혁은 환율제도의 개혁이었다. 김 원장은 “당시에는 업종과 용도에 따라 환율을 달리 적용하는 복수환율제도로 운영됐는데 때문에 수입업자와 공직자 간에 유착이 있었다. 수입업자들의 반대를 이겨내고 단일변동환율제도로 바꾼 건 백상이 아니었으면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정책 발표 이후 몇 시간 만에 당시 딘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은 한국 정부의 환율제도 개혁을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개발차관계획의 확대를 약속했다. 김 원장은 이를 두고 “우리 역사의 터닝포인트였다”고 표현했다. 두 번째 카드는 금리 현실화였다. 백상은 사채시장에 머물고 있는 돈이 은행 예금으로 들어오고 이 돈이 산업 쪽으로 흘러들어가는 이른바 ‘내자조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 원장은 “1년 만기 정기예금 최고 이율이 하룻밤 사이에 15%에서 30%로 인상됐다. 그 이후 1년여 만에 저축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났다”며 이를 “금융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조치”로 평가했다. 수입 자유화 조치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김 원장은 ‘엄마가 쓰는 외래품에 아빠 공장 무너진다’는 표어를 소개하며 당시의 시대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자동 수입승인 품목이 ‘제로’였는데 수입 자유화 조치 이후 1년 반 만에 63%로 올랐다”며 “제3세계에서 대외개방 정책을 편 것은 우리나라가 최초였다”고 말했다. 백상의 소신이었던 현장 중심의 행정은 물가안정에서 빛을 발했다. 이 같은 백상의 시장 중심 구조개혁을 통해 우리나라는 대규모 외자조달에 성공하면서 후일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을 수 있었다. 김 원장은 “1966년 미국 대외원조국(USOM)에서 한국 경제의 성공을 미국 정부에 보고했는데 이 과정에서 대규모 차관 지원을 약속했다”며 “외자 도입이 없었으면 우리나라 공업화도 못했을 것이고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도 아주 중요한 문제였는데 백상이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 -
<백상 탄생 100주년 세미나> 이병규 한국신문협회장 "언론 독립생존 철학은 선구자적 통찰"
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2016.04.28 18:24:33이병규 한국신문협회 회장은 ‘백상 장기영 선생 탄생 100주년’ 행사에 참석해 언론에 남겨진 백상 선생의 발자취를 조명했다. 이 협회장은 백상 선생을 기념하는 행사가 서울경제신문뿐만 아니라 국내 모든 신문사들의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백상 선생은 1957년 신문협회가 일간신문 발행협회로 창립할 때 초대 부회장을 맡아 기틀을 다졌고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신문협회 회장을 맡아 신문 산업의 기초를 다졌다”면서 “언론계에 큰 족적과 영향을 남긴 백상 선생을 기리는 일은 우리 모두의 일”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이 협회장은 백상이 역설한 ‘언론 독립 생존’ 철학에 대해 ‘선구자적인 통찰’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백상 선생은 1960년대에 언론 스스로 먹고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면서 “당시에는 논란을 일으켰지만 당장 언론사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현시대를 수십 년 전에 내다본 것”이라고 말했다. 이 협회장은 신문 경영자들은 백상 선생에게 붙은 ‘불도저’라는 명성 이면에 있는 치밀함을 배워야 한다고 전했다. 이 협회장은 “백상 선생은 조선일보 사장을 시작으로 한국일보를 세웠고 서울경제신문·코리아타임스·일간스포츠 등 하는 일마다 모두 성공했다”면서 “하지만 광복 이후 한국은행 서울경제연구모임에서 시작해 13년간의 준비를 통해 서울경제신문을 만들었고 이를 발판으로 8년을 기다린 끝에 일간스포츠를 만드는 치밀함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우리 언론인들이 백상을 닮아가야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구경우기자 bluesquare@@sedaily.com -
<백상 탄생 100주년 세미나> 정세균 "많은 분야 업적...현대사의 거인"
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2016.04.28 18:24:27정세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8일 백상 장기영 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행사에서 “이 자리는 정치인으로서 무엇보다 뜻깊은 자리”라며 축사를 시작했다. 백상 장기영 선생은 지난 1973년 9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에 나와 국회의원이 됐다. 정 의원의 지역구도 종로구다. 종로구민은 19대 국회와 앞으로 출범할 20대 국회의 대표자로 정세균 의원을 택했다. 정 의원은 “백상 선생은 종로에서 저보다 40년 앞서서 국회의원을 하셨다”면서 “선생을 한 부분이라도 닮아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할 길이 없을까 생각하며 이 자리에 나섰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백상이야말로 우리 현대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멀티 플레이어’라고 강조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우리나라 근대화의 기틀이 마련되기 전 경제와 언론, 문화, 체육 등 다방 면에서 활동하며 국가 전체의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린 백상의 활약에 대한 평가다. 그는 “백상은 ‘나의 뼈는 금융이고 몸은 체육인이며 피는 언론인이다. 그리고 정치는 나의 얼굴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다”면서 “백상은 금융인으로, 체육인으로, 그리고 언론인, 정치인으로 우리나라에 큰 공을 세웠고 지식인으로서 근대화를 직접 밀어붙인 실천가였다”고 강조했다. 정 의원은 강한 정책 추진력을 보이는 정치인에게 붙는 ‘불도저’라는 별칭은 백상 선생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국내 정치에서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에게 불도저라는 별칭이 붙곤 했지만 현대사가 기억하는 진정한 불도저는 백상 선생”이라며 “백상은 많은 분야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역량을 갖춘 전인적인 지도자의 모습으로 기억된다”고 전했다. 정 의원은 정치인들이 백상의 뜻을 본받아 우리나라가 대내외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보다 한 세대 앞서 현대사에 많은 업적을 남긴 백상은 넘을 수 없는 거인”이라며 “세미나를 기점으로 장기영 선생의 면모가 후세에게 전달돼 귀감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구경우기자 bluesquare@@sedaily.com -
<백상 탄생 100주년 세미나> 박지원 "선생 뜻 이어 일하는 국회 만들것"
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2016.04.28 18:24:11박지원 국민의 당 원내대표는 이날 축사에서 백상 장기영 선생을 기리며 16년 전 문화관광부 장관 재임 때를 떠올렸다. 박 원내대표는 “제가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일할 때 제가 쓰던 방이 바로 백상 선생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재임 당시 사용하셨던 집무실”이라며 “당시 진념 전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경제관료들이 제 방으로 찾아와 ‘백상 선생이 이 방에서 우리 경제를 일으켰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백상 선생은 당시 방에 샤워실과 침대를 만들어놓고 열심히 일하셨다”면서 “저도 백상이 만들어놓은 집무실에서 일을 하며 잠시 잠을 청하기도 하고 샤워를 하기도 했다”며 장관 재임 시절을 추억했다. 박 원내대표는 경제관료들이 백상의 집무실에서 함께 일하며 고락을 함께한 사연들도 소개했다. 그는 “장관으로 일할 때 한 경제관료가 찾아와 ‘이 자리에서 백상 선생께 혼이 많이 나곤 했다’며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면서 “당시에 나라 경제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박 원내대표는 백상 선생은 한마디로 ‘새로움’이라고 평가했다. 금융인에서 경제관료로, 다시 언론인, 정치인, 체육인으로 변모하며 늘 새로움을 추구했던 백상을 본받아야 한다고 박 원내대표는 강조했다. 그는 “백상 선생이 현대사에서 늘 개척자셨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분이었다”면서 “만약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우리나라의 모습이 더 많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사회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는 이날 행사에서 백상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20대 국회를 ‘일하는 국회’로 만들어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저는 국민들이 만들어준 제3당의 원내대표로 추대 받았고 쑥스럽지만 정치인생에서 세 번째 원내대표직을 허락했다”면서 “20대 국회부터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국회로 만드는 것이 오늘날 후배들이 백상 선생의 가르침을 지켜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구경우기자 bluesquare@@sedaily.com -
<백상 탄생 100주년 세미나> "대학에 '장기영學' 만들어 젊은이들 롤모델로 삼아야"
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2016.04.28 18:19:5728일 ‘백상 장기영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세미나’의 주제 발표 후 곧바로 이어진 토론에서 참석자들은 백상의 남다른 면모를 ‘시대를 앞서 간 통찰’과 ‘실천력’에서 찾았다. 냉전이 자유를 짓누르던 시대에 문화·스포츠 등 소프트파워의 힘에 주목했고 금리 자유화 등 규제 혁파와 관련해서도 업무 장악력을 바탕으로 시장에 힘을 실어줬다는 평가가 나왔다. 특히 정치·경제·체육·언론 등 전분야에 걸쳐 큰 족적을 남긴 백상의 삶을 통해 실천이 부족한 우리 사회가 자성해야 한다는 지적은 청중의 공감을 샀다. 같은 맥락에서 대학에 ‘장기영학(學)’을 만들어 젊은이의 롤 모델로 삼을 필요성도 제기됐다. 이번 토론은 권홍우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의 사회로 심상민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김준경 한국개발연구원(KDI)원장, 정동구 태평양·아시아협회 회장(전 한국체육대 총장), 정대철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국민의당 고문)가 참석했다. 다음은 주요 발언. △권홍우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주제 발표 때 담지 못한 얘기가 많을 것 같다. 언론 쪽부터 짚어보자. △심상민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소프트 파워가 현대 국가에서 가장 핵심적인 경쟁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백상이 활동했던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하드 파워 시대였다. 하지만 백상은 보는 눈이 달랐다. 일찌감치 문화와 자본을 결합한 소프트 파워를 생각했다. 지금 이 시점에도 유효한 통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권 위원=민병도 한국은행 총재가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에 입행할 때 일본인 간부들이 ‘조선은행에는 장기영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대단한 인물이었다. 1965년에는 금리 현실화를 이뤄냈다. 45년 만에 푼 것인데 그 결과 일 년 만에 저축이 두 배로 늘어났다. 한국 경제의 고성장을 이끈 주역이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은데. △김준경 한국개발연구원(KDI)원장=백상은 금리와 환율이 시장에서 결정돼야 한다고 했다. 정부가 규제를 만들고 기업들과 수입업자들이 규제 대상이 되는데 여기에는 항상 기득권과의 유착이 있었다. 백상은 이권을 없앴다. 백상은 지금보다 더 어려운 규제를 깼다. 당시 경제관료들은 모든 부처의 경제 관련 규제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완화한다는 것은 관료 입장에서 기득권을 버리는 것이다. 그게 쉬웠겠는가. 박정희 대통령이 백상을 부총리로 임명할 때 시장 자유화 조치를 하겠다고 했다. 그때 백상이 박 대통령에게 경제부처 장차관과 관련된 임명 제청권을 달라고 했다. 그 이후 3년 반 동안 경제기획원(EPB) 장관으로 있으면서 환율정책·금리정책에 소극적인 사람은 다 바꿨다. △권 위원=한국의 두뇌로 불리는 KDI를 설립할 때 초대 원장으로 김만제 서강대 원장을 임명했다. ‘너무 소장파 아니냐’는 지적이 있어 윗선을 다시 물색하다 마지막에 박 대통령이 “김 교수가 서울경제신문에 칼럼 많이 쓰는 교수 아니냐”며 밀어줬다 한다. 서울경제신문의 위상이 대단했다는 증거다. 당시 신문이 4면 체제였는데 종합지와 경제지를 통틀어 체육면을 만들던 유일한 신문이 서울경제였다. △정동구 태평양·아시아협회 회장=백상이 스포츠 시대의 도래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은 8명이 맡았는데 가장 오래 한 이가 바로 백상이다. 남북이 첨예한 대립을 하던 때라 스포츠 외교도 어려웠다. 그 와중에 국제무대에서 우리를 ‘코리아(Korea)’로, 북한을 ‘노스 코리아(North Korea)’로 정한 이가 장 위원이다. 국제 거물급 인사와 교류를 통해 분단국가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권 위원=백상은 소통에 강했다. 요즘 정치를 보면 이런 점이 부족하다. △정대철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국민의당 고문)=한국 정치 현실은 백상의 메시지와 반대로 가고 있다. 백상은 인간미 있는 정치가였다. 언론을 통해 ‘10만 어린이 부모 찾아주기 행사 등을 진행했다. 매년 남이섬에서 ‘소년 여름학교’를 열었는데 더운 여름날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헬기로 아이스크림을 공수해 나눠주던 사람이다. 정치도 결국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런 백상의 정신을 잘 받들어야 한다. △권 위원=독자들이 이런 백상의 전인적 면모를 자주 접하게 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심 교수=지난 2001년 현대그룹 정주영 창업주가 작고했을 때 서울대에서 ‘정주영학(學)’을 만들겠다는 보도가 있었다. 하지만 잠깐 반짝하고는 없는 일이 돼버렸다. 삼성그룹도 내부적으로는 호암자전(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자서전)에 대한 교육을 받지만 ‘이병철학’ 정도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소중한 역사에 대해 정제된 콘텐츠가 부족하다. 그런 맥락에서 ‘장기영 학’을 만들 필요도 있다. 백상이 추구했던 삶을 널리 보여주면 좋지 않겠나. /정리=이상훈·구경우기자 shlee@@sedaily.com -
<백상 탄생 100주년 세미나>한은의 기틀 다진 백상 장기영
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2016.04.28 18:19:39백상(百想) 장기영 선생은 한마디로 말해서 팔색조 같은 인물이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종로구 유권자들에게 “나의 뼈는 금융인이요, 피는 언론인이며, 몸은 체육인이니, 이제 정치인으로서 나의 얼굴을 완성해달라”고 했는데 이는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이순(耳順)을 겨우 넘기고 일찍 작고한 분이 그토록 다방면에 굵은 족적을 남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금융인으로서 백상을 추억하는 것은 그분의 진면목을 왜곡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은행과 한국은행에서 보낸 17년은 그분의 일생에서 중요한 기간이었고 그 시기에 이룬 업적 또한 우리나라 금융계에서 괄목할 만한 것이라서 오늘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백상은 1934년 선린상고 졸업과 함께 조선은행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당시 청어잡이로 상당히 번성했던 청진지점에서 20대를 보냈다. 워낙 친화력이 좋고 활동적이었던 백상은 청진에서 은행원이라기보다는 사업가에 가까웠다. 같은 은행원이었던 조선식산은행의 박승복(샘표식품 회장)은 물론 아무 연고가 없던 청진에서 설경동(대한전선 창업주) 등 현지 사업가들과 의형제처럼 지내며 그들의 어려운 일들을 척척 해결해줬다. 그렇다고 차분하게 연구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일제 말 조선총독부의 명령이 무뎌지고 화폐제도가 흔들리자 ‘만주 국경지대의 국폐문제와 만주국내에 있어서 조선은행권 퇴장사정(1944년 9월)’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해서 도쿄 본부의 이사에게서 큰 칭찬을 듣기도 했다. 난생처음 해보는 조사업무였다. 해방 직후 조사부 차장 시절에는 ‘조선경제연보(1948년 7월)’를 발간했다. 금융기관과 각종 협회 직원들을 총동원해서 만든 그 자료는 오늘날 한국은행이 발간하는 국민소득통계·국제수지통계·금융통계·기업경영분석·산업연관표의 원조 격이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백상이 스스로 생각해보고 밀어붙인 일이었다. 구용서 초대 한국은행 총재는 일제강점기에 연구 인력으로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백상을 발굴해 조사부를 맡긴 것을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문장력도 뛰어났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남북 신탁통치 방안이 결정되자 장기영은 금융기관 직원 대표로서 반탁결의문을 작성했다. 그 때문에 미 군정청으로부터 심한 질책과 함께 해고 위협을 받기도 했다. 금융계가 알아주는 문장력은 훗날 언론계에서 더 큰 빛을 보았음은 물론이다. 금융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백상의 업적은 역시 한국은행법과 은행법 제정에 기여한 점이다. 금융제도의 현대화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 김도연 재무장관, 최순주 조선은행 총재가 합의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조선은행이 중앙은행으로 격상되는 것을 시샘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백상은 양 법안의 초안을 작성했을 뿐만 아니라 재무부를 설득하고 국회에 호소해 두 법이 통과되는 데 수훈갑이었다. 그때 그가 열심히 뛰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일제 때의 금융 시스템으로 6·25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장기영의 활약과 공로가 너무나 두드러진 나머지 한국은행 안팎으로 많은 적이 생겼다. 한국은행 설립 1년 후 백상은 외압에 의해 한국은행을 떠났고 그는 너무 속이 상해서 10년간 한국은행 옆을 지나지도 않았다고 한다. 백상이 한때 지나다니지 않으려 했던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에는 금융계에 남긴 그의 업적이 방문객들에게 소개돼 있다. 필자가 백상을 잊지 못하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필자는 어릴 때 서울 삼청동에 살면서 한국일보 사옥을 자주 방문했다. 당시 건물 밖에는 행인들을 위한 신문 게시판이 있었고 1층에는 조흥은행 수송동 지점이 있었다. 필자는 친구들과 함께 신문 게시판으로 몰려가 길창덕 화백이 소년한국일보에 연재하던 아동만화 ‘재동이’를 훑어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용돈을 저축하는 것이 일과였다(필자가 다닌 재동초등학교에는 ‘재동이’의 팬들이 아주 많았다). 당시 아주 귀했던 에어컨이 조흥은행 안에 설치돼 있어서 기분 좋게 더위를 식히며 책과 잡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자란 필자는 백상의 기상과 열정으로 세워진 한국은행에 근무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한국은행의 금융안정 기능이 사회적 이슈가 됐을 때 필자가 마침 한국은행법을 담당하고 있어서 백상이 1950년 국회와 정부를 상대로 했던 일과 비슷한 일을 하기도 했다. 이제 백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분에 대한 필자의 부채의식과 인연을 떠올린다. 그리고 백상의 그 불꽃 같았던 열정을 이어받을 것을 감히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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