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해보자. 1,500년 전을 여행할 수 있는 타임머신이 눈 앞에 있다. 돈을 벌려면 뭘 싣고 가야 할까. 답은 설탕이다. 6세기께 유럽의 설탕 값은 금보다 비싸다는 후추 이상이었다. 14세기에도 설탕 1㎏을 사려면 소 10마리가 필요했다. 비싸디 비싼 설탕을 처음 만들어 먹은 곳은 인도. 약 4,000년 전부터 인도인들은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추출해냈다고 전해진다.
지구촌에서 원거리 교역망이 본격 발달하기 전, 설탕이 세계상품으로 등장하기 이전부터 설탕의 수요는 존재했다. 상품이 있기도 전에 무슨 수요냐고 반문하겠지만 ‘단 맛’의 수요는 어디든지 있었다는 얘기다. 설탕이 소금, 면직물과 더불어 3대 세계상품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천연 벌꿀에서 경험한 달콤한 맛의 기억.
달디 단 설탕이 유럽에 전파된 계기는 전쟁에서 왔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나라(폴리스) 취급도 못 받던 변방 마케도니아의 왕자에서 그리스는 물론 중동의 페르시아 제국을 넘어 인도까지 쳐들어 왔던 알렉산더가 무엇보다 신기하게 여겼던 동양의 산물이 바로 설탕이었다. 알렉산더의 군대에 의해 ‘꿀벌도 없이 꿀을 만드는 갈대’로 서양에 소개된 이래 사탕수수는 숭배와 탐욕의 대상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예언자 무함마드를 따르는 이슬람교와 사막 유목민이 결합한 사라젠 제국은 사탕수수의 재배 지역을 더욱 넓혔다. 영토 확장과정에서 중동과 북부 아프리카, 스페인 남부 지역까지 퍼진 것. 십자군 전쟁의 원인 중에는 술판의 드넓은 사탕수수밭을 빼앗아 한 몫 챙기겠다는 유럽 제후들의 욕심도 숨어 있었다.
전쟁으로 재배지역이 넓어진 사탕수수는 경제전쟁을 낳았다. 가와기타 미노루(川北稔) 오오사카대 명예교수의 ‘설탕의 세계사’에 따르면 르네상스(문예부흥)을 촉발시킨 요인으로 작용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경제적 풍요와 13세기 이후 저지대지역(오늘날 베네룩스 3국)의 급성장도 설탕 중계무역과 교환 시장을 유치하고 상권을 장악한 덕분이다.
전쟁과 더불어 설탕의 소비지역을 유럽 전역으로 넓히고 소비층을 일반인까지 확대시킨 요인은 두 가지 더 있었다. 신대륙 발견과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 아메리카 대륙에서 기대했던 금이 나오지 않자 콜롬버스는 2차 항해부터 사탕수수 묘목을 실었다.*
멕시코에 위치한 아즈텍 문명을 1521년 25만명대 700명이라는 병력 열세에서도 멸망시킨 코르테스 역시 사탕수수를 중남미에 깔았다. 뒤늦게 브라질을 차지한 포르투갈은 사탕수수밭에서 나오는 브라질당(糖)을 생산할 인력을 구하려 검은 대륙으로 눈을 돌렸다. 흑인 노예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마구잡이로 잡혀가기 시작하고 이런 말이 생겨났다. ‘사탕수수 있는 곳에 노예가 있다.’**
유럽에서 박해 받고 쫓겨난 유대인들도 서인도제도에 집단 이주, 농장을 차렸다. 생산이 아무리 늘어 가격이 내려도 사탕수수 농장만큼은 호황을 누렸다. 상류층의 기호품에서 일반인들의 필수품으로 성격이 바뀌며 수요가 무궁무진하게 늘어났으니까. 중남미와 카리브해는 곧 사탕수수로 뒤덮이고 설탕 산업은 최고의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떠올랐다.
뒤늦게 경쟁에 뛰어든 영국은 유대인 사탕수수 농장주 10명에게 남작 작위까지 내리며 생산을 독려했다. 1653년 영국과 네덜란드간 1차 영·란전쟁도 카리브해 설탕 산지의 주도권 다툼으로 일어났다. 중남미 최초의 독립혁명이자 흑인들이 아프리카 바깥에서 세운 최초의 정권(1804년 독립 선언)을 세웠던 설탕의 섬, 생 도밍고의 흑인 폭동은 중남미의 역사를 갈랐다. 유럽의 강대국들이 저마다 설탕에 투자하고 나선 이유는 삼각 무역의 핵심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달콤하고 하얀 설탕에 묻은 검은 눈물과 저주를 푼 것도 역시 설탕. 독일의 약제사 겸 화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프란츠 칼 아카드(Franz Karl Achard, 1753~1821.4.20)가 유럽의 추운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해내는 정제법을 19세기 초반 개발한 뒤부터 설탕의 검은 잔혹사는 일단 멈췄다.**** 사탕무 정제 설탕이 주목받은 요인 역시 전쟁에 있었다.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무역 길이 막혀 사탕수수가 들어올 길이 막힌 덕분에 사탕무 정제 설탕의 수요가 늘었다.
설탕은 우리나라 산업의 초기 성장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품목이다. 1950년대~196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산업을 대표하는 업종은 설탕과 면제품, 밀가루 등의 삼백산업(三白産業)이었으니까. 1970년대 초반까지도 설탕은 귀한 대접을 받으며 쓰임새도 많았다. 더운 여름날이면 시원한 설탕물을 마시고 명절이면 선물용 설탕 포대가 오갔다. 요즘이야 비만의 요인으로 지목되지만.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콜롬버스의 항해일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신(God)이다. 두 번째로 빈도가 높은 단어는 금(Gold). 항해일지에서 보는 대로 종교적 열망이 강했다는 그는 4차례 항해 동안 신대륙의 일부라고 믿었던 섬의 두 곳에 예배당을 짓고 십자가를 올렸다. 콜롬버스는 다른 십자가도 세웠다. 금을 내놓지 않는 원주민을 죽이기 위한 십자가 형틀은 300개에 달했다. 교회 지붕과 형틀로서의 십자가의 차이는 서구인들의 진짜 항해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말해주는 사례다.
** 최초의 집단적인 일꾼으로서 흑인 노예도 실은 포르투갈이 먼저 시작했다. 일찍부터 사탕수수 재배에 열을 올렸던 엔리케 왕자(왕으로 등극하지는 못했지만 항해왕으로 기억되는 인물)는 1444년 235명의 흑인을 잡아와 노예로 팔았는데 이게 대규모 흑인 노예의 시작이었다.
*** 흑인 노예를 아프리카에서 잡아 아메리카 대륙에 팔은 선박은 아메리카의 설탕이며 담배 등 작물을 싣고 유럽으로 향한 다음 구슬과 총포, 술, 조악한 옷가지를 아프리카 추장 등 유력자들에게 넘기고 노예를 포획하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서구가 주도한 이른바 ‘삼각무역’은 3세기 이상 지속되며 아프리카를 수탈하는 동시에 서구를 살찌웠다.
**** 아카드의 부친은 프랑스에서 종교박해를 피해 독일로 이주한 신교도 가문의 일원으로 프랑스에 종교적 관용이 있었다면 인조 금에 다름 없었던 사탕무 정제 설탕은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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