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파운드. 영국에서 통용되는 최고액 화폐다. 우리 돈으로 약 7만 1,728원의 가치를 지니는 50파운드화의 앞면 도안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초상화.(모든 영국 지폐의 앞면은 색상과 금액 표시만 다를 뿐 인물 도안은 여왕 초상화가 공통으로 들어간다). 뒷면 주인공은 잉글랜드은행 초대 총재인 존 호브론 경이었으나 지난 2011년부터 새로운 지폐가 나왔다.
50파운드 신권의 뒷면에는 두 사람의 초상화가 들어갔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와 매슈 볼턴(Matthew Boulton). 영국 화폐 중에서 두 사람이 나오는 도안은 50파운드 신권이 유일하다. 왜 그랬을까. 제임스 와트야 증기기관을 발명해 산업혁명 확산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지만 볼턴까지 포함된 이유는 뭘까. 볼턴은 단순한 동업자로 자금을 지원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볼턴은 증기기관과 산업혁명에서 와트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 볼턴이 없었다면 와트의 증기기관이 퍼지는 데 보다 많은 시간이 걸릴 뻔 했다. 와트도 돈방석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볼턴은 자금을 대는 동업자일 뿐 아니라 기술 개량과 판로 개척, 특허 연장에 이르기까지 와트 증기기관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증기기관’이라는 구슬 세 말을 제대로 꿰어서 ‘보물’로 만든 인물이 바로 볼턴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에 특허를 취득한 시기는 1769년. 글레스고우 대학의 엔지니어로 근무할 당시 수리를 의뢰받은 ‘뉴커먼(Newcomen) 엔진’을 10여년 연구 끝에 획기적으로 개량, 특허권까지 따냈으나 더 이상의 성과가 없었다. 낙심한 와트가 본업인 측량 기사 일로 돌아갔을 때 8살 많은 볼턴이 나타났다. 와트 증기기관의 성공을 미리 내다본 볼턴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도맡았다.
볼턴은 1772년 특허권의 3분의 2를 1,200파운드(런던 사무직의 평균 연봉이 100파운드 이하이던 시절, 1,200파운드는 거금이었다)에 매입하고는 특허 연장에 온 힘을 쏟았다. 와트가 14년을 받았던 특허 시한을 17년 연장해 31년으로 늘렸다. 볼턴은 연구 자금을 대고 상하운동을 회전운동으로 바꾸라고 조언하며 당대 최고의 기계기술자들을 와트에게 붙여줬다.
볼턴이 와트를 지원할 수 있었던 기반은 막대한 재력. 와트를 만날 때 40대 중반의 사업가였던 볼턴은 영국에서 가장 큰 수력 공장을 운영할 정도로 잘 나가는 사업가이며 유명한 학자들과 매월 정례 토론을 갖는 아마추어 학자였다.(한 달에 한 번, 달이 가장 크게 뜨는 날 모였던 이 모임은 루나 소사이어티로 발전했으며 영국의 산업혁명에 크게 기여했다).
볼턴은 원래 부유했지만 결정적으로 결혼을 통해 거대 재산을 쌓았다. 우선 금속제 잡화 제작업자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산이 적지 않았다. 재산은 부유한 친척과 결혼하며 더욱 불어났다. 첫 결혼 10년 만에 아내가 죽자 바로 처제를 후처로 들였다. 마침 처남도 일찍 사망하자 볼턴은 친가와 처가의 자금을 모아 영국 최대 공장을 지었다. 주력 상품인 금속제 트로피와 고급 단추 제작 사업도 번창하고 주화를 찍는 신규사업도 펼쳤다.
영국 대형 제조업의 시초로도 꼽히는 볼턴의 소호 공장은 단체 관람객이 몰려들 만큼 런던의 명물로 대접받았다. 종업원 800여명이 중앙집중식 난방이라는 작업 환경에서 금속제 박스와 체인, 칼자루 등을 생산한 소호 공장에서 볼턴은 원시적 산재보험도 선보였다. 근로자가 급여의 60분의1을 적립하면 상해·사망시 최종 임금의 80%를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볼턴이 와트에게 주목하게 된 계기도 소호 공장 때문이었다. 수력으로 움직이는 소호 공장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봄 갈수기에 증기기관을 보조동력으로 삼으려던 계획이 후원과 동업으로 이어졌다. 볼턴의 조언과 일급 기계기술자들이 투입돼 새롭게 만든 증기기관은 예전의 뉴커먼 엔진보다 효율이 뛰어났다. 출력은 높아진 대신 석탄 소비량은 4분의 1이나 줄었다.*
볼턴은 혁신적인 마케팅 기법도 선보였다. 고가의 증기기관을 구매하는 고객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와트 증기기관 채택으로 줄어드는 석탄 소비량에 해당되는 금액을 할부로 받았던 것이다. 이는 구형 뉴커먼 엔진을 바로 교체하는 효과를 냈다. ‘볼턴과 와트 상회’가 1800년까지 판매한 대형 증기기관은 약 450여대. 4마력짜리 엔진이 327파운드, 50마력짜리가 1,727파운드라는 비싼 가격에도 주문이 잇따랐다.
최대 수요처는 방직업. 증기기관 114대가 뽑아낸 영국산 면직물은 세계 의류시장을 휩쓸었다. 갱도의 배수용으로 증기기관 56대가 설치된 탄광에서도 연간 1억5,000만톤의 석탄을 쏟아냈다. 유럽 전체 생산량의 다섯 배에 이르는 영국 석탄은 제철과 기계공업 발전으로 이어졌다. 증기기관은 제철소에 37대, 제분과 맥주공장에도 39대가 들어갔다. 볼턴은 증기 프레스를 이용해 영국은 물론 동인도회사와 러시아, 신생 시에라리온의 금화와 은화도 찍어냈다.
1809년 8월17일, 동업자 와트보다 10년 일찍 사망(81세)할 때 볼턴은 영국 최고 부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 받았다. 사망 207년이 지났지만 그의 이름은 50파운드 지폐 뿐 아니라 산업과 과학의 접목을 고민했던 진정한 벤처 사업가로 경제사에 전해져 내려온다. 고향에 세워진 버밍엄 대학의 매슈 볼턴 캠퍼스에도 그의 이름이 남아 있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볼턴의 자금력과 기술 지원으로 개량된 와트 증기기관이 최초로 납품된 시기는 1776년 3월. 볼턴의 근거지인 버밍엄의 한 탄광에서 사들였다(증기기관의 본래 개발 목적이 탄광의 배수용이었다). 마침 1776년은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해이며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초판이 출간된 해. 1776년이라는 시대적 공통점 때문에 ‘미국 독립과 국부론, 와트 증기기관은 세 쌍둥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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