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發 양극화 해소 위해 '합리적 수준'서 정부 개입 필요"
국제 경제·마켓 2020.07.31 17:21:41“한국은 더 이상 개발도상국이 아닙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스토리를 갖고 있고 이런 측면에서는 미국이나 호주와 비슷합니다.” 지난 200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30일(현지시간) 서울경제신문 창간 60주년 단독 인터뷰에서 “20여년 전 한국은 분명히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그것은 한국이 지금보다 훨씬 외화부채에 의존하는 다른 나라였을 때”라며 이같이 말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대표적인 진보 성향의 경제학자다. 그는 한국의 위상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만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수준을 전제로 정부의 개입을 좀 더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우리가 부채 문제를 완전히 무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라면서도 지금과 같은 저금리에서는 부채 증가에 따른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고 실제로도 위기가 올 가능성이 낮다고 설명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은 부채비율이 높으면 외국인투자가들이 이탈할 수 있다고 하자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답했다. 한국의 덩치가 커져 예전보다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커졌다는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외국인투자가들이 한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봅시다. 통화가치가 떨어지겠지만 이는 그렇게 끔찍한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로 일정 부분 부채 부담을 줄여줍니다. 통화가치 하락으로 인플레이션이 생길 수 있지만 그렇게 높지는 않을 것입니다. 미국 같은 나라가 부채위기를 겪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이는 한국에도 들어맞는 얘기입니다.” 기축통화국인 미국과 국가부채비율이 238%인 일본도 아직 부채위기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다만 그는 미국 경제가 약해지고 있으며 이것이 달러 약세로 표출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날 나온 미국의 2·4분기 경제성장률은 -32.9%(전기 대비 연환산 기준)로 73년 만에 최악이었다. 크루그먼 교수는 “지금의 약달러와 금값 상승은 미국 경제의 약점에 대한 시장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며 “사람들은 미국 경제가 오랫동안 약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어 “이들은 금리가 계속 낮을 것으로 예상하는데 이는 달러가 매력적인 투자처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며 금이 대신 살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위안화가 달러를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게 크루그먼 교수의 생각이다. 그는 “글로벌 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유동성이 충분해야 하며 거래가 자유롭고 어떤 상황에서도 거래를 막는 임의적인 조치가 부과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필요하다”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중국은 널리 개방된 금융시장을 갖고 있지 않으며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운 시장이 아니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미중 관계에 대해서는 오는 11월 미국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에도 갈등이 계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크루그먼 교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과의 무역관계를 비난하고 정치적 경쟁자를 중국과 가깝다고 하는 것은 명백히 선거를 겨냥한 정치적 전략”이라며 “하지만 이것이 (쌓이면) 중국과의 관계에 실질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또 “중국 역시 경제적 이익보다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게 더 중요한 나라가 됐다”며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당선되면 무턱대고 중국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을 것이고 모든 것을 중국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중 간에는 지적재산 같은 이슈가 있고 이 때문에 상당한 마찰이 있을 것”이라고 점쳤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미중 갈등은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민주당 대선 후보인 바이든 전 부통령의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전략은 “보호무역주의 성격이 있다”면서도 바이든 캠프에서 이를 내세운 것은 환경 같은 진보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표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크루그먼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는 외국인 혐오증을 바탕으로 국내 정치에 활용된다”며 “바이든 캠프의 경우 노동계를 강하게 대표하기는 하지만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국장 같은 강경파나 외국인을 싫어 하는 사람은 없다”고 전했다. 이어 “환경정책을 팔려면 민주당은 우리가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말해야 한다고 본다”며 “바이든 전 부통령 입장에서는 세계주의자처럼 보이려고 애쓰고 싶겠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적 자산이 부족하다. 그래서 바이 아메리칸을 꺼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를 고려하면 정권교체 시 트럼프 정부 때보다는 보호무역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할 것이라는 게 크루그먼 교수의 예상이다. 그는 “2020년 미국 정치 현장에서 글로벌리스트가 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면서도 “그럼에도 (바이든 전 부통령 당선 시) 세계가 사업을 하기에 훨씬 안전한 곳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의 경기회복은 코로나19에 달려 있다고 봤다. 그는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는 엄청난 악성부채를 지고 회복해야만 했던 과거 불황과는 다르다”며 “미국 정부가 코로나19 대응 초기 두 달간 실수를 했기 때문에 L자형 회복이 될 것”이라고 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미국은 바이러스 확산이 크게 줄어들 때까지 주요 분야를 계속 봉쇄해야 했고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만 했다”며 “하지만 많은 미국인이 술집과 체육관·교회를 다시 열었고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가 잡힌다면 경제가 매우 빠르게 회복되겠지만 문제는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하루에 1,000명에 달하는 상황에서는 우리가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장선상에서 그는 지금 미국 경제는 물가상승률이 계속해서 감소하는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코로나19는 기본적으로 수요 급감에 따른 디스인플레이션 쇼크라고 한 것을 두고 “실제로 그렇다”며 연준의 대규모 유동성에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우리가 백신을 갖게 되거나 한국이나 독일·뉴질랜드처럼 추적·격리제도를 시행하기 전까지는 경기가 지속적으로 약세를 보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고용시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백신이 개발되더라도 보급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데 사람들이 주사를 맞기 위해서는 이것이 안전하다는 믿음이 생겨야 한다”며 “고용시장이 내년 말 이전에 돌아올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했다. 일러야 내후년 초 이후에나 단계적인 회복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저임금 노동자를 정부가 집중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게 크루그먼 교수의 생각이다. “경제위기 때 최악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더 고통을 받습니다. 문제는 정치예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회안전망을 만들고 그중에서도 저임금 노동자처럼 가장 어려운 이들에게 지원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현재 미국은 소비를 떠받치는 핵심요인인 600달러의 추가 실업수당 지급 연장을 두고 공화당과 민주당의 의견이 갈려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크루그먼 교수는 코로나19가 세계화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이동성”이라며 “많은 이들이 코로나19로 비행기를 탈 계획이 없다. 이는 세계화를 저해할 것같이 보인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코로나19가 완전히 끝나면 세계가 다시 이전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도 봤다. 비대면 업무와 생활이 처음에는 편리한 듯했지만 결국 과거의 삶을 원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크루그먼 교수는 “코로나19 이후 사람을 만나던 것을 대체하기 위해 화상회의 같은 원격 방식을 사용했고 처음 몇 달 동안은 이게 더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면서도 “몇 달이 지난 지금 우리는 모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예를 들어 온라인이 아닌 복도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게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잃게 됐는지 깨닫기 시작했다”며 “내 생각에는 지금으로부터 5년 후의 세계는 코로나19 이전의 세계와 훨씬 더 비슷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김영필특파원 susopa@@sedaily.com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 성향의 경제학자이자 칼럼니스트, 베스트셀러 작가다. 1953년생인 크루그먼 교수는 정부의 시장개입을 주장하는 케인스학파로 지난 4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미국 경제가 흔들릴 때도 4조~5조달러 수준의 대규모 재정투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는 일본 경제에는 통화정책 외에 재정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1974년 예일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MIT와 프린스턴대 교수 등을 거쳐 지금은 뉴욕시립대에 적을 두고 있다. 2000년부터 뉴욕타임스(NYT)에 칼럼을 게재해온 그는 케인스 이후 가장 글을 잘 쓰는 경제학자로 꼽혀왔다. 서울경제신문 ‘해외칼럼’에도 매주 그의 글이 소개되고 있다. 그의 책 ‘불황의 경제학’과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 ‘국가는 회사가 아니다’ 등은 국내에서도 큰 관심을 받았다. 1991년에는 미국 경제학회가 40세 미만의 경제학자에게 주는 존 베이크 클라크 메달을 받았고 2002년에는 올해의 칼럼니스트로 선정되기도 했다.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에는 국제무역과 경제지리학 분야 연구를 통합해 자유무역과 세계화가 어떤 영향을 가져왔는지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 점을 인정받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
핵 포기 않는 北...유일한 길은 경제제재[서울경제 창간 60년]
정치 통일·외교·안보 2020.07.30 22:04:25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전 세계를 상대로 보여준 지난 2008년 6월27일 ‘영변 냉각탑 폭파’는 북한의 비핵화 협상전략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당시 북한은 핵 개발로 인한 경제파탄을 만회하기 위해 일부 핵시설 폐기를 협상의 레버리지로 활용했다. 하지만 2008년 이후에도 북한은 비핵화 협상을 진행하며 비밀리에 핵 능력을 발전시켰고 2017년 급기야 핵탄두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개발하며 스스로 핵보유국임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18년 5월24일 2008년을 연상케 하는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하며 비핵화의 진정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해 2월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영변 핵시설만 폐기하겠다고 고집하며 미국 측에 상응조치를 요구했다. 이는 일부 시설 폐기를 협상용으로 제시하는 북한의 비핵화 협상전략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 북한은 지금도 핵무기 개발의 핵심인 우라늄 농축시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관련 시설을 협상 대상에서 제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 협상 파기 역사를 볼 때 북한 핵시설 전체의 사찰 및 폐기 없이 적대시정책 철회 등 상응조치를 취하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북한이 미국에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적대정책 철회는 결국 미군의 전략자산 철수 등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이 제거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비핵화 협상 이후 정세 변화에 따라 다시 핵무장에 나설 경우 한국은 핵 인질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북한과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핵무장은 국익에 맞지 않기 때문에 최후의 보루로 남겨둬야 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과 교수는 “핵무장은 우리가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북한에 핵 보유 개발의 정당성만 부여해준다”며 “중국이 크게 반발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우리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북한 비핵화의 유일한 해법은 미국과 대북제재 공조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 위원장이 비핵화 협상에 나온 것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고강도 대북제재로 인한 북한의 심각한 경제난 때문이라는 분석에서다. 실제 2016년 4차 핵실험 이후 취해진 대북제재는 김 위원장의 목을 조르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북한경제리뷰 5월호에서 ‘올해 북한이 처한 경제 충격 양상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던 1994년을 떠올리게 한다’고 평가할 정도로 북한의 경제상황은 심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대북제재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저런 식으로 1~2년 더 가면 북한이 버티지 못하고 다시 협상장으로 나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박우인·김정욱기자 wipark@@sedaily.com -
이념 편향된 '退行외교' 대신 국익 앞세운 '前向외교'로
정치 통일·외교·안보 2020.07.30 22:02:16세계 패권을 둘러싼 미중 갈등이 전면전으로 치달으면서 한국 정부의 줄타기 외교도 중대 갈림길에 섰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중국 모두의 눈치를 보는 ‘전략적 모호성’이 점차 한계를 맞고 있다고 지적했다. 양국으로부터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현안별로라도 입장을 명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한국이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강한 국방, 유능한 외교력을 키워 발언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20세기 제국주의·냉전시대식 국제관계와 이념 중심 국제전략에서 탈피해 지금은 미래의 새로운 안보·경제위기에 대비한 전략적 우방·동맹관계 강화·확대에 집중해야 할 시기라는 얘기다. 지난 2018년 무역전쟁으로 시작된 미중 갈등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진원지 공방을 거쳐 홍콩 국가보안법, 남중국해 영유권 논란 등으로 이어지며 점입가경의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미국이 텍사스주 휴스턴에 있는 중국 총영사관을 폐쇄하라고 요구하자 중국이 쓰촨성 청두 주재 미국 총영사관 폐쇄로 반격하며 양국 간 갈등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은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미중 어느 편에도 확실히 서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 노선으로 일관하고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2일 기자회견에서 “우리의 기본 외교정책은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중국과의 관계도 조화롭게 발전시켜나간다는 것”이라며 해당 노선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하지만 상당수 전문가는 이에 대해 세계질서 재편에서 소외되는 전략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이 사실상 시진핑 국가주석 장기 독재체제 채비를 갖춘 상황에서 미국 역시 트럼프 행정부가 연장되든, 조 바이든 행정부가 새로 들어서든 중국에 대한 태도는 달라질 게 없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한국의 국가질서 원칙인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공정무역에 입각한 선택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조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우리 정부가 선택의 순간에 자유무역·개방경제·인권 등 분명한 원칙에 따라 행동하면 큰 문제가 없다”며 “미국에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 현재보다 그 같은 원칙이 더 중요하게 먹힐 수 있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미국은 최근 동맹국에 반중 전선 참여를 강하게 요구하며 한국을 난처하게 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 정부에 탈(脫)중국 경제동맹인 ‘경제번영네트워크(EPN)’ 참여를 요구한 데 이어 주요7개국(G7) 정상회의에 호주·인도·러시아·브라질 등과 함께 한국을 초청했다. 21일에는 로버트 스트레이어 미 국무부 사이버·국제통신정보정책 담당 부차관보가 “LG유플러스 등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는 회사들은 ‘신뢰할 수 없는’ 공급업체로부터 ‘신뢰할 수 있는’ 공급업체로 옮길 것을 촉구한다”며 공개적인 압박까지 했다. 7일부터 9일까지 한국을 방문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정책특별대표 역시 방한 과정에서 우리 정부에 ‘반중국 연합전선’ 참여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중국 쪽 블록과 미국 쪽 블록 중 더 큰 쪽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데 이는 보나 마나”라면서 “우리는 법치를 따르는데 중국은 공산당이 법 위에 있는 나라이고 중국이 독자체제를 유지하게 되면 우리도 희생양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중국은 반대로 반중 전선에 동참한 국가에 보복조치를 취하며 공세에 나섰다. 중국은 코로나19 중국 책임론을 제기해온 호주에 대해 육류 수입 일부를 중단한 데 이어 호주산 보리에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다. 화웨이는 버라이즌과 시스코·HP 등에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하며 반격에 나섰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도입으로 인한 ‘한한령(限韓令)’도 아직 풀리지 않은 한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움직임이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나라들을 계속 접촉해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우리나라 스스로가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며 “현 정부가 자주외교·조정자·중개자 등을 강조하며 이념적 이분법을 뒤집어씌우려고 하면 악순환에 들어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차두현 수석연구위원은 “(한국이 미국 편에 확실히 섰을 때) 중국 측의 보복과 압력이 있을 수 있지만 원칙을 천명하고 거기에 맞게 행동하면 된다”며 “중국이 일본에 무역보복을 한 적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미국과 중국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악화 일로를 걷는 한일관계는 한국의 국제적 입지를 더 좁히는 걸림돌로 지목됐다. 강제징용 판결과 일본 기업 자산 강제매각, 일본의 수출규제 지속 등 각종 갈등 현안을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돌파해야 한다는 제언이 많았다. 일본 정부는 현재 한국에 대한 2차 보복까지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신각수 전 주일 한국대사는 “한일관계는 이해당사자가 많아 그것을 다 조정해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만들어야 하는데 현 정부는 관계를 정상으로 돌리겠다는 의지가 별로 없는 것 같다”며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한일 양국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본이 보급기지가 되고, 이는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자꾸 한일관계를 일본 식민지배에 따른 감정으로만 보고 현실로 보지 않는다”고 답답해했다. 김봉만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협력실장은 “전통적으로 일본은 한국의 주요 통상 파트너임에도 지금은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코로나19 이후 강화될 보호무역주의를 한일이 함께 막아내는 역할을 하면 좋을 텐데 지금은 서로 ‘루즈 루즈’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윤경환·조양준·박효정기자 ykh22@@sedaily.com -
[창간특별기고] 잃어버린 성장 동력을 찾아서
경제·금융 정책 2020.07.30 17:42:14우리나라의 경제성장 동력이 약해졌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지난 1960년대 이후 여러 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 수행과 그 이후의 노력은 단숨에 우리나라를 후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경제개발 모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지속적으로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이 하락하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김세직 서울대 교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의 이동평균은 1990년대 중반 이후 5년에 1%포인트씩 하락하고 있다. 그 결과 지난해에는 2%를 간신히 넘기는 경제성장을 했고 그것도 그나마 정부의 재정지출 덕이라는 평가가 많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마이너스 성장을 할 가능성이 큰데 비록 올해의 마이너스 성장이 일회성이라고 해도 내년 이후 과거의 성장잠재력을 되찾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성장잠재력이 사라지는 것일까. 국내 경제학자들의 최근 연구는 이 질문에 대해 흥미로운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김 교수가 안재빈 서울대 교수와 함께 수행한 다른 연구에 의하면 잠재성장률의 하락은 노동인구가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이전하는 추세와 연관성이 크다. 우리나라의 제조업은 생산성이 높고 서비스업은 생산성이 낮아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바가 반대로 나타난다. 전체 노동인구가 고정돼 있는데 이중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면 제조업의 높은 생산성에 비례해 많은 소득이 창출되므로 성장률이 높고 반대의 경우에는 성장률이 낮아진다. 따라서 성장률의 하락을 막기 위해서는 제조업으로부터 서비스업으로 노동력이 이동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답이 나온다. 그런데 왜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노동력이 이동하는지를 들여다보면 이 자명한 답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음을 발견한다. 우리나라 성장의 원동력이 과거에는 생산성 높은 제조업이었다. 그러나 경제성장으로 인한 자본의 축적과 함께 제조업은 자동화를 추진하고 노동 투입을 줄이려 한다. 이는 노동의 비용이 자본의 비용보다 비싼 데 따른 것으로 기업들의 자연스러운 이윤추구 행위의 결과이다. 이 경향은 최근 들어 디지털화 그리고 인공지능(AI) 도입과 같은 4차 산업혁명의 진행에 따라 더욱 심화하고 있어 제조업의 고용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것이 불가피하고 정부가 이를 억지로 막을 방법은 없다. 한편 서비스업 하면 금융업 같은 고부가가치 직종도 포함하지만 우리나라의 낮은 생산성을 가진 서비스업은 영세한 음식점 같은 곳을 말한다. 박정수 서강대 교수의 연구는 왜 우리나라 서비스업의 생산성이 낮은지를 설명해준다. 우리나라의 소규모 음식점들은 버젓한 직장에 근무하다 여러 이유로 그만둔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창업한 영세업소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은 제대로 된 기술도 없이 무작정 창업을 하고 1~2년 이내에 거의 문을 닫는다.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은 매우 경직적이고 해고를 하기 어려운 곳으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용이 줄어드는 제조업으로부터의 노동력 방출은 계속될 것이다. 또 경기 순환 과정에서 해체된 기업에 근무하던 사람들은 회사가 없어졌으니 실업을 피할 방법이 없다. 마지막으로 정년이 가까운 사람들도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때가 온다. 이렇게 밀려난 사람들은 다시 고용되기 어려우니 울며 겨자 먹기로 기술도 없이 소규모 창업을 하지만 결과가 좋을 리 없다. 한번 고용을 하면 해고가 어려우니 회사들은 고용에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한다. 실업자가 눈높이를 낮추더라도 다시 직장을 얻기 어렵다. 이것은 기업의 관점에서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사람을 고용하는 데 조심하다 보니 성장하려고 하더라도 쉽지 않다. 우리나라 경제성장 동력을 되찾기 위한 방법은 결국 사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제조업에서 고용이 줄어드는 것은 기술의 진전과 더불어 불가피한 현상이다. 문제는 제조업에서 방출되는 노동력을 생산성이 높은 기업으로 다시 재배치하는 것이다. 제조업 부문이 더욱 확장되는 것은 어려워 보이니 서비스업을 생산성이 높은 형태로 만드는 것이 대안인데 이를 위해서는 영세업소가 아닌 어느 정도 규모의 기업을 육성하고 이들이 새로운 사람을 고용하는 것을 너무 조심스러워 하지 않도록 고용시장의 유연성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
[서울경제 창간 60년]서경 제호 탄생 배경은
경제·금융 정책 2020.07.30 17:34:56‘서울경제신문’이라는 제호는 당대의 경제연구 친목회 겸 스터디클럽인 ‘서울경제연구회(일명 수요회)’에서 따왔다는 게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조사부를 창설한 백상 장기영(당시 조사부 차장)과 주로 금융기관과 협회의 조사·연구 분야에서 일하던 핵심인력 8명은 해방 직후인 1947년 서울경제연구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수요 모임을 열어 경제건설에 대해 토론을 편 끝에 자연스레 경제신문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국내 최고 재벌의 경제신문 공동창간 제의도 마다했던 백상은 4·19학생혁명의 결과로 신문발행업이 인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자 경제신문 창간을 실행에 옮겼다. 제호는 백상의 자문역이었으며 한국일보 경제논설도 맡았던 서울경제연구회 회원들의 제안에 따라 서울경제신문으로 정했다. 비하인드스토리를 들어보면 ‘시사경제신보’ ‘한국경제일보’ ‘경제한국’ 등도 물망에 오른 것으로 전해진다. 1960년 창간부터 사용한 제호는 로고와 서체만 몇 차례 바뀌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황정원기자 garden@@sedaily.com -
노무현 "서경 칼럼보면서 공부했다" [서울경제 창간 60년]
경제·금융 정책 2020.07.30 17:34:09우리나라에 ‘경제 저널리즘’을 꽃피운 서울경제신문의 역사는 무수한 사연들로 가득하다. 장기연재 칼럼이었던 ‘경제교실’은 고시나 대기업 취직의 필독서처럼 여겨졌다. 상고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뒤 독학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공식석상에서 “경제 과목을 공부할 때는 서울경제의 ‘경제칼럼’으로 공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2005년 경제부장단 간담회에서 “서울경제가 최고의 경제지였다”고 언급해 다른 매체의 부장들을 머쓱하게 만들기도 했다. 여러 차례 “서울경제를 보면 예전에 공부했던 기억이 새롭다”고 공개적으로 밝힐 정도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현대건설 사장 재임 시절 서울경제의 월례 정기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한 바 있다. 박승 전 한은 총재는 “서울경제는 나의 신문”이라고 말할 정도로 애독자였다. 한국 경제학계의 한 획을 그은 조순 전 부총리를 비롯해 고 남덕우 전 국무총리, 이규성 전 경제부총리,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나웅배 전 경제부총리 등 수많은 정재계 논객들은 촌철살인의 글로 한국 경제정책의 조타수 역할을 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서울경제를 가장 많이 활용한 리더였다. 1967년에는 신년 공동기자회견이 아니라 이례적으로 서울경제와 단독 인터뷰를 하며 신년 구상과 당면목표를 소상하게 밝혔다. 그는 국책연구소를 만들며 부원장으로 추천된 모 교수에 대해 “그 사람이 서경에 기고한 칼럼을 잘 읽고 있다”고 칭찬한 뒤 바로 원장직을 맡겼다는 일화도 있다. /황정원기자 garden@@sedaily.com -
국내 첫 경제정론지…희망의 100년 보며 달려온 60년史
경제·금융 정책 2020.07.30 17:13:09희망의 100년을 보며 달려온 60년 ‘국민경제의 전체적 이익을 대전제로 하여 시시비비(是是非非)에 철두철미할 것.’ 대한민국 최초의 경제정론지로 태어난 서울경제신문은 1960년 8월1일 창간사에서 ‘경제의 안정·부흥을 통한 국민경제의 자립화’를 긴급한 과업으로 내걸었다. 다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편에 서 이 나라의 경제 저널리즘을 정상(正常)한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는 데 일조(一助)가 될 것을 맹세했다. 서울경제의 지난 60년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뼈아픈 시련과 함께했던 역경의 과정으로 응축된다. 국내 최초의 경제정론지로 출발 1960년에는 정치가 불안정하고 어수선했다. 3·15부정선거가 4·19학생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자유당 정권은 막을 내렸다. 민주당 정권은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웠으나 혼란은 더 극심해졌다. 서울경제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태어났다. 서울경제 창간호 1면 머리기사 제목은 ‘경제 9월 위기, 갈수록 심화-물가 15% 앙등·생산 3.8% 위축’이었다. 시작부터 우리 경제에 대한 경고를 아끼지 않았다. 창간호부터 100회에 걸쳐 연재된 ‘경제백서’와 1960~1970년대를 가로지른 ‘경제교실’은 독자들의 경제교과서였다. 경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관련 서적도 마땅히 없던 시절, 당시 주력산업이었던 광업에서 농업·금융·제조업까지 한국 경제의 실태를 생생히 전달하고 개선방향을 제시했다. 또 전직 경제부처 장관, 은행장, 재벌 총수들이 번갈아 집필한 ‘재계회고’ 시리즈 또한 필독 칼럼이었다. 서울경제도 석간을 발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창간 이래 조간이었던 서울경제는 1969년 1월21일 석간으로 전환했다. 1972년 10월3일자부터 조간으로 돌아오기까지 3년9개월이라는 적지 않은 기간에 석간으로 발행됐다. 서울경제를 찾는 독자가 많아 한국일보와 조석간을 나누겠다는 의도가 컸다. 철권통치가 내린 강제 종간에도 8년 만에 부활 1970년대까지 서울경제는 정책결정과 여론형성을 주도하는 독보적인 경제정론지로서 당시 경제지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다. 정권 장악을 위해 언론을 길들이려던 신군부는 1980년 언론 통폐합을 강행하며 서울경제를 폐간시켰다. “서경이 없어지면 한국에서 경제신문이 없어지는 것”이라는 각계각층의 우려가 쏟아졌으나 하루아침에 펜을 꺾어야 했다. 서울경제 폐간의 이유는 ‘타 언론사와의 형평성을 고려, 폐간’이라는 단 한 줄이었다. 한국일보그룹은 결국 한국일보와 서울경제 중 택일하라는 압박을 이기지 못했다. 11월25일 서울경제의 1면 제목은 ‘본지 오늘로 종간(終刊)’. 지령 6,390호를 마지막으로 창간 21년3개월25일 만이었고 이후 7년9개월의 시간을 강탈당했다. 고통과 시련의 시간을 거쳐 1988년 8월1일 서울경제는 복간했다. 총 32면으로 발행된 복간호 1면 머리에 ‘새 시대 새 모습으로 거듭나다’라는 제목의 복간사를 배치해 부활의 소회와 각오를 담았다. 이후 경제지 최초의 월요일자 발행(1990년 3월5일), 경제지 최초의 인터넷신문 창간(1996년 1월16일) 등 판도를 바꾸는 시도를 이어왔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전 국민 주식 갖기 운동’을 펼쳐 IMF 외환위기 조기졸업을 도왔다. ‘오늘의 경제소사’는 복간 이후 게재된 시리즈 중 최장(最長)인 만 5년9개월간 7,163회가 연재됐으며 독자들의 호평에 힘입어 부활하기도 했다. 서울경제의 강제폐간을 조사했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10년 국가의 사과와 피해구제를 위한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권고안을 내놓으며 불명예를 씻어줬다. 정상을 향해 새로운 비상 2000년대 초반은 서울경제가 독자생존의 체제를 갖추기 위해 지나야 했던 가시밭길이자 새로운 비상을 위한 출발점이었다. 한국일보그룹의 경영난과 한국일보의 법정관리 및 분리라는 혼돈 속에서 2013년 12월 배달망을 개편했다. 이는 한국일보와의 결별을 의미했다. 독자적인 홈페이지도 구축했다. 2007년에는 ‘무협TV’를 인수해 서울경제TV SEN을 출범시켰다. 2010년에는 서울경제의 대표적 행사로 자리 잡은 ‘서울포럼’이 시작됐다. 이후 ‘금융전략포럼’ ‘대한민국미래컨퍼런스’ ‘한반도경제포럼’ ‘에너지전략포럼’ 등 각 분야의 인사들과 함께 토론하고 정책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가 속속 만들어졌다. 디지털 시대에 맞춰 2017년에는 국내 최초의 블록체인 전문 미디어 ‘디센터(Decenter)’를 설립했다. 2018년에는 서울경제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한 서울 종로구 ‘중학동 14번지’로 11년 만에 돌아왔다. 그해 8월 프리미엄 컨버전스 미디어 ‘시그널(SIGNAL)’이 출범했고 올해 1월에는 4050세대 전문 온라인 미디어 ‘라이프점프’가 창간됐다. 특히 올해 6월부터는 ‘세상 어디에서든, 언제나 독자와 만나는 미디어’라는 슬로건으로 디지털 기반 종합 미디어 매체 전환을 추진하며 콘텐츠 생산과 유통체계, 인터넷 홈페이지를 전면 개편했다. 서울경제 복간사에서는 “앞으로 정치·경제적 이해집단에 의해 조종되는 일 없이 국민경제의 양심적인 파수꾼 노릇을 충실히 하고자 함을 여기서 엄숙히 다짐한다”고 강조했다. 희망의 100년을 보며 달려온 서울경제는 60주년을 맞은 지금 그 정신을 새기며 어떤 권력과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황정원기자 garden@@sedaily.com -
경제大國 진입 동반자로…영욕의 세월 펜촉에 담아 [서울경제 창간60주년]
경제·금융 정책 2020.07.30 17:07:06전쟁의 상흔이 남아 최빈국 상태였던 지난 1960년. 대한민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9억8,700만달러(2,498억원)에 불과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으로 한국경제는 고속성장의 용틀임을 시작했고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르면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대한민국은 1970년대 석유파동과 1997년 IMF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겪으면서도 국민소득 3만달러, 인구 5,000만명 이상인 30-50클럽에 일곱 번째로 가입했다. 2019년 GDP는 1조6,463억달러(1,919조399억원)로 60년 만에 828배 커졌다. 서울경제신문은 시대를 앞서가는 특종과 기획으로 선진 경제대국 진입의 동반자 역할을 해왔다. 한국경제 태동기 1960년대는 성장의 토대를 닦는 시기였다. 군사정부는 수출 공업화 정책을 시작하며 개발연대의 서막을 열었다. 창간 직후인 1960년 8월2일자에 서울경제는 ‘드러난 한미 경제 밀약 내용-예산 등 공동 검토·공정환율도 실세로 인상’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1면 톱으로 게재했다. 이때부터 한미 경제협정이 타결될 때까지 집요하게 협정의 불공정·불평등을 물고 늘어졌다. 기사와 함께 한 면을 할애해 이 협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만평도 실었다. 결국 이 협정은 초기의 불평등 조항이 빠진 채 한국에 유리한 조건으로 맺어졌다. 1960년 9월28일자에는 ‘국영기업체 불하 결정’ ‘재력 있는 원매자를 물색-일차로 조선공사’라는 특종 기사가 지면을 장식했다. 재무부 장관이 재일교포 재벌과 수의계약 교섭을 진행 중이라는 부제목이 딸린 이 기사는 주요 기업들로 하여금 국영기업체 인수전에 나설 채비를 서두르게 만드는 등 경제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1966년 9월에는 일본이 한일 어업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공동규제수역에서 잡은 고기의 양을 부풀리려 한 의혹을 고발했다. 엄청난 반향 속에 수산청은 어획량 보고를 재검토하고 한일 어업협정을 우리 측에 유리하게 이끌어냈다. 1967년 1월11일자 1면에는 ‘개발금융회사 3월 발족’이라는 제하의 톱 기사가 나갔다. 국제금융공사 조사단의 방한 소식과 더불어 소개된 이 특종은 보름간 후속기사가 이어지며 한국의 ‘제2금융권’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고도성장기 한국경제는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경부고속도로를 시작으로 철도 등의 교통망이 본격 구축됐다. 다만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탓에 두 차례의 석유파동(1972~1973년, 1979~1980년)을 겪으면서 급격한 물가상승과 경상수지 적자라는 후유증도 앓았다. 1973년 2월 ‘종합무역상사 설립 추진’이라는 단독 기사는 재벌그룹들의 치열한 선정 경쟁으로 이어졌다. 서울경제신문은 추진 일정부터 지정까지 상세 보도했고 종합무역상사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계열기업군을 이끄는 선단경영의 핵심이자 수출 대들보 역할을 했다. 1977년 7월 도입된 부가가치세의 당초 예정된 세율은 13%였다. 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한 박정희 대통령은 부가세 도입은 강행하되 상인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세율은 10%로 낮추기로 했고 서울경제신문은 이를 특종 보도했다. 암흑기에서 재도약기 1980년대 우리 경제의 버팀목은 수출이었다. 저금리·저환율·저유가의 3저(低) 현상을 등에 업고 수출증가율은 30%가 넘었다. 그러나 호황기에 유입된 유동성에 따른 부동산 거품도 발생했다. 1989년 부동산 투기가 전국을 휩쓰는 가운데 ‘정부가 종합토지세 도입을 검토하고 있으며 부과 대상은 전국의 모든 토지로 삼는다’는 내용을 단독 보도했다. 파장은 커졌고 1990년 시행될 때는 내용이 축소됐다. 1990년 10월 정부가 소련과 수교한 뒤 후속조치로 3년 동안 30억달러의 경협차관을 제공한다는 ‘대소경협 30억달러 지원’ 기사는 정국에 회오리를 일으켰다. 국회에서는 ‘구걸외교론’까지 제기됐다. 한국은 대기업들의 연쇄 파산과 외화 유동성 부족으로 1997년 12월3일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55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는 치욕을 겪었다. 외환위기 직전 당국은 ‘펀더멘털은 튼튼하다’ ‘IMF에 가는 일은 절대 없다’고 허장성세를 부렸다. 서울경제신문은 1997년 11월21일자 가판에 스탠리 피셔 IMF 수석부총재의 극비 방한을, 본판에서는 600억달러 구제금융협의를 가장 발 빠르게 보도하며 혹독한 시련을 예고했다. 비밀리에 방한한 IMF 수석부총재가 국내 인사와 호텔에서 비밀협상을 벌였다는 특종은 관련 사진과 함께 전 세계로 퍼졌다. 1990년대 말 전 세계적 정보기술(IT)붐에 이은 벤처붐은 외환위기를 벗어나는 원동력이 됐다. 서울경제신문은 2000년 10월 코스닥기업 L사가 1조5,000억원의 자금을 3시간짜리 초단기로 빌리며 외자유치로 위장한 것을 추적, 보도하면서 무분별한 외자유치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21세기 정상으로 2003년 카드사태에 이어 2008년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숨 쉴 틈 없이 위기가 몰아닥쳤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전 세계가 침체에 빠져들었다. 2009년 내수 진작을 위한 노후차 세제지원 특종도 서울경제의 몫이었다. 세월호 참사로 온 국민이 경악했던 2014년, 4월18일자 ‘세월호 선사 청해진해운, 세모가 전신’이라는 기사를 통해 청해진해운의 실질적 대주주가 각종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유병언 전 회장의 아들들이라는 실체를 밝혀냈다. 최근에는 경제지의 특성을 살려 금융투자비리 의혹을 심층 취재했다. 2016년에는 ‘청담동 주식부자’ L씨 ‘수상한 투자’ 베일 벗나 기사를 통해 청담동 주식부자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탄 이희진의 실체를 파헤쳤다. 2019년에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의 사모펀드 비리를 추적했고 75억원이 투자된 사모펀드의 서류상 대표 외에 실제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과 실제 주인이 바로 조 전 장관의 친척이라는 사실을 연이어 보도했다. 또 지난해 5월에는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의 홍남기 “국가부채 마지노선 40%로 재정 운용” 文 “근거가 뭐냐, 미국은 107%라는데” 단독 기사를 보도해 국가채무비율 40%와 재정건전성 이슈를 제기했다. 올해 성장률은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전통 제조업의 바통을 이어받을 성장 모멘텀이 절실한 상황이다./황정원기자 garden@@sedaily.com -
기후변화·기초과학·국가시스템 개조…정곡 찌른 기획시리즈, 시대정신 이끌어 [서울경제 창간60주년]
경제·금융 정책 2020.07.30 17:07:00서울경제신문은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위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매년 신년기획과 8월 창간기획을 통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시리즈를 게재했다. 역사는 반복되는 만큼, 수년 전 다뤘던 ‘어젠다’일지라도 2020년 한국경제에 그대로 새겨도 될 정도의 깊이가 담겨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 2007년 가을부터 2008년 초까지 석 달 가까이 나간 기후변화 시리즈는 관료와 전문가들 사이에서 정책의 교과서로 꼽힌다. 기후변화협약의 현황과 미래전망은 물론 신기술 동향과 세계 각국의 입장을 현지취재로 심층 분석했다. 최근 정부가 친환경저탄소 전환을 가속화하겠다는 로드맵을 포함한 ‘그린뉴딜’을 발표하면서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2011년에는 신년기획 ‘과학입국’ 다시 불 지피자 시리즈를 통해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알렸다. 일본과 중국은 연구개발(R&D)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는 데 반해 우리는 생존에 급급해 안일한 대응에 머물고 있는 현실에서 서울경제신문이 던진 화두는 ‘과학 기술’이었다. 그해 창간기획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포퓰리즘’으로 잡았다. 8월1일자 1면 머리기사 ‘포퓰리즘이 국가 흥망 가른다’ 르포를 시작으로 13회 모두 해외취재로 이뤄졌다. 아르헨티나·일본·영국·그리스·브라질 등 과도한 복지와 선심정책으로 국가존립이 위협을 받고 쇠락의 길로 접어든 나라가 대상이었다. 우리 정부는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계기로 전 국민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고 재정지출을 제어하지 않으면서 포퓰리즘 논란이 다시 제기됐다. 2013년 서울경제신문은 소프트웨어에 주목해 6개월 가까이 ‘국가시스템 개조’ 시리즈를 게재했다. 국가나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흔들리지 않는 체계’, 바로 시스템이 선진국에 비해 탄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는 물론 법·질서, 경제정책, 기업, 부동산, 증권, 교육, 복지, 문화 등 모든 영역의 문제점과 해법을 찾아봤다. 2017년 창간 57주년 기획으로는 ‘꿈·사랑 대신 일자리·힘들다에 갇힌 청춘’-2017 청년을 말한다를 주제로 정했는데 청년들의 아픔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2009년 창간기획 시리즈 ‘인구 대재앙-Agequake 9.0’은 우리나라에 저출산·고령화 문제가 닥치기에 앞서 선도적으로 인구문제를 공론화시켰다. 2018년 신년기획은 파격적인 편집을 시도했다. 1면을 별도의 기사 없이 서울경제가 제안하는 신년 비전 ‘이제는 미래를 이야기하자’라는 제목과 함께 이를 위해 해결해야 할 한국경제의 당면 과제 및 벤치마킹 국가 등을 핵심 키워드로 소개했다. /황정원기자 garden@@sedaily.com -
은행원→언론인→경제부총리→국회의원…'백상 장기영'이 남긴 교훈
문화·스포츠 문화 2020.07.30 16:04:48“나의 뼈는 금융인이요, 몸은 체육인이며, 피는 언론인이다. 그리고 정치인은 나의 얼굴이다.” 쉴 새 없이 솟아나는 아이디어를 가졌다 하여 ‘일백 백(百)’ 자에 ‘생각 상(想)’ 자를 호로 쓴 백상 장기영(1916~1977년) 선생이 생전에 그린 자아상이다. 은행원으로 시작해 한국은행의 토대를 다진 금융인이요, 서울경제신문과 한국일보를 창간한 언론인이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지낸 체육인이면서 경제부총리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니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컴퓨터 달린 불도저’라는 별명처럼 치밀함과 추진력을 겸비한 백상은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만들고 미답의 영역을 개척해낸 한국 현대사의 거목이자 시대의 선구자였다. 서울경제 창간 60주년을 맞아 되돌아보는 그의 발자취는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 미증유의 혼돈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우리에게 믿음직한 지표를 제시하기 충분하다. 지난 1916년 5월2일 지금의 서울시 한남동인 경기도 고양군 한지동에서 태어난 장기영은 어린 시절부터 줄곧 1등을 도맡았다. 수재들만 모였다는 선린상업에서 늘 최상위권에 올라 졸업하던 1934년에는 ‘우등 졸업자’로 일간신문에 이름과 사진이 함께 실렸다. 서울대 상대의 전신인 경성고등상업에 무시험 입학할 특전을 받았지만 가정형편 탓에 진학의 뜻을 접은 그는 지금으로 치면 거대 다국적 기업인 조선은행에 입사해 청진점에서 스무 살의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발군의 인재였다. 1943년 당대의 경제학·사회학 이론에 케인스 이론을 접목한 논문 ‘저축과 물가, 그리고 인플레’는 엘리트들이 집결한 조선은행 내부 공모에서 1등 상을 거머쥐었다. 이론에만 밝은 게 아니었다. 백상은 조선은행 최초의 ‘신용대출’을 밀어붙인 주인공이다. 태풍으로 배를 날린 선주가 필사적으로 돈을 구하러 다니는 것을 본 백상은 ‘폭풍우를 뚫고 배를 구하려 한밤중에 뛰어다니는 정신’을 높이 사 담보 없이 선뜻 대출을 권했다고 한다. 유례없는 신용대출을 받은 선주는 재기에 성공해 훗날 손꼽히는 재벌그룹을 이뤄냈다. 백상의 인재 중시와 사람 보는 안목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조선은행에서 국가 중앙은행으로 승격된 한국은행으로 적을 옮겨 조사부에 근무하던 시절에는 6·25전쟁으로 굶주린 인사들을 위한 전시(戰時) 신용대출을 밀어붙였다. 덕분에 중요한 인재들은 본업을 중단하지 않고 전쟁통에서 살아남았다. 이 밖에도 한국은행 시절 백상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혜안은 금융계에 굵직한 자취를 남겼다. 해방 직후인 1948년 7월 조사부 차장 신분으로 발간한 ‘조선경제 연보’는 오늘날 한국은행이 발간하는 국민소득통계·국제수지통계·금융통계·기업경영분석·산업연관표의 원조가 됐다. 한국은행법과 은행법 제정에 대한 기여는 그 시기 백상의 최대 업적으로 꼽힌다. 다만 낭중지추라 공만큼 적도 많았다. 한국은행 설립 1년 후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대신해 은행원으로서의 1막을 끝낸 그는 언론인으로서 인생의 2막을 열었다. 언론인으로서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재정난에 빠진 조선일보였다. 1952년 4월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2년간 부수 13배 신장의 기록을 이뤄냈다. 이후 타의에 의해 신문사를 나서면서 그는 젊은 조국에 걸맞은 새로운 언론의 필요성을 자각했다. 태양일보를 인수해 1954년 6월9일 창간한 한국일보는 뉴스의 가치에 의해 독자에게 인정받고 광고주에게서 광고 게재를 의뢰받는 상업지를 표방했기에 남달랐다. 사장실에 야전침대를 설치하고 철야로 신문제작을 독려한 백상의 일화는 유명하다. 원탁회의부터 난상토론까지 기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아끼지 않았다. 그 자신도 문장가였다. 조사 ‘은·는’과 ‘이·가’가 어떻게 다른지를 기자들에게 설파했고 직접 사설도 썼다. ‘신문기자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비롯해 ‘사건이 발생한 그 시간이 바로 마감시간이다’ ‘신문은 비판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지만 칭찬하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등의 어록은 기자들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1960년 8월1일 창간한 서울경제는 13년 숙고의 결과물이었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은 1947년 초 그를 포함한 은행의 30대 실무책임자 8명이 결성한 ‘서울경제연구회’다. 이들은 매주 수요일마다 모여 새로 태어난 조국의 경제에 대해 토론하며 생각을 키워갔다. 그렇게 10여년간 신중히 때를 기다린 백상은 오랜 동지들인 서울경제연구회의 제안으로 마침내 ‘서울경제’ 창간을 결정했다. 백상의 통찰력은 서울경제 지면에서도 어김없이 빛을 발했다. 백상은 창간 일주일 뒤부터 김포공항에 전담기자를 배치해 공항을 오가는 주요 인사들의 출국 일정, 해외업무 계획을 전하는 ‘경제인 왕래’라는 고정란을 서울경제 지면에 만들었다. 해외출장이 극히 드물던 시절, 누군가 비행기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경영정보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한국 언론에 항공기를 처음 도입한 것도 백상이었다. 항공부를 만들어 단발기와 쌍발기·헬리콥터를 사들였고 다양한 항공사진을 실어 지면의 질을 끌어올렸다. 5·16 직후 신문제작용 종이가 부족할 때는 몸소 서울과 부산을 하루 두 번씩 왕복하며 신문용지를 실어날랐고 수해로 배달이 불가능해지면 항공기로 신문을 싣고 가 학교 등의 옥상에 뿌렸다. 백상은 쓴소리여도 바른 소리를 고집했다. 1961년 칠레월드컵 출전을 앞두고 정부가 공산권인 유고슬라비아 선수단의 방한과 우리 대표팀의 원정을 불허하자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이던 그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가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이때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백상의 범상치 않음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는 후문이다. 실제 박 대통령은 경제이슈가 터질 때마다 “서울경제를 가져오라”고 했으니, 날카로운 분석과 정확한 예측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 식량난이 극심하던 1963년 8월 세계적인 곡물 부족 와중에 한국이 일본을 통해 캐나다산 밀가루 10만톤을 수입한 적이 있는데 이를 막후에서 성사시킨 이도 백상이었다. 공식 외교채널로도 해결할 수 없던 곡물 수입을 백상이 일본 내 인맥을 총동원해 이뤄낸 것이다. 이듬해인 1964년 5월11일 백상은 박 대통령이 단행한 개각에 따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입각했다. 좀체 측근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는 박 대통령이 경제 분야만큼은 전권을 일임했다. 취임식에서 ‘물가를 때려잡고 저축을 늘릴 테니 6개월만 참고 기다려달라’고 했던 그의 약속대로 한국 경제는 백상이 경제부총리로 재임하던 기간 중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고속성장 가도에 들어섰다. 경제기획원은 백상이 서울경제·한국일보 발행인으로 복귀한 1967년 10월까지 최강 경제부처로서 한국 경제의 고속질주를 이끌었다. 문화·스포츠 분야에서는 든든한 후원자요, 시대를 앞서 간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 유엔이 정한 세계여성의 해인 1975년에는 공채로 여기자만 뽑았다. 백상과 함께 한국 경제는 승승장구했으나 유신 정부의 언론통제는 심각해졌다. 권력에 의해 쫓겨나는 기자들이 생겨났으나 서울경제와 한국일보만은 해직 기자가 없었다. 백상이 이들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정작 백상 자신의 건강은 챙기지 못했다. 남들의 네다섯 배나 열정적인 인생을 산 백상은 우리 나이 겨우 62세로 타계했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한국의 경제·언론·정치·문화·스포츠는 또 다른 양상으로 발전했을지 모를 일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
레바논 "모든 유로채권 채무상환 중단"
국제 경제·마켓 2020.03.24 15:35:14레바논 정부가 약 300억달러(37조6,900억원) 규모에 달하는 모든 유로채권의 상환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23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는 레바논 재무부가 이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영향으로 줄어드는 외환보유액에 대응하기 위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이달 9일이 만기였던 12억달러 규모의 유로채권을 상환하지 못한다며 ‘모라토리엄(채무상환 유예)’을 선언한 지 17일 만이다. 이번 선언의 배경에는 외국에 갚아야 할 빚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외환보유액이 자리한다. NYT에 따르면 레바논의 외화보유액은 220억달러 수준인 반면 외화 부채는 약 300억달러로 추정된다. 레바논 장기내전에 따른 막대한 국가부채, 높은 실업률, 자국 통화가치 하락 등 경제위기에 직면해오다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경제위기가 심화됐다. 레바논은 국내총생산(GDP)의 170%에 해당하는 910억달러 규모의 채무를 지고 있다. 레바논 보건부에 따르면 23일까지 확인된 코로나19 확진자는 256명이며 이들 중 4명이 숨졌다./곽윤아기자 ori@@sedaily.com -
레바논 반정부시위로 주말새 최소 530명 부상
국제 정치·사회 2020.01.20 08:42:17레바논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지난 주말 사이 최소 530명이 다쳤다고 AFP통신이 19일(현지시간) 전했다. 레바논 반정부 시위대는 이날 수도 베이루트에서 의회 진입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경찰과 대치했다. 의료진은 이 과정에서 최소 145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시위 현장을 취재하다 고무탄에 맞은 언론인 2명도 포함돼 있다. 전날인 18일 시위 현장에서는 시위대와 경찰을 포함해 377명 이상이 다친 것으로 AFP가 자체 파악했으며, 40명이 넘는 시민들이 현장에서 체포됐다. 일부 부상자는 경찰이 쏜 고무탄에 머리와 얼굴, 주요 부위 등을 맞아 크게 다쳤다며 시위대가 “과도한 폭력”에 노출돼 있다고 시위대 측 변호인이 주장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한 영상에서는 경찰이 시위대로 추정되는 시민을 경찰서로 끌고 가면서 마구 때리는 모습이 포착돼 보안당국이 자체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레바논에서 지난해 10월 정부가 왓츠앱 등 온라인 메신저 프로그램 사용에 세금을 부과한 데 반발하며 시작된 반정부 시위가 석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미셸 아운 레바논 대통령은 20일 국방부 장관, 내무부 장관 등과 함께 안보 회의를 개최하고 대응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김창영기자 kcy@@sedaily.com
오늘의 핫토픽
이시간 주요 뉴스
영상 뉴스
서경스페셜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